소설리스트

4-1화 (30/156)

4. 어른의 경계선에서

아버지께서 수도에 올라오셨다.

카이사르와 관계된 일이겠지만, 나나 레너드에게 그런 일을 말씀하지 않으시니 확신은 없다. 아니, 어쩌면 레너드와는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점잖고 품위 넘치는 말투로 우리의 안부를 확인했다.

“검투 대회 결과는 들었다. 준우승도 훌륭하다. 수고했다, 레너드.”

“감사합니다. 모두 잘 가르쳐 준 헬레나 덕분이죠.”

“학교에는 언제 돌아갈 테냐.”

“다음 주에 돌아가려고요.”

“졸업 후 진로는 정해 두었느냐?”

“일단은 달튼 경의 호의를 받아 적기사단에 가 볼까 합니다.”

레너드는 기사단으로 진로를 확정한 모양이었다. 그간 무인 출신이 없었던 페레스카로서는 꽤 독특한 행보였다.

음, 그러고 보니 난 검이 특기이면서도 검과는 영 연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던 거로군.

“헬레나는 어찌 지냈지? 이번 검투 대회에서 꽤 소란이 있었던 모양이던데.”

“단순한 해프닝이었어요.”

“괜한 시비에 휘말린 게 아닐까 염려되는구나.”

“전하께서 알아서 차단해 주신 덕분에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렇군. 감사한 일이로구나.”

황후와 만나서 니캉내캉 편먹자는 얘길 들었다는 건 접어 두자. 어차피 황후랑 편먹을 생각도 없고.

그보다 지금은 다른 이야기가 급했다.

“아버지.”

“그래, 헬레나.”

“저, 수도로 올라올까 해요.”

내 말에 달그락거리던 식기 소리가 한순간에 그쳤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레너드까지 동그래진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이유가 뭔지 들어 보자.”

“성인이 되면 사교계에도 가끔 나가 볼까 해서요. 오라버니도 졸업 후엔 수도에서 지내게 될 건데, 떨어져 지내는 건 외로워서 싫어요.”

“사교계에 나간다고? 헬레나 네가? 역시 이번 일로 누가 협박이라도 한 게냐?”

“아니……, 제가 어디서 협박이나 듣고 다니는 애는 아니잖아요.”

가족들은 내 유능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딱히 숨길 것 없이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아왔으니까.

“뭐, 당장은 아니고요. 일단 본저로 돌아가서 짐도 챙겨야 하고, 정리할 것도 있고…….”

“레너드. 우리 헬레나가 저 스스로 수도에 오겠다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네, 아버지. 우리 두 사람 다 뭔가에 홀린 게 아니라면요.”

“아이참, 두 분 다 그럴 거예요?”

얼굴이 달아오른다. 물론 내가 뭔가 하고 싶어 하거나 의욕을 내비친 적이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렇게 놀릴 일은 아니잖아.

“혹시 제가 뭔가 하는 게 싫으신 건가요?”

내 질문과 동시에, 아버지와 레너드가 소리쳤다.

“아니, 그럴 리가!”

이 자리에 어머니가 있었다면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 나도 네 어머니도, 뭐든 지원해 줄 테니 말이야!”

“그래, 헬레나! 어려운 게 있으면 오빠도 도와줄게!”

“저기……, 둘 다 진정해요. 제가 세계를 구하러 떠나겠다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생활하는 장소를 수도의 별저로 옮기겠다는 것뿐이라고.

나는 두 남자를 진정시키느라, 그날 저녁 식사는 포기해야만 했다.

* * *

아버지와 레너드에게 설득, 아니 통보했으니, 다음 차례는 해밀턴이다.

나는 시내에 있는 예의 레스토랑에서 해밀턴을 기다렸다.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라 가게는 한산했다.

“이런. 제가 늦었나요?”

약속 시각이 거의 다 되어 해밀턴이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생긋 웃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일찍 와 있었을 뿐이에요. 요즘 좀 한가해서.”

제자 셋 중 하나는 학교 때문에 바쁘고, 하나는 황후랑 싸우느라 바쁘니, 스승인 나는 한가해질 수밖에.

그런 속뜻을 이해한 듯, 해밀턴이 ‘하하’ 하고 소리 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식사 대신 간단하게 차와 다과만 주문한 후 대화를 재개했다.

“곧 공작령으로 돌아가시겠군요.”

“네. 나흘 후에 출발하려고요.”

“이번에 가시면 또 언제 올라오시게 될까요. 요즘엔 전하도 바빠 공작령에 내려가지 않으시니, 참 아쉽습니다.”

카이사르가 공작저에 올 때마다 함께 내려왔던 해밀턴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와 정이 꽤 든 모양이다.

우리는 해밀턴을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자주 놀리곤 했지만, 그렇기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저, 금방 다시 올라올 겁니다, 자작님.”

“네? 수도에 말입니까?”

“네.”

“아니, 무슨 용건으로?”

“성인이 된 귀족 영애가 사교의 중심지인 수도에 들락거리는 거야 흔한 일 아닌가요.”

