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스토랑을 나섰을 땐 해가 저물어 거리가 어두웠다. 조금 이르게 나선지라, 마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날도 선선한데, 좀 걸을까요?”
해밀턴이 모자를 쓰며 내게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도의 밤은 낮만큼이나 밝고 화려했다. 시골인 공작령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간간이 인파를 헤치고 뛰어다니는 꼬질꼬질한 어린애들이 보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큰 도시에도 부랑아들은 있군요.”
“어디에나 있죠.”
“단테 레나투스 황제는 부랑아 출신이라죠. 요즘 부랑아들 중에도 한 나라의 지배자를 꿈꾸는 이가 있을까요?”
“단테 황제는 워낙 특별한 사람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와 피 색도 다를 것 같습니다.”
해밀턴의 농에 내가 파핫 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용도 봉인한 사람이니.”
내가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내 말에 해밀턴은 다른 것을 떠올린 듯 ‘아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용을 숭배하는 이상한 종교 단체가 나타났다는 모양입니다.”
“종교 단체요?”
“네. 서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얻고 있는 모양인데……, 규모도 크지 않고 별다른 사고를 일으키지도 않아 나라에서는 방치하는 것 같습니다.”
“성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런 조무래기들까지 상대하지는 않겠다는 거겠죠, 뭐.”
인간들을 위해 힘들게 용을 때려잡아 줬더니, 그 인간들이 용을 숭상한다는 건가.
기가 찬 일이군.
‘이런 꼴 보자고 내가 내 생명 깎아 가며 용을 봉인했던 게 아닌데.’
어째 입맛이 쌉싸름하다.
“뭐……, 어차피 잠깐 유행했다가 사라질 종교겠죠.”
“그렇겠지요.”
내 말에 해밀턴이 가볍게 긍정하더니, 곧 소리 내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단테 황제가 이 꼴을 봤다면 아마 무덤에서 뛰쳐나왔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그저 맞장구치며 웃었다.
내 이야기인데도 남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단테’에게서 점점 멀어져, ‘헬레나’의 인생에 적응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풍요롭고, 따뜻하고,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 단테와는 다른 삶. 시간이 흐르며 단테와 헬레나의 인생이 분리된다.
그것이 어쩐지 조금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어 쓰게 미소 지었다.
‘왜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걸까.’
그저 밤이라 조금 감상적이 된 것일지도.
그 감정을 들키는 게 부끄러워서 나는 재빨리 다른 화제를 꺼내며,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게으른 인간의 밤을 걷고 또 걸었다.
* * *
공작저로 돌아온 후 나에게는 아고트에게 검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일과가 생겼다.
가장 먼저 해밀턴이 정리해 준 여러 귀족과 단체들의 특성을 암기했다. 적과 아군, 필요한 자와 경계해야 할 자를 구분해야 했다.
그중 더러는 직접 찾아가거나, 혹은 초대하여 조금씩 인맥을 형성해 나갔다. 사교계에 당최 나서지 않던 공녀의 사교 활동은 단연 화제가 됐다.
그러나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겨울과 봄을 보내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오늘도 초대장이 왔습니다.”
아고트가 싹싹한 목소리로 아침 일찍 다가와 내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 손을 뻗어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으음.”
초대장을 확인한 나는, 하품이 쏙 들어가는 기분이 됐다.
“왜요, 아가씨? 어느 댁에서 온 건데요?”
“브란테 변경백.”
“헉.”
“으음, 드디어 올 게 왔다는 기분이네.”
파티 명목도 무려 율리카 브란테의 생일 파티다. 성인이 되는 생일이니,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겠지.
“안 가실 거예요?”
“가야지. 그러잖아도 브란테 영애랑 내가 라이벌인 양 소문이 나 있는데, 이걸 거절하면 나만 쪼잔한 사람 되는 거야.”
“라이벌이라니, 아가씨랑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잖아요.”
아고트의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소문이란 건 진실이랑은 상관없어.”
그러니까 얼마든지 이용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겠지. 음, 전투복이 필요하겠어.”
나는 율리카 일당이 내 드레스더러 ‘촌스럽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물론 날 물 먹이겠다는 심산에 한 말이었겠지만, 그런 것에 안목이 없는 나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지원군이 필요해.”
“지원군요?”
“아고트, 당장 수도로 사람을 보내서 로위나 에버그린 양을 모셔 오도록 해.”
나는 내 피로함을 대가로 로위나를 소환하기로 했다.
