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37/156)

* * *

단테는 술에 강한 사람이었지만, 헬레나는 아니었나 보다.

전생의 나는 처음 술을 마셨을 때 어땠더라? 이렇게까지 빨리 취했나?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괜찮아?”

머릿속에 벌레가 들어간 것처럼 웅웅댔다. 눈앞이 마구 돌고 가슴이 뜨거웠다.

나는 간신히 실눈을 뜨고,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날 향한 자상한 눈빛에 경계심이 절로 풀어진다.

나는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에레즈 공, 왜 옆으로 서 있는 건가.”

나는 가로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질문했다. 혀가 둔해서 발음이 이상하게 뭉개졌다.

내 말에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서 있지 않아. 앉아 있어.”

“뭐라?”

“넌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고 말이야.”

응? 무슨 소리지?

“그리고 묻겠는데, 에레즈가 대체 어느 집 개뼈다귀지?”

“……우으아아아아악!”

지금이 전생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닫기까지, 약 5초.

나는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난 즉시 도로 누워야 했다. 머리가 핑 하고 돌며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아으윽, 머리야……!”

“갑자기 일어나니까 그렇지. 눈 감고 있어. 레너드랑 아고트가 얼음이랑 담요 가져온댔으니까.”

“어으……, 죽겠어……!”

“그래, 미안해. 설마 이렇게까지 술에 약할 줄은 몰랐지.”

카이사르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들이켠 너도 문제가 있어. 처음에는 일단 맛부터 보지 않아?”

“오랜만의 술이라 나도 모르게…….”

“오랜만?”

“응? 내가 오랜만이라고 했어? 왜 그런 말을 했지?”

“역시 취했구나, 너.”

카이사르가 큰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며 말했다. 다행히 내 말을 취기에 내뱉은 헛소리로 넘길 모양인가 보다.

“……카이사르, 손 차가워서 좋아.”

어둠 속에서 내가 중얼거렸다. 카이사르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손의 떨림으로 전해져 왔다.

“그나저나, 에레즈는 누구야?”

자기 조상 이름도 모르냐, 바보야.

하긴, 자기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동명의 다른 남자라고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한가.

“그……, 책에서 나온 주인공 이름이야.”

“가상의 인물에게까지 지분을 뺏겼군. 불쾌한데.”

네 조상과 너무 닮은 네 탓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댔다.

‘그나저나 카이사르의 손……, 정말 시원하고 좋네.’

열기가 조금 가시니, 차분하게 지금 상황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이걸로 흑역사 하나 또 추가군. 정말 싫다.’

앞으로 사교 모임에 가서도 되도록 술은 마시지 말아야겠다.

시간이 흘러 두통이 좀 가시자, 나는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카이사르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반짝 눈을 떠 보니, 카이사르가 여전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사르가 빙긋 웃었다.

“왜?”

“……넌 진짜 잘생기긴 했구나.”

내가 흐물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취하니 별말이 다 튀어나오는군.

그렇지만 솔직한 감상이기는 하다.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이 녀석, 성격은 개차반이어도 얼굴 하나는 괜찮다고.

“축복받은 줄 알아라, 이 자식아.”

“품위 있는 공녀께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대체.”

카이사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에 어쩐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잘생긴 놈.”

“헬레나는 주정이 남 칭찬이야?”

“알 게 뭐야. 머리 아파.”

“눈 감고 있으라니까.”

카이사르가 다시 내 눈을 가리려 하기에, 내가 손으로 막았다.

“싫어. 계속 볼래.”

계속 보고 싶다.

이유? 잘생겼으니까. 잘 만들어진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난 원래 전생부터 잘생긴 얼굴에 약했다고. 검사 학교를 왜 기웃거렸던 건데.

그래, 확실하게 말해 두자면.

“나는 좋아해.”

“……응?”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왜인지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네 얼굴.”

“……푸핫.”

카이사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웃어? 내 취향이 웃겨?”

“아니, 아니야. 으음. 그렇군. 스승님은 내 얼굴을, 그래. 뭐랬지?”

“좋아한다고.”

“뭐라고? 다시 한 번만.”

“좋아한다니까? 실은 전부터 쭉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하. 헬레나.”

“응?”

“나도 좋아해.”

카이사르가 옅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어.

술기운 때문인가. 왜 갑자기 더워지는 것 같지?

“내 얼굴이? 네 얼굴이?”

“헬레나.”

“응?”

“얼른 눈이나 감아.”

카이사르가 큰 손으로 다시 내 얼굴을 가렸다. 이번엔 나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귓가가 윙윙거렸다.

알코올이 이렇게 안 좋아. 다시는 술 같은 건 마시지 않을 거야.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내 얼굴이? 네 얼굴이?

‘……누가?’

머릿속이 여전히 빙글빙글 돈다.

레너드와 아고트가 되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고요한 침묵 중에도, 내 마음은 깊은 토끼 굴 속으로 빙글빙글 떨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아.

이 모든 게 술 때문이려니.

S2. 카이사르 W. 그레이의 연애 상담

“요즘 들어 해밀턴이 안 보이는데 말이야.”

