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34/156)

* * *

고용인 숙소에서 웃고 떠들다 보니 내일 파티 준비는 한참 미뤄져, 결국 그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 됐다.

아고트가 촛불을 들고 방 앞까지 따라왔다. 문 앞에서 아고트는 들뜸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가 기뻐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혹시 귀찮게 해 드린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아냐, 정말 기뻤어.”

“잠드실 때까지 곁에 있어 드릴까요?”

“응? 갑자기?”

“그냥……,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뭔가 아가씨를 이대로 혼자 방에 들여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우물쭈물하는 아고트를 얼른 돌려보낸 후, 나는 혼자 방에 들어왔다.

그러나 잠시 후, 아고트의 그 ‘예감’이라는 걸 신뢰하게 됐다.

“이제야 온 거야?”

“……카이사르?”

내 방 의자에 카이사르가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 아고트. 카이사르를 싫어하더니, 맹수의 감 같은 게 발동했던 건가. 예리한데.

“언제 온 거야?”

“몇 시간 전에. 레너드와는 인사했어. 넌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길래 기다렸지.”

카이사르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을 끌고 침대로 가 나를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곁에 앉는다.

“이 밤중에? 수도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스승님 생일인데 안 올 수야 없지.”

“너, 브란테 영애 생일 땐 안 갔잖아. 황후가 좋게 안 볼 텐데.”

“제자에게 그 정도 무마할 능력은 있습니다. 걱정 마시죠, 스승님.”

카이사르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 밤중에 뭐하러 날 기다렸어? 내일 파티에서 봐도 됐을 텐데.”

나로서는 기왕이면 카이사르가 푹 쉬는 쪽이 더 좋았다. 그가 황성에서 느낄 중압감을 잘 알고 있으니, 더더욱.

카이사르가 눈썹을 으쓱하며 웃었다.

“아니. 지금 만나는 게 중요해.”

“무슨 뜻이야?”

“좋아, 한번 맞춰 봐.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글쎄. 내 생일 전날?”

“자정은 이미 지났어, 헬레나.”

카이사르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쿵 가볍게 부딪치며 웃었다.

“오늘은 네 생일이야.”

눈동자를 움직여 위를 바라보니, 카이사르의 붉은 눈이 지척에 보였다. 호흡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카이사르가 내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헬레나 페레스카.”

그렇구나.

오늘은 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다.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어서 밤을 달려 네게 왔어. 어른이 된 걸 축하해, 헬레나. 널 기다렸어.”

어제의 밤과 오늘의 새벽이 다르지 않은데, 나는 어른의 경계선을 넘어왔다.

카이사르가 내민 손을 잡고 그 경계선을 훌쩍 넘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지금 귓가에 스미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일지도.

‘다들, 사람 참 약해지게 만든다니까.’

지키고 싶은 사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내가 점점 약해지는 게 아닐까 무섭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눠 본 적이 없어서, 마음을 나누고 나누다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겁이 난다.

하지만 이젠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겠지.

체념하듯 생각하며,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 *

헬레나 페레스카의 열여덟 번째 생일.

“축하드립니다, 공녀!”

홀에 모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박수와 환호를 보내왔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장 상석에 서 있던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와 주신 모든 가문에 축복과 평안이 가득하시기를.”

나의 인사말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뭐든 자기 가문 잘 되라는 소리 만큼 듣기 좋은 소리도 없는 법이지.

가문의 수장인 아버지의 축사와 인사말을 끝으로,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는 따로 마련된 상석에 앉아, 다가오는 이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다.

“절 기억하시나요, 공녀? 벌써 성인이 되시다니, 세월 참 빠르군요.”

“곧 수도에 가신다면서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우리.”

“오늘 모인 사람들 중 누구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우시네요.”

인사말도 어찌나 가지각색인지, 외우기도 힘들 정도였다. 나는 찾아온 이들의 얼굴과 가문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부르나이 백작. 발레르와 페레스카 사이를 저울질하더니, 이쪽으로 왔군.’

‘벤 변경후? 정치에서 발 뺀 구귀족이 여긴 무슨 의도로? 저런 조용한 거물급일수록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얼굴에는 ‘생일을 맞아 그저 기쁘고 행복한 열여덟 살 영애’의 표정을 띤 채, 머릿속은 불이 날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내 태도가 가식적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중에 순수하게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이가 얼마나 되겠어?

애초에 난 친구가 없다고.

“오늘 공녀의 자태가 백조와 같습니다.”

아, 아니구나.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한 명 있기는 하다.

나는 내 앞에 다가와 빙긋 미소 짓는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완전히 무장 해제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조? 우아하다는 의미야?”

나는 품위 있는 미소를 유지한 채,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카이사르 역시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속삭였다.

“물밑에서는 헤엄치느라 부산하고 바쁘다는 의미지.”

이 자식.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후우, 진정하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안 된다. 모두가 여길 주목하고 있다고.

“공녀의 생일은 제게도 참 기쁘고 즐거운 날이로군요.”

“어째서죠?”

“오늘은 공녀의 환한 미소만을 볼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아무리 놀려도 내가 평소처럼 화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약은 자식.

“그 생일이 1년에 한 번뿐이라니, 전하께는 아쉬운 일이겠네요.”

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카이사르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요. 저는 공녀의 모든 표정을 좋아하니까요.”

능구렁이 녀석.

“다시 한번 성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공녀.”