* * *
레너드는 학교를 이유로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고, 다른 영식들은 브란테 영애의 협박 때문인지 에스코트를 제안하는 이가 없었다.
결국 나는 카이사르 대리로 나선 해밀턴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젠장.
“오라버니가 학교 땡땡이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제가 싫으십니까?”
내 절망에 해밀턴이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자작님은 무려 제 나이의 두 배이시잖아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직 총각인 해밀턴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 사실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오늘 동행인으로는 해밀턴이 적격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늘 카이사르 대리로 참석했다. 본인만큼의 효력은 없지만, 카이사르가 브란테 영애가 아닌 나와 더 가깝다는 무언의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차를 한참이나 달려, 우리는 시간에 맞춰 변경에 위치한 성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홀에 들어섰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홀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꽤, 아니, 상당히 많았다.
‘이게 뭐야. 황태자 즉위식 때보다 더 화려한 느낌인데?’
권력 과시용인가? 너무 과하면 황제의 눈 밖에 날 텐데.
‘여기가 변경 지역이라는 게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을지도.’
어차피 황제도 발레르의 힘이 필요했기에 황후를 아내로 맞은 걸 테니, 이 정도는 용인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삼 율리카가 왜 내 드레스를 걸고넘어진 줄 알겠다. 같은 촌사람끼리 웃긴다 싶었는데, 이쪽 촌은 촌이 아니군.
“저쪽에 브란테 영애가 있군요. 가서 인사할까요.”
잠시 넋을 다른 곳에 보낸 나와 달리 해밀턴은 홀에 들어서자마자 착실하게 제 임무를 했다. 이럴 땐 고지식한 그와 함께 온 것이 다행이다 싶다.
나와 해밀턴은 율리카에게 다가갔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는 그녀는, 내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율리카 브란테 영애.”
나와 해밀턴이 각자의 방법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다른 사람들과 떠들어 대던 율리카가, 몇 초쯤 간격을 두고서야 이쪽을 눈치챘다는 듯 ‘아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요것 보게. 분명 내가 다가오기 전부터 알았을 텐데.
“두 분 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율리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방긋 미소 지었다.
“시골길을 따라서 오시기 힘들었을 텐데. 와 주셔서 고마워요, 페레스카 공녀.”
이것은 너희 집 시골이라 길 험하지? 라는 말이다.
“이 먼 변경까지의 여정인데, 길이 험한 게 대수겠나요.”
이것은 너희 집은 더 먼 구석탱이에 있잖아, 라는 반격이다.
방실방실. 생글생글.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끊임없이 웃었다.
“참, 약소하지만 축하의 의미로 공작가에서 선물을 준비해 왔답니다.”
“어머, 그런 감사한 일이! 혹시 올해 수확한 옥수수 같은 걸까요?”
율리카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 재미있어서일 리는 없고, 내 기를 죽여 보겠다 이거다.
브란테가의 파티이니 브란테가 편인 가문들이 대거 참여했을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표정에 흐트러짐 없이 율리카에게 대답했다.
“저런, 영애. 옥수수는 여름에 수확하는 거예요.”
내 반격에 율리카는 사고가 고장 난 듯 잠시 멈췄다. 다시 가동된 건 몇 초 후였다.
“그, 여, 역시 전원에 사시니 잘 아시는군요?”
“그보다는 상식이니까요. 어머, 저런. 정말 모르셨던 건가요?”
내가 과장되게 놀라니, 율리카가 ‘으윽’ 하고 신음했다. 그때 곁에 가만히 서 있던 해밀턴이 내 편을 들어 한마디를 거들었다.
“공녀, 사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의 무지를 들추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니까요.”
“그렇네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영애.”
“네? 아, 아뇨!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아무래도 저희는 잠시 자리를 피해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게요. 그럼 영애, 다시 한번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마무리로 생긋 웃어 준 후, 나와 해밀턴은 반격이 돌아오기 전에 총총 자리를 떴다.
원래 이런 말싸움은 상대가 얼떨떨할 때 재빨리 빠지는 게 상책이다.
크으, 짜릿하군. 이 남자, 의외로 나랑 궁합이 잘 맞을지도.
“있잖아요. 저, 브란테 영애가 쩔쩔매는 거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성격 참 안 좋으십니다.”
“역시, 그렇죠?”
나름 심각했던 내 대답에 해밀턴이 콧방귀를 뀌듯 웃었다.
“하긴, 전하와 사이좋게 지내실 수 있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죠.”
나랑 그 녀석이 닮았다는 건가. 이건 참,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알쏭달쏭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