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32/156)

* * *

파티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대체로 해밀턴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게는 잘 다가오지 않았다. 율리카가 보는 앞에서 나와 친한 척 해 봐야 좋을 게 없을 터다.

대신 나는 느긋하게 참석한 귀족들을 관찰했다.

‘골수 황후파와 중도파인 자들이 한눈에 보이는군.’

관찰을 하려면 한 걸음 떨어져서 봐야 한다. 즉, 아무도 내게 관심 갖지 않는 이 파티는 그야말로 최적.

‘그나저나 브란테 변경백이 안 보이는데.’

부인은 보이는데, 변경백은 안 보인다. 딸의 생일인데, 자리를 비운 건가?

아니면 어디 은밀한 곳에서 주요 귀족들과 따로 밀담이라도?

“손을 좀 씻고 싶으니 안내해 줄 이를 불러 주겠어?”

나는 빈 쟁반을 들고 다니는 시종을 불러 쟁반 위에 음료 잔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아, 네. 곧 사람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곧 하우스 메이드 하나가 내 곁으로 총총 다가왔다. 나는 메이드를 따라 홀에서 잠시 벗어나 성의 복도를 걷게 됐다.

홀에서 멀어질수록 고요해진다. 나는 가벼운 이명을 느끼며,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홀에서는 백작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던데.”

“주인님께서는 흡연실에 계실 겁니다.”

곰 잡는 것도 아니고, 흡연실에 하루 종일 있을 리 없잖아.

‘너무 캐물어도 좀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나는, 문이 열려 있는 방을 하나 발견하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 방은 왜 문이 열려 있지?”

“환기하는 중입니다. 안 그러면 책이 상해서요.”

책이라.

나는 문의 경계선 밖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서재라기에는 작았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에 틈이 없을 만큼 책장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빽빽하니 환기를 자주 하긴 해야겠구나.’

여기가 중앙 서재는 아니겠지, 설마.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거죠?”

그때 복도 저편에서 율리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더니, 율리카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례하시군요, 공녀. 남의 거처를 기웃거리며 다니시다니.”

“손을 씻으러 잠시 자리를 나온 것뿐입니다.”

“여긴 손 씻는 곳이 아닌데요.”

“아, 문이 열려 있기에 그만 시선을 빼앗겨서. 실례했군요. 하지만 서재가 작으면서도 알차고 훌륭하여 눈을 떼기가 어려웠어요.”

이건 진심이다.

이 서재는 뭐랄까, 집념 같은 게 느껴졌다. 작은 공간에 어떻게든 소중한 책을 채워 넣으려는 집념 말이다.

“백작님께서 상당히 책을 즐기시는 모양이네요. 중앙 서재 외에도 이런 곳을 만들어 두셨다니.”

“……거예요.”

“네?”

“제, 제 서재라고요.”

율리카가 내 눈을 피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뭐야, 그 얘길 뭐 이렇게 어렵게 하는 거야.

“참, 마법을 배우셨다 했죠? 마법을 쓸 줄 아시나요?”

“마법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다만 마법 이론과 학문적 지식에 관심이 많아서…….”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린 율리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 학문적 지식을 쌓는 건 교양을 쌓기 위해서예요! 훌륭한 영애라면 이 정도 지식은 당연하지 않나요?”

“그, 그러네요.”

왜 화내는 건데.

“옥수수 수확 시기보다!”

저런,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본인 말마따나, 몰라도 상관없는 지식이잖아.

“네, 대단하시네요.”

“하! 어떤가요? 라비 로스의 소환식이나, 중첩 마법 이론, 가라미스의 시전서, 폰테의 봉인의 서, 이런 것들, 공녀는 하나도 모르시잖아요?”

“네, 전 잘 모르겠어요. 영애, 마법에 관해서는 정말 해박하시군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지식도 지식이거니와, 열정과 애착도 있는 것 같다.

얜 황태자비가 될 게 아니라 학교에 교수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요. 다들 쓸모없다 말해도, 알고 보면 하나도 버릴 게 없는 학문들이랍니다.”

내 칭찬에 율리카가 으쓱해서 말했다. 나는 “와아, 대단하시네요” 하고 박수까지 쳐 줬다.

‘다들 쓸모없다고 했던 모양이구나.’

하긴, 그렇다. 이제 마법은 사라진 기술이 되었으니까. 아무리 이론을 잘 알아도 실현이 안 되는데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말자. 얘도 뭐 내세울 게 하나는 있어야지.

‘참 나, 적인 애한테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다 해 주고 있네, 내가.’

어쩌겠어.

카이사르만 빼고 보면, 이런 정치 싸움 시시할 뿐인데.

마법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율리카의 눈빛은 내가 보아 온 중에 가장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래, 너도 잘하는 게 있긴 있구나. 솔직히 기특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어떤 배움에도 쓸모없는 것은 없어요. 영애는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군요.”

