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쉬 가론은 큰 키에 인상도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검은색 흑기사단 제복이 그림처럼 어울려서, 카이사르는 로위나가 첫눈에 혹했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했다.
“여성에게 마음을 얻는 비결 말이지요.”
이미 로위나를 통해 전후 사정을 들은 에쉬가, 꽃향기가 날릴 것 같은 미소를 흩뿌리며 설명했다.
“간단합니다, 전하.”
“그게 뭐지?”
“잘생기면 됩니다.”
그 대답에 카이사르는 크게 놀라고 감탄했다. 세상에, 이렇게 도움이 안 될 줄이야.
“내가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 듣자고 자네를 만나고 있는 것 같나?”
“하지만 첫 만남에서 사람 마음 휘어잡는 데 잘생긴 얼굴만 한 무기는 없습니다, 전하.”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미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게 도무지 이성적인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말이야.”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혹 브란테 영애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페레스카 공녀에 대한……?”
에쉬의 섣부른 호기심에, 카이사르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살기가 돌았다.
“실례되는 줄 알면서 묻는 건, 그대의 목숨이 여러 개라서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에쉬가 깨갱, 하고 금세 꼬리를 내렸다. 괜한 호기심에 목이 달아날 뻔했다.
“으음, 그렇군요. 관계의 진전 말이지요. 그렇다면 만고불변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뭐지?”
“돈이죠.”
“……자네가 로위나 에버그린과 아는 사이라는 게 실감 나는군.”
카이사르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좀 더 실전에서 써먹을 만한 비법은 없나?”
“보다 구체적인 걸 원하시는 거로군요. 흐음. 그런 게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오호.”
에쉬의 진지한 표정에 카이사르가 목을 조금 움츠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열이면 아홉은 이 비법에 뿅 하고 넘어가지요. 그런데 이것이 귀족들이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비법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지.”
방에는 두 사람뿐이건만, 에쉬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얘기하듯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한 손을 깔때기 모양으로 입 옆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혹시 ‘벽 치기’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 * *
벽 치기.
그것은 강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듬직함과 카리스마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보여 줄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술.
‘내려다본다’는 점에서 어른스러움을 강조할 수 있는, 카이사르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비기.
더구나 열에 아홉은 자연스럽게 입맞춤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밑져야 본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카이사르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여름, 공작저.
다른 때보다 좀 늦은 시기이지만, 카이사르는 간신히 맡은 일을 마치고 공작저에 내려올 수 있었다.
헬레나의 혹독한 검술 수업이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카이사르의 온 신경은 ‘벽 치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간도, 장소도, 분위기도 최적이어야만 해.’
검 수업 후 땀범벅인 상태로는 할 수 없다. 시종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장소도 불가능하다. 특히 레너드나 아고트에게 들키면 아주 곤란해진다.
그렇다고 너무 여유롭게 구는 것도 안 된다. 수도에서 갑자기 일이 터져 호출이 오면 당장 되돌아가야 하니까.
신중하고 치밀하게. 날렵하고 기민하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헬레나의 목소리에, 카이사르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늦은 밤. 헬레나를 침실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복도를 나란히 걷던 중이었다.
좀처럼 말이 없는 카이사르의 굳은 표정에, 결국 헬레나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요즘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어?”
“아니?”
“하지만 대련 때도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고, 내내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헬레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카이사르는 기쁘면서도 괴로움 심정이었다.
이런 건 이렇게 눈치 빠른데, 왜 남자의 마음은 눈치를 못 챌까.
‘안달 난 내가 바보 같군.’
자조가 나올 정도다.
“……앗.”
그때, 헬레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그래?”
“아, 눈에 티끌이 들어갔나 봐.”
“뭐? 한번 봐 봐.”
헬레나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새 눈을 비벼 눈초리가 빨갰다. 카이사르가 몇 번 바람을 불어 주었다.
“어때?”
“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훌쩍. 헬레나가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세상에 무서울 거 하나 없을 것 같은 스승님이건만, 눈에 들어간 티끌 앞에서는 울기도 하는구나.
카이사르는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그저 웃었다.
……엇. 그나저나.
고요한 밤. 아무도 없는 복도. 밀착해서 선 두 사람.
지금이 딱 타이밍 아닌가?
꿀꺽. 카이사르는 침을 삼켰다.
“헬레나.”
“응? 왜……, 우왓.”
탁.