“엇, 그건 그런데, 뭐랄까 공녀께서는 좀……, 으음……, 좀 다르지 않습니까?”

“게으르다는 말을 좋게 포장해 주시려 애쓰실 필요 없어요.”

“뭐어, 알고 계시다면야…….”

해밀턴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민망해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자작님, 일전에 제게 정보원이 되어 주겠다 하셨죠. 그 약조는 아직도 유효한가요?”

“물론입니다. 다만…….”

“다만?”

“만약 공녀께서 전하와 황후 사이를 저울질하기 위한 정보라면, 드릴 게 없습니다.”

“어머나, 자작님.”

나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해밀턴에게 말했다.

“제가 고작 그런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아끼는 제자를 괴롭히기 위해 그 적과 손을 잡는?

내 분노를 느낀 것일까. 해밀턴이 코를 잔뜩 찡그리며 쓰게 웃더니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저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노파심이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알아요. 그렇기에 저도 자작님을 믿는 거고요.”

괜히 벽창호 해밀턴이 아니지.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십니까?”

“네, 이것입니다.”

나는 준비해 온 종이 뭉치를 테이블 위에 놓고 해밀턴에게 쓱 밀었다. 해밀턴이 그것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 후에 종이를 집어 들고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뭡니까, 이 명단은?”

종이를 대강 훑어본 해밀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날 쳐다보았다.

“지난번 황태자 즉위식 이후 지금까지 저에게 초대장을 보낸 귀족과 단체의 명단이에요.”

내게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물론 단순한 사교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사교만을 위한 모임은, 적어도 작위나 단체의 이름을 내세워 하는 모임 가운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단이나 길드, 취미 활동을 빙자한 각종 모임, 예술가 단체와 학교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아니……, 초대장을 많이 받으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는…….”

해밀턴이 혀를 내둘렀다.

“사실 상당수는 검투 대회 이후에 온 것들이에요. 뭐, 지금은 카이사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날아오고 있지 않지만.”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셨습니까?”

“기억하긴요. 거절 답장 쓰면서 정리해 둔 거죠.”

크, 또 슬픈 기억이 떠오르는군.

거절 답장 쓰면서 정말 팔 빠지는 줄 알았다. 그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였다고.

“이걸 제게 보여 주시는 의도가?”

“그 명단을 보고 제가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나누어 주세요.”

“네?”

해밀턴이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해 왔다.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리와 아닌 자리를 나눠 달라고요.”

결국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고 나서야 해밀턴의 눈이 커다래졌다.

“진심이십니까? 사교 모임에 나가시겠다고요?”

……아, 이해를 못 했던 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였던 건가.

대체 이 사람들 머릿속에 내 이미지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뭐, 대부분 내 책임이긴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부족한 건 뒤를 받쳐 줄 세력이에요. 지금 카이사르 편에 있는 귀족 중 상당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전하께서 황태자로 즉위하셨기에 이쪽에 붙은 이들이니, 불리해지면 언제든 떠날 겁니다.”

“네, 그러니 흔들림 없이 받쳐 줄 세력을 확보해야겠죠.”

어디서든 중도파는 주의해야 하는 법이다. 한 번 세력의 저울이 기울어지면, 되돌리는 데 많은 품이 든다.

“하지만 공녀께서 나서겠다 하시면, 분명 전하께서 반대하실 겁니다.”

“카이사르가 말인가요?”

“저도 이미 전하께 말씀드렸던 부분이거든요. 하지만 공녀를 권력 싸움에 휘말리게 하지 말라고 화내시는 통에, 두 번 다시 입도 뻥긋 못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해밀턴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카이사르는 내게 나를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이런 의미였겠지. 나를 칼 없는 전장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

“제 인생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카이사르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아니죠. 그래도 나중에 전하가 물으시면 제가 말리긴 했다고 변명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해밀턴이 정색하며 말했다.

음, 그 솔직함. 마음에 드는군.

“그러면 사흘 안으로 부탁드려요. 제가 나흘 후에는 본저로 돌아가야 해서.”

“맡겨 주십시오. 이틀 안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해밀턴이 종이를 받아 갈무리했다. 해밀턴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사실 일 처리는 로위나 쪽이 더 똑 부러지는 편이지만 아직 그쪽은 완전히 신뢰할 만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하아, 이대로 쭉쭉 나가 공녀께서 황태자비가 되어 주시기까지 한다면 정말 바랄 게 없겠습니다.”

“제 부모님도 안 바라는 걸 왜 자작님께서 바라고 그러세요.”

“공녀께서는 탐나지 않으십니까?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 권력의 자리인데.”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것이 말인가요?”

내가 쓰게 웃으며 반문했다.

“여자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지 않으면 권력을 가질 수 없나요?”

“저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해밀턴이 뒷말을 흐렸다.

해밀턴을 책망할 의도로 꺼낸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써 밝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앞으로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많아지겠어요.”

뭐, 자초한 일이지만.

다른 몸, 다른 인생으로 태어나도 게으르게 사는 건 녹록한 일이 아니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체념을 삼키듯 차를 마셨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