내 말에 율리카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처음엔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는데, 곧 놀란 듯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내 화가 난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국 새침하게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서재의 문을 쿵 하고 닫아 버린다.

“그만 가세요.”

율리카가 매정하게 말했다.

날 돌아보지도 않고.

“공녀께서는 숙녀의 정숙함을 배우시는 게 좋겠어요. 남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아무 방이나 기웃대다니, 숙녀로서는 최악이네요.”

굳게 닫힌 서재의 문처럼, 율리카의 마음도 코앞에서 굳게 닫힌 것 같았다.

그 고집이, 어째서인지 내게는 안쓰러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애쓰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것만 같다.

그녀에게 친구가 있다면, 한 번쯤은 그녀에게 물어봐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뭐, 내가 얘 친구도 아니고. 거기까지 오지랖 부릴 필요는 없지.’

카이사르의 적은 나의 적.

율리카는 황후의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제가 큰 실례를 했네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다시 메이드를 따라 본래의 용건을 해결하러 자리를 떴다.

복도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한 번 뒤돌아봤으나, 율리카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아마 홀로 되돌아간 것이겠지.

율리카 브란테는.

적.

‘……이겠지.’

확인이라기보다는 다짐 같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뇐 후, 나는 다시 텅 빈 복도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 * *

율리카의 생일 파티 이후, 저택 내 식솔들 사이에서는 기이한 긴장감이 돌았다.

“곧 가을이면 우리 아가씨도 성인이 되는 생일이시잖아.”

“맞아. 적어도 브란테가에 꿀릴 정도는 아니어야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해. 은 식기도 모조리 다시 손보고, 음식 재료도 동나지 않게 미리 준비하고.”

“정원도 다시 손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

“좋은 생각이군. 주인님께 말씀드려서 연못을 하나 더 파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고용인들은 시간만 남으면 삼삼오오 모여 내 생일 파티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내 생일 파티에 왜 너희들이 더 혈안이 되어 있는 건데?”

“고용인들은 고용인들끼리의 전쟁이 있으니까요.”

어느 저녁. 침구를 정리해 주러 방에 온 아고트가 눈빛을 빛내며 답했다.

“브란테가에 갔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휴, 그 댁 고용인들이 얼마나 기고만장했는데요. 자기네 주인 아가씨가 황태자비가 되면, 혼약식에 아가씨 자리를 가장 앞자리에 마련해 주겠다며 거들먹대지 뭐예요?”

“푸하핫!”

“아이참, 웃으실 일이 아니라고요.”

세간에서 나와 율리카를 라이벌로 놓고 있으니, 고용인들도 나름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난 율리카를 라이벌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황태자비 자리에 관심도 없는데.

“브란테 영애가 황태자비가 되는 게 싫어, 아고트?”

“당연하죠. 그 댁 아가씨가 자꾸 아가씨한테 시비 걸잖아요.”

“그럼 내가 카이사르의 부인이 되는 게 좋겠어?”

“그건……, 으음……, 그건 별개의 문제로…….”

좋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하는군.

“하여튼 다들 재미있게 사네.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거지, 뭐.”

그 소재가 내 생일 파티라는 건 좀 그렇지만.

‘하긴, 내가 귀찮고 싫다고 해도 이번엔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의 생일 파티는 가까운 지인과 친지들을 불러 저녁 만찬을 하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나 성인이 되는 생일은 의미가 남다르다. 레너드 때도 소공작을 받은 열여덟 살 생일만큼은 꽤 성대하게 파티를 열었다.

더구나 지금 나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카이사르와 율리카를 포함한 치정 로맨스에 끼어 있는 상태.

딱히 고용인들의 성화가 아니어도, 율리카의 생일 파티 규모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그분도 오시겠죠?”

귀찮은 일 잔뜩 생기겠구나 하고 아련한 기분을 곱씹고 있는데, 베개를 팡팡 두드리던 아고트가 막 생각난 듯 물었다.

“그분? 카이사르?”

“브란테가의 파티에는 안 오셨잖아요. 그래도 아가씨는 그분의 스승님이니까, 오시겠죠?”

“아니, 안 올걸? 초대장도 안 보냈으니까.”

“네? 왜요?”

“어차피 못 올 건데 고민되게 뭐하러 보내.”

지금 카이사르가 오는 건 단순히 친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해석되지 않는다.

‘물론 페레스카는 명실공히 황태자파니까, 언뜻 보면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할 시기다. 카이사르의 세력은 아직 견고하지 않으니까.

괜히 황후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보다, 무승부 상태로 두는 게 나을 것이다.

“저런, 초대장도 못 받으셨다니. 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분.”

아고트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쌤통이라는 의미인지, 동정의 의미인지 말투가 애매했다.

“스물두 살이 초대장을 못 받았다고 우는 거, 좀 기분 나쁜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농담하듯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