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33/156)

* * *

파티 일주일 전부터 선물이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 네 오빠 때보다도 많구나.”

매일 홀에 탑처럼 쌓이는 선물을 보며 어머니가 감탄했다.

과연 이것들은 날 보고 보내는 선물인가, 페레스카를 보고 보내는 선물인가, 아니면 카이사르를 보고 보내는 선물인가.

물으나 마나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아니겠지만.

레너드는 학교에서 휴가를 얻어 이틀 전에 집에 돌아왔다.

“오라버니, 또 키 컸어?”

“응. 이제 전하와 비슷할걸?”

“아니, 어떻게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계속 커? 난 더 안 크는 것 같은데?”

“헬레나는 더 안 커도 괜찮아. 너무 크면 내가 안아 주기 어렵잖아.”

레너드가 나를 폭 안아 주며 웃었다. 오랜만에 다정한 품에 안기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그렇지. 제자들보다 내 키가 작은 건 자존심이 좀.’

레너드나 카이사르야 그렇다고 치고, 나보다 어린 아고트보다도 작은 건 좀 씁쓸하단 말이지.

의상도, 장신구도, 구두도 모두 최상품으로 준비되었다. 수도에서부터 불러온 전문가들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책임졌다.

그리고 파티 전날, 오후.

아고트와 검 수업을 마친 직후, 아고트가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내게 물었다.

“아가씨, 혹시 한 시간만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 말이야?”

사실, 시간이 없다. 내일 파티 준비로 나도 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고트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해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생각해 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한 시간 정도라면.”

“아, 정말요? 잘 됐다! 그럼 저랑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세요?”

“좋아. 그전에 가서 옷은 좀 갈아입고.”

“네, 물론이죠 아가씨!”

아고트가 신이 나서 말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하고 의문이 퐁퐁 떠올랐다.

더구나 굉장히 수상쩍게도, 옷 시중을 들어 주던 베시마저 평소와 달리 히죽대고 있었다.

“베시.”

“네, 아가씨.”

“너도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아뇨, 전 아무것도 몰라요.”

뭔가 알고 있군.

뭔지 설명도 안 했는데, 대뜸 아무것도 모른다니.

대체 다들 무슨 꿍꿍이……, 어랏, 잠깐만.

“베시, 이 옷은 평상복으로 입기에는 좀 화려하지 않아?”

베시의 손길에 맡긴 채 옷을 입던 나는, 팔다리를 다 꿰어 넣은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베시가 꺼내 준 옷은 편안한 일상복이 아니라, 푸른색 바탕에 큐빅이 별처럼 박힌 드레스였다.

“아니에요. 오늘은 이걸 딱 입으셔야 해요. 제 감이 그래요.”

“대체 무슨 감이야.”

“이리 앉아 보셔요. 머리도 다 헝클어지셨잖아요? 제가 다시 손봐 드릴게요.”

뭔진 모르겠지만, 나에게 해코지를 할 애는 아닌지라 일단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베시는 날 거울 앞에 앉히고 빗으로 머리를 꼼꼼히 빗겨 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곱게 땋아서, 나비 모양의 비녀와 구슬이 달린 핀으로 장식했다.

“어쩜,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러게…….”

예쁜 건 나도 아는데.

그러니까 아닌 밤의 홍두깨도 아니고, 왜 갑자기 이러는 거냔 말이야.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보고 감탄하던 베시가 갑자기 울컥해서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 어느 틈에 이렇게 크셔서는……. 인생 사는 거 재미없다고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흐윽.”

인생 무료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베시. 그러니까 아직 감동하지 마.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어린아이인 아가씨를 돌봐 드리는 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서요.”

“베시도 참. 어른인 나도 계속 돌봐 줘야지.”

“그건 그렇죠. 똑똑하신 분이 생활감은 영 엉망이시니까.”

“그런 거 말할 땐 또 가차 없구나.”

내가 쓰게 웃었더니, 베시도 날 따라 웃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고트가 잔뜩 들뜬 얼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가씨, 이제 나오실 시간이에요.”

* * *

아고트와 베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 동쪽의 고용인 숙소였다.

“자, 문 열게요.”

아고트가 나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고트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드디어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축하드려요!”

“아가씨, 성년이 되시는 걸 미리 축하드려요!”

갑자기 시야를 덮치는 꽃 가루와, 사방에서 와글와글 터져 나오는 목소리.

“……어?”

이건 아무리 무딘 나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긴장한 내 모습에 고용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셨나 봐! 어쩜 좋아!”

“아가씨, 숨 쉬셔요. 괜찮아요.”

“엇, 아니……, 이게 도대체…….”

“아고트 저 앙큼한 게 꾸민 일이라니까요.”

주방 메이드인 마고의 애정 어린 투덜거림에 아고트가 쑥스러운 듯 베시시 웃었다.

곧 집사장이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곁에서는 다른 메이드가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다들 아가씨의 생일을 축하해 드리고 싶다고 해서 말이죠.”

“이런 거 한 적 없었잖아요.”

“아가씨께서 수도에 가겠다 하셔서, 다들 아쉬워했거든요.”

집사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이건 저희 고용인들이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정말 약소하지만, 받아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 그가 내미는 선물 상자를 받았다.

“열어 봐도 돼?”

“물론이죠.”

나는 조심스럽게 선물 상자를 열었다. 고용인들이 내 주변에 둥글게 서서, 내 반응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 손끝을 응시했다.

“……와.”

선물은 두 개의 검이 교차해 있는 모양의 청동 조각이었다. 검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판넬에는 ‘헬레나의 영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이거 주문품이야? 비쌌을 텐데, 다들 돈이 어디 있다고.”

“그 정도는 법니다.”

“죄송해요, 아가씨. 보석이 박힌 목걸이 같은 게 더 좋으셨을 텐데.”

베시가 아쉬워하며 말했지만,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이게 더 좋아! 내가 그런 데 관심 없는 거 다들 잘 알잖아.”

“잘 알죠. 암요.”

“아가씨 하면 역시 검이죠.”

몇 명이 농담처럼 말하자, 다들 큰 소리로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나도 함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분은 뭘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고르고 고른 언어로 나를 축복해 주는 기분.

“이 선물은 시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주방 메이드 마사의 농담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혀. 너희가 만들어 준 내 영혼인걸.”

홀에 쌓여 있는 선물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선물이다. 전생에서도 이것만큼 멋진 선물은 받아 본 적이 없다.

“자주 내려올게. 정말 고마워.”

전생에서의 나는 어디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했다.

유년 시절에는 거리를 떠돌았고, 양녀로 들어간 스승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황제가 되어 황성에서 호화로운 삶도 누려 보았으나, 내 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새삼 이곳이 ‘나의 집’이라는 느낌이 충만해진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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