내 손끝에 정중히 입 맞춘 후, 카이사르는 자리에서 내려갔다.

나는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는 근처에 서 있던 레너드와 회포를 풀기 시작했고, 곧 주변에 몰려든 몇 명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만남이 정말 짧구나. 뭐, 어쩔 수 없지만.’

희미하게 실망감이 떠올랐다가 흩어지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내게 다시 다가오는 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며, 그 의문을 빠르게 지워 버렸다.

* * *

무료해.

파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나는 살짝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인사도 다 끝났고, 날 향한 사람들의 관심도 떨어졌고.’

이제 더 할 일도 없다.

자, 남은 파티를 즐기자! 라고 외치기에는 재미도 없고, 의욕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때처럼 슬쩍 빠지기에는, 이게 내 생일이란 말이지.’

주인공은 피곤하군.

‘카이사르랑 레너드는 뭐 하고 있지?’

나는 홀 안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레너드는 한쪽 자리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마 소공작위를 받은 레너드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귀족들이겠지.

‘흐음, 레너드 근처에 모여 쭈뼛대고 있는 저 영애들은 레너드를 노리고 있는 건가.’

몇 명의 영애가 레너드 근처에 모여서, 감히 끼어들지는 못하고 ‘언제쯤 대화가 끝나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좋은 때군, 좋을 때야.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번엔 카이사르를 찾아보았다.

아니, 찾아보려고 했다.

어떤 영식이 날 부른 탓에 실패했지만.

“공녀.”

카이사르를 찾아 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곁에서 들리는 굵직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곁에는 훤칠한 키에 눈썹이 굵은 영식이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음, 분명히……, 레너드의 동기인 루크 백작의 장자였지?

“조금 지치신 것 같군요.”

지친 게 아니라 지루한 거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식께서는 파티를 즐기고 계신가요?”

“덕분에요. 괜찮으시면, 저와 나가서 다음 곡을 춰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식이 홀 중앙을 흘끗 가리키며 웃었다.

조금 전부터 왈츠가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젊은 영식과 영애들이 수줍은 표정으로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실은 레너드를 통해 동생분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워낙 좋은 소리밖에 안 하는 통에,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더군요.”

영식이 사교성 좋은 얼굴을 하고선 그런 얘길 늘어놓았다.

뭐, 안 봐도 알 만하다. 우리 오라버니의 동생 사랑이야 동생 본인인 내가 보장하니까.

“그런데 오늘 실제로 뵈니, 세상에. 레너드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지 뭡니까.”

“후후, 숙녀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이 뭔지 잘 알고 계시네요.”

“지금 제 말이 입에 발린 칭찬이라 여기시는 거라면, 전 좀 슬플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영식이 날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헬레나, 정신 차려. 표정 무너지면 안 돼. 오글거려도 참아야 해.

“이런 제게, 성인이 된 공녀의 첫 번째 춤 상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꽤 저돌적이군.

레너드의 친구라면 매정하게 굴 필요 없겠지. 오라버니의 원만한 교우 관계도 생각하는 나란 동생, 정말 대단하다. 크으.

“제 서툰 춤에 영식의 발을 밟기라도 하면 어쩌죠?”

“깃털처럼 가벼우시니, 그래 봤자 티도 안 날 텐데요.”

저런. 세상에 깃털처럼 가벼운 성인 여성은 없단다, 얘야.

나는 영식이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얹으려 했다.

그러나 내 손을 잡은 건 영식이 아닌 카이사르의 손이었다. 응?

어디에서 뭘 하는지 한참 찾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헉, 전하.”

영식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카이사르가 영식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실로 살벌한 미소였다.

“실례. 공녀의 첫 번째 춤은 나로 미리 약속되어 있어서.”

언제부터?

“이런, 제가 미처 몰라서……, 시, 실례했습니다. 그럼 전 이만.”

영식이 화들짝 놀라더니 총총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야, 패기가 부족하군. 좀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갔어야지, 레너드의 친구!

“한눈도 못 팔겠어, 헬레나.”

카이사르가 멀어져 가는 영식을 향해 끝까지 시선을 보내며 내게 말했다.

나 역시, 멀어져 가는 영식을 시선으로 쫓으며 카이사르의 말에 대답했다.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전하?”

“헬레나의 전하는 바쁜 와중에도 계속 헬레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만.”

“거짓말도 참.”

“정말인데? 헬레나가 날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것도 다 봤어.”

큭. 뭐지, 이 약점 잡힌 것 같은 기분은?

카이사르의 득의양양한 미소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헬레나의 첫 번째 춤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뺏길 것 같아?”

“자신만만하시네요.”

“이 정도 패기도 없이, 헬레나의 첫 번째 춤을 어떻게 차지하겠어?”

카이사르가 내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 당당함이 어처구니없어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러니, 스승님. 부디 저와 함께 춤을.”

그래, 추지 뭐.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자 이거잖아. 앞으로 황후가, 발레르가, 브란테가 상대해야 하는 게 어떤 사람인지.

나는 카이사르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툰 춤 실력이라 제가 전하의 발을 밟기라도 하면 어쩌죠?”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도발하듯 웃었다. 카이사르가 내 허리를 감싸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됐네. 헬레나가 춤에 능숙해질 때까지 계속 춤출 수 있는 핑계가 될 테니까.”

예상치 못한 그 답변에, 결국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