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36/156)

* * *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헬레나 아가씨.”

별저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별저 관리인이자 집사인 케고르가 정문까지 나와 나를 맞아 주었다. 대기 중이던 식솔들이 부지런히 마차에서 내 짐을 옮겼다.

나는 장갑과 모자, 망토를 벗어 아고트에게 맡기며 케고르와 짧게 인사했다.

“새삼 왜 내외하고 그러세요?”

“이제는 잠시 머물다 가시는 게 아닌, 이 저택의 주인님으로 오시는 거니까요.”

이번 대에서는 아마도 내가 처음일 거다.

아버지도 수도에 일이 있을 때만 머물다 가곤 하셨으니까. 애초에 그런 목적의 저택이었고 말이다.

즉, 이 별저의 주도권은 이제 내 손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귀찮으니까, 그런 건 케고르에게 다 맡기도록 하자.

“바뀌는 건 없을 거예요. 관리는 모두 케고르에게 일임할게요. 저에겐 약식 보고만 해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식단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맡길게요.”

내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기니, 케고르가 나와 속도를 맞춰 따라붙었다.

“참, 검 훈련을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제대로 만들어 두고 싶은데요.”

“이미 가든 하우스를 개조해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그쪽을 유심히 봐 두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마음에 드는군요.”

“침실은 늘 쓰시던 곳으로, 커튼과 시트를 새로 바꾸었습니다.”

“사교 모임을 가질 만한 공간은 충분한가요?”

“본저에 비하면 작지만, 복층 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거긴 나중에 천천히 둘러보도록 하죠.”

“고용인들 소개는 어찌할까요?”

“그것도 나중에 천천히. 아, 참. 무기 가방은 따로 정리해야 할 텐데. 아고트, 네가 가서……, 아고트?”

“헛, 네!”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던 아고트가, 내 부름에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왜 그래? 피곤한 거야?”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고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아, 아가씨랑 집사님이랑 척척 대화를 나누는 게 멋있어서 넋 놓고 보다 보니…….”

……으음.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요 귀여운 시종 녀석.

“보셨나요? 제 자존감을 높여 주는 아주 착한 시종이랍니다.”

“그렇군요. 저희 별저의 고용인도 아가씨의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와 케고르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아고트는 온몸이 달아올라서는 다람쥐처럼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후후, 귀엽기는.

“뭐……, 급히 보고할 게 없으면 오늘은 이쯤 하죠? 좀 피곤하기도 하고.”

내가 웃으며 말했더니, 케고르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뭔가 있나요?”

“두 가지요.”

“뭐죠?”

“첫 번째는, 돌아오는 주말에 레너드 도련님께서 별저에 방문하겠다 하셨습니다.”

“아하.”

나는 긍정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일은 없다. 내가 오늘 별저에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안부 겸 오겠다는 거겠지.

“두 번째는요?”

“같은 날, 황태자 전하께서도 방문하시겠다고.”

“아하…….”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고 표했는데, 케고르가 내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똑같은 ‘아하’인데 느낌이 다르군요.”

“카이사르는 귀찮은 일을 같이 가져올 확률이 높아서 말이죠.”

“그런 게 싫으시면 거절하시면 될 텐데요. 어떻게 할까요?”

그게 참,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귀찮은 건 맞는데 싫지는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약간, 안심했나?’

당연히 그 녀석도 오겠지 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멋대로 확신하고 있었던 걸까.

“제자의 방문을 스승이 거절할 수는 없죠.”

결국 애매한 대답을 남긴 채, 케고르의 다음 질문에서 도망치듯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 * *

주말이 되어, 예고한 대로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차례로 저택을 찾아왔다. 어쩌다 보니 아고트를 포함해 한 방에 네 명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앉은 모양새가 됐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네.”

레너드가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옛날 생각 난다. 셋이 모이면 카드놀이 같은 거 자주 했잖아.”

“유감이지만, 레너드. 우린 카드놀이나 하기엔 이제 너무 어른이 되어 버렸어.”

카이사르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과장되게 심각한 말투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어른은 그럼 뭘 하고 놀아야 해?”

“이거지, 이거.”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카이사르가 가지고 온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와, 이거 뭐야.

“……술, 이잖아요?!”

아고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고트의 말대로, 술이다. 그것도 와인이 아닌 증류주였다.

“헬레나도 이제 성인이잖아. 술 정도는 마셔 줘야지. 아, 참. 네 녀석은 아직 생일 안 지났지? 넌 주스라도 마시는 게 어때?”

카이사르가 히죽 웃으며 아고트에게 비아냥거렸다.

“수, 술 정도는 저도 마실 수 있거든요!”

“어허, 어른들 노는데 어린애가 끼어서야 쓰나.”

“그런데 전하, 정말 괜찮을까요? 이거 엄청 독해 보이는데…….”

“집에서 마시는 건데 뭐 어때.”

카이사르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몇 번 마셔 본 모양이었다.

반면 레너드는 ‘흑역사를 하나 더 만들 것 같은데’ 하는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자, 뭐 해? 어서 따라 봐.”

흥분했다.

용병단에 있던 시절에는 거의 매일 밤 동료들과 술을 마시곤 했다. 전생에서의 난 술이 센 편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환생한 후로는 술을 입에 대 보지도 못했으니, 어찌 아니 흥분할 수 있겠는가. 자, 제자여. 어서 내 잔 가득 생명수를 따라 보아라.

“오, 역시 헬레나. 자신만만하군.”

카이사르가 반색하며 내 잔에 술을 채웠다. 이내 방 안에 진한 알코올 향기가 돌았다.

레너드와 카이사르의 잔도 이어서 채워지고, 아고트의 잔에도 과일 주스가 따라진 후, 우리는 약속한 듯 잔을 들었다.

“자, 그러면 헬레나의 수도 입성을 축하하며.”

그게 축하해야 할 일인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네 사람은 잔을 높이 들어 부딪쳤다.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게 됐구나.’

이걸로 내 인생의 무료함이 조금은 달래지지 않을까.

그렇게 확신하며 나는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송곳 같은 액체가 혈액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그리고 잔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몸은 전생의 몸과는 다르다는 것을.

“헬레나!”

“스승님!”

“아가씨!”

증류주 반 잔.

나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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