카이사르가 헬레나를 벽에 몰아넣고,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벽에 기대어 선 헬레나가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카이사르를 올려다봤다. 흡사 여우의 꼬임에 넘어가 궁지에 몰린 토끼 같았다.
그러나 조심하라. 이 토끼는 육식성이므로, 잘못하면 물린다.
‘그윽한 눈빛.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잠깐, 그런데 그윽한 눈빛이 뭐지.’
심장은 쿵쾅거리고, 눈앞이 하얘진다. 막상 실전에 돌입하니,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당혹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겉으로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한 채, 그 큰 키로 자신의 품에 갇힌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카이사르. 좁아.”
카이사르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헬레나는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일 뿐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이사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일까.
누굴 상대하든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으로 행동하는 건 이제 자다가 일어나서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인데.
헬레나 페레스카에게만은, 아직도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카이사르가 헬레나에게 조금 더 다가가 자리를 좁혔다. 헬레나는 영문은 모르겠고 그저 좁아서 불편하다는 얼굴이다.
‘이다음은 자연스러운 스킨십. 턱을 살며시 잡고, 상대가 눈을 감으면 천천히 키스한다.’
에쉬가 가르쳐 준 순서를 외면서,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헬레나의 턱을 살며시 쥐었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헬레나의 분노를 자극하는 행동일 줄은.
“……안 놔?”
“……응?”
“지금 감히 강제로 내 고개를 치켜드는 거야?”
헬레나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흉흉한 살기에 카이사르는 절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다.
헬레나는 턱이 잡히는 자세에 그리 좋은 추억이 없었다. 부랑아 시절, 자신의 턱을 잡고 흔들거나 비아냥대던 이들이 종종 이었으니까.
자신보다 훨씬 큰 카이사르의 손길은, 그런 경험이 뼈에 새겨진 헬레나에겐 로맨스라기보다는 협박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건 그런 의미가……. 대체 이 분위기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어, 헬레나?”
얼빠진 카이사르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 답에, 헬레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팔을 들어 카이사르의 가슴을 힘껏 쳐 밀었다.
“커헉!”
카이사르의 몸이 휘청하며 물러났다. 그 틈에, 헬레나가 재빨리 위치를 바꿔 카이사르를 벽에 떠밀었다. 턱 하고 등 뒤에 벽이 부딪쳐, 카이사르가 움찔했다.
쿵.
그 상태로, 헬레나가 카이사르를 벽 사이에 두고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하고 싶은 게 이런 거야?”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턱을 잡고 올리며 씨익 웃었다. 헬레나의 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살벌하게 빛났다.
아니 이게 뭐람.
올려다보는 시선이 이렇게 박력 넘칠 수도 있나?
“또 이런 장난 치면 진짜 화낸다?”
“……잘못했습니다.”
사과하자. 왜 사과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이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쳐다보니, 사과해야지.
‘망했어!’
성공률이 열에 아홉이라더니, 헬레나가 남은 하나였을 줄이야.
헬레나에게 ‘보통’을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만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헬레나 턱은 잡지 말자’ 하고 헬레나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는 카이사르였다.
* * *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어설픈 연기 안 하고 그냥 때가 되기를 기다리려고.”
황성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카이사르는 넋이 빠진 얼굴로 로위나에게 그날 일을 보고했다.
해밀턴이 아닌 로위나에게 얘기하는 건, 그녀는 이런 얘기를 듣고 표정으로 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물론 말로는 한다.
“하긴, 내가 성급했지. 헬레나의 마음도 아직 확실히 모르면서.”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왜 그리 초조해하셨던 건가요?”
“글쎄, 왜일까.”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쥔 채 생각했다.
만사에 무기력하고 관심 없는 헬레나가 언젠가 자신도 시시해졌다며 버리진 않을까, 그게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문득 떠오르는 두려움은, 아주 가느다란 바늘이 되어 심장을 관통한다. 그 틈으로 매일 조금씩 외로움이 새어 나온다.
“그렇게 초조하시면, 차라리 황태자비가 되라 명하시는 게 빠르겠네요. 브란테 영애도 차단하고 좋지 않나요.”
“마음은 없는 채로?”
“일단 혼약하시고 천천히 마음을 얻으시면 되죠. 일의 성사에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셨던가요?”
“그래. 헬레나는 소중하게 여기고 싶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 덧없는 마음이 결국 닿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은 끊임없이 그녀의 곁을 맴돌게 되겠지.
“하핫, 황제가 되는 게 더 쉽겠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말한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카이사르는 큰 소리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