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35/156)

* * *

춤의 장점은,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새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악과 움직임에 묻혀 다른 이에겐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몸을 밀착한 상태라 속삭임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니까.

“다들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헬레나?”

그걸 십분 활용하겠다는 듯, 카이사르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조용하고 나긋한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뒷덜미가 간지러웠다.

“날 귀찮은 일의 한복판에 끌고 가는 게 네 특기지?”

“귀찮은 줄 알면서도 따라와 주는 것이 하늘 같은 스승님의 은혜고 말이지.”

“그걸 영악하게 잘 이용하는 것이 내 제자의 못된 버릇이고.”

“삶의 지혜야.”

농담을 주고받다가 우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헬레나, 춤 정말 잘 추네. 언제 배운 거야?”

“옛날에. 아주 옛날에, 친구에게서.”

“친구? 친구 누구?”

“있어. 생긴 건 너랑 닮았는데, 성격은 전혀 다른 친구가.”

내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춤에 재능이 없었다.

그런 나를 끈질기게 가르쳐 준 게 에레즈다. 수없이 발이 밟히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면서.

모두 나와의 춤을 꺼릴 때,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와 춤을 춰 준 것 역시 그였다.

그가 나의 첫 번째 춤 선생님이었고, 파트너였다.

‘카이사르가 에레즈와 닮아서 그런가.’

그리고 지금, 에레즈를 빼닮은 그의 후손은 내 두 번째 인생의 춤을 함께 춰 주고 있다. 참 얄궂고도 재미있는 인연 아닌가.

이래저래 그레이와는 인연이 깊구나, 나는.

“……앗!”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탓일까, 그만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몸이 휘청하고 기울어져, 정신이 번쩍 났다.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하려 했지만, 드레스가 워낙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 순간, 아래로 기울어져 가던 시야가 갑자기 높아졌다.

“……?”

카이사르가 내 허리를 잡고 날 번쩍 안아 든 것이다.

카이사르는 날 안아 든 채 홀 가운데를 빙그르르 돌아 다시 나를 착 하고 내려 주었다.

여기저기서 우릴 향해 ‘오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다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동작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어리둥절한 건 나 혼자의 몫이 됐다.

“차라리 발을 밟지그래? 넘어지는 것보다 안전하잖아.”

카이사르가 날 끌어당겨 꽉 안으며 키득거렸다.

“……방금 건 엄청나게 소문이 돌겠군.”

사교계에서 영애들이 엄청나게 입방아를 찧겠구나.

“그래서, 싫어?”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는 그 강렬한 색채가 무색하리만치 순진해 보였다. 이 녀석의 이런 눈빛은 나만 알고 있는 거겠지.

하아.

역시 넌 영악해.

“마음대로 떠들어 보라지.”

고갤 흔들어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기며 내가 웃었다. 머리카락을 장식한 장신구가 서로 맞부딪치며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파티가 파한 후, 북적대던 홀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침실의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서, 마차를 타고 떠나는 카이사르를 지켜보았다.

그는 레너드와 인사를 나누고 가벼이 포옹한 후 마차에 올랐다. 어떤 얘길 나눴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어쩐지 오늘 홀에서 그와 춤 추었던 일이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처럼 아쉬워졌다.

‘허전하네.’

나는 텅 빈 내 침대를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이제 그의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아고트가 잠자리를 봐 주려 방에 들어왔다.

“아가씨, 오늘 많이 피곤하셨죠?”

“응, 그렇지.”

“푹 쉬시라고 수면에 도움이 되는 향로를 가져왔어요.”

아고트가 협탁에 향로를 올려놓은 후, 베개를 툭툭 두드려 돋우기 시작했다.

아고트가 정리를 끝낸 후,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머리맡에 놓인 향로에서 풍기는 꽃 냄새가 기분 좋았다.

“오늘부터 어른이라는데, 별로 그런 기분이 안 드네.”

“아가씨야 워낙 어른스러운 분이시라 그럴 거예요.”

“어릴 때는 좀 더 막 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가씨다운 소원이셨네요.”

“지금부터라도 내 마음대로 살 거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전 언제나 아가씨 편이에요.”

“응, 그렇지. 넌 내 거지.”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못 살겠지. 망가져 버리면 가슴 아파할 게 너무 많이 생겨 버렸어.”

전생의 나는 지킬 것이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도 없었다. 쉽게 떠날 수 있었고, 접을 수 있었고, 잊을 수 있었다.

후회가 없다는 것.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것.

결국 그 본질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애한테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니었는데.”

눈을 감은 채,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지금 느끼는 이 후회는, 그만큼 그가 내 미련이 되고 두려움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인 것일까.

‘역시, 모르겠네.’

어른의 삶은 늘 명쾌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아, 그렇구나. 어른이 되긴 되었구나. 그런 깨달음에, 나는 다시 실소했다.

* * *

이듬해 가을, 수도행이 최종 결정됐다.

공작저를 떠나던 날, 온 식솔이 저택 밖에 나와 나를 배웅했다.

“아가씨, 건강 꼭 챙기세요. 편식하지 마시고요. 수상쩍은 모임엔 절대 나가지 마세요.”

“알았어, 알았어. 벌써 다섯 번째 알았다고 대답했잖아, 마사.”

“아고트, 거기 가거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가씨를 모셔야 한다, 알겠지?”

“걱정 마세요! 목숨을 다해 모실 테니까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빠뜨린 건 없니, 헬레나?”

“네, 어머니.”

“너까지 본저를 비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허전하구나.”

“자주 올게요.”

“혹시 마음에 드는 영식이 나타나면 언제든 이 엄마에게 말해 줘야 한다?”

“알겠어요.”

그러나 어머니.

레너드와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고 자란 당신의 딸은, 어지간한 외모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답니다.

“자, 늦겠다. 이제 어서 출발해야지.”

“네. 그럼 가 볼게요.”

나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오랫동안 포옹한 후에 마차에 올랐다.

공작저를 빠져나간 후부터 마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해, 차창 밖의 풍경이 빠르게 변해 갔다.

처음 떠나는 길도 아니건만,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뭐가 말씀이세요?”

내 혼잣말에 아고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해. 불안해할 일은 하나도 없는데.”

“집을 떠나는 게 슬퍼서 그러신가 봐요.”

“그런가…….”

떠돌이처럼 살았던 전생의 나로서는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이다.

“기다려 주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건, 분명 그런 기분일 거예요.”

아고트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어쩐지 기특하게 느껴져, 나는 짧게 웃으며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라.’

그것은 아마도, 모든 걸 다 가지고 누린 단테 레나투스가 가져 보지 못한 것.

“헬레나 페레스카는 복 받은 사람이네.”

“그런 얘기를 왜 그렇게 남 얘기 하듯 하셔요? 아가씨도, 참.”

아고트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여서, 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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