어느 여름, 턱을 괴고 앉아 서류를 확인하던 황태자 카이사르가 문득 생각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책상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던 로위나가, 인형 같은 열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마 미로 정원에 계실 겁니다. 모셔 올까요?”

“미로 정원? 거긴 왜? 정원사로 다시 취직했어?”

카이사르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갈론 백작과 만나고 계실 겁니다.”

갈론 백작은 해밀턴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작도 미혼이었던가.

“설마 갈론 백작과 연애 중이야?”

“아마도요.”

“난 지금 헬레나를 만나러 갈 수는 있는 건가 하는 판인데, 자기는 연애를 하고 있어?”

작년 여름에도 간신히 짬을 내 공작저에 갈 수 있었다. 올해는 일이 잔뜩 밀려서 어찌 될지 모를 판이라, 그러잖아도 약이 잔뜩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보좌관이라는 사람이 저 혼자 연애를 하고 있어? 진짜?

“괘씸하군. 나도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데, 저 혼자 장가갈 궁리를 한단 말이지…….”

까득. 카이사르가 펜대 끝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카이사르를 이토록 애태우고 있는 스승님으로 말하자면, 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살기나 투기는 귀신같이 잡아내면서, 연애 세포 쪽은 사망했다.

이쪽에서 아무리 티를 내고 치근덕대도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제자야’ 하는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 눈빛을 마주하면, 이번 생에는 무슨 짓을 해도 가망이 없는 건가 싶은 절망이 밀려왔다.

“설마 아직 손도 못 잡아 보신 건가요?”

“설마. 손도 잡았고, 포옹도 했고, 한 침대에서 잠도 잤어.”

어릴 때의 얘기지만. 물론 그 말은 내뱉지 않았다.

심지어는 키스도 했다.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헬레나이니, 자신과의 키스는 분명 첫 키스일 것이다.

문제는 그걸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장단 맞춰 준 것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는 거다.

키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연애 한 번 안 해 봤을 애가 그런 면은 또 왜 그렇게까지 개방적인 거야?

“공녀의 무심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럭저럭 잘 진행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 모든 걸 하고도 날 남자로 보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말인가?”

“……가망 없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시는 것이 덜 상처받는 지름길…….”

“가망 없다고 말하지 마.”

카이사르가 울컥해서 말을 잘랐다.

“좀 더 농밀한 신체 접촉을 시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허벅지는 내줘 봤는데.”

“허벅지……, 의외로 참 많은 걸 이미 내주셨군요.”

로위나가 ‘으으음’ 하고 신음했다.

대체 뭐 어떤 상황이면 다 큰 숙녀가 성인 남자의 허벅지를 만질 일이 생기는 거지.

“미치겠군. 난 헬레나가 원하기만 하면 뭐든 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헬레나가 무욕의 화신이라는 게 문제야.”

“참 어려운 사랑 하시는군요.”

“대체 뭘 더 내줘야 날 남자로 봐 줄까? 로위나는 남자가 뭘 주면 두근거리겠어?”

“돈이요.”

“됐어. 물어야 할 사람을 잘못 택했군.”

카이사르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로위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누구에게 물어도 소용없지 않을까요? 공녀께서 뭘 좋아하시는지가 중요하죠.”

“헬레나 말이지. 헬레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좋아해.”

카이사르의 대답에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만에야 로위나는 어렵게 대답을 찾은 듯 입을 열었다.

“가망이 없는 관계는 빨리…….”

“아니라고.”

카이사르가 질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슬그머니 의문이 떠오른 건 사실이다. 정말 가망이 있긴 한 건가?

“하아……, 헬레나가 보고 싶어.”

헬레나 얘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카이사르는 책상 위에 팍 엎드렸다.

이 다 큰 남자는 자기 사람 앞에서 하는 행동과 타인 앞에서 하는 행동이 너무 다르다.

카이사르를 ‘잿빛 늑대’라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꼴을 봐야 하는데.

로위나는 티 나지 않게 혀를 찼다.

“정 불안하시면, 상담이라도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상담? 무슨 상담?”

“연애 상담이요. 마침 친구의 남편의 사돈의 팔촌의 아들이 흑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관계가 왜 그래? 그 정도면 그냥 남 아닌가?”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에는 ‘마성의 흑장미’라고 불리며 여자들에게 한 인기 하던 자이죠.”

“점점 더 수상쩍군.”

그게 뭐야. 바람둥이?

카이사르가 오만상을 찡그렸다. 자신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지고 싶은 게 아니다. 헬레나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이지.

그러나 로위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고로 저 역시 그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좀 두근거렸습니다.”

“……그건 좀 솔깃하군.”

카이사르의 눈빛이 비로소 빛났다.

천하의 로위나가 첫눈에 흔들릴 정도라면, 여자의 마음에 대해 잘 아는 자일지도 모른다.

그 비결을 배우면, 헬레나의 마음을 흔드는 데 도움이 될지도.

“좋아. 빠른 시일 내에 자리 한번 잡아 줘. 이번 여름에 내려가기 전에 비법이라도 들어 보게.”

“대신 맡은 일은 다 끝내고 내려가셔야 합니다.”

“약속하지.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 놓겠어.”

그녀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늑대 조련사’라는 말을 듣고 있는 로위나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