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의 검은 권능을 입을지니 (1)
“참, 아고트. 오늘 오후엔 황성에 갈 거니까, 수업 끝나면 준비해.”
“황성에요?”
대련 중 내뱉은 나의 말에, 아고트의 검 끝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재빠르게 공격에 들어갔다. 아고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간신히 내 공격을 튕겨 냈다.
한눈팔고 있던 것 치고는 꽤 빠른 대응이다. 확실히 레너드나 카이사르에 비해 아고트의 검은 대응이 빠르고 가볍다.
“베시가 아닌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베시는 메이드장에게 인계받을 일이 아직 다 안 끝났대.”
“그렇지만, 엇, 저는 황실의 법도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걸요.”
아고트가 내 쪽을 노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두 개의 검이 나팔꽃 넝쿨처럼 얽혀 들었다.
“새삼 그런 걸 걱정해? 카이사르랑은 그렇게 으르렁대면서.”
“그분은 아가씨를 독점하려는 시커먼 속내가 다 보여요!”
“저런. 날 원하는 이는 카이사르 말고도 많단다, 아고트.”
유능한 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고트는 여전히 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황제는 부인을 여럿 두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아가씨를 뺏길 순 없어요!”
“……푸핫!”
“앗, 빈틈!”
이번엔 당황한 내 검 끝이 흔들렸다. 아고트가 예리하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그 공격을 피하며 아고트의 검을 쳐 냈다.
아고트, 제법인데? 상대방의 정신을 교란할 줄도 알고. 와, 진짜 당황했잖아.
“공격 실패했다고 머뭇거리지 말랬지?”
“꺄앗!”
내 검이 아고트의 검을 강하게 쳐 냈다. 아고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캉 캉. 카앙.
나는 연속으로 검을 몰아쳐 아고트를 점점 뒤로 밀리게 하며 말을 이었다.
“봐, 한 번 자세가 흐트러지면 다시 틈을 노리기 어려워진다고.”
“꺄악, 잠깐! 잠깐만요!”
“자, 어떻게 빠져나갈래?”
내 질문에 당황하던 아고트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아고트가 순간 집중력을 발휘해 내 공격을 옆으로 흘렸다. 훅, 하고 내 검이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그 틈을 노려, 아고트가 바닥을 빙그르르 굴러 거리를 벌린 후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났다.
“하아, 하아.”
아고트가 식은땀이 난 얼굴을 하고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 제법이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잔소리를 안 할 수는 없지만.
“넌 빈틈이 보이면 실패할 때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달려드는 습관이 있어. 그러니까 실패 후에 간격이 생기는 거야.”
“네……, 명심할게요.”
“궁지에 몰렸다고 ‘잠깐’을 외쳐 봐야 진짜 기다려 주는 적은 없다는 거, 알지? 네가 당황했다는 것만 가르쳐 주는 꼴이야.”
“크윽, 네에…….”
“하지만 나중에라도 정신 차리고 거리를 벌린 판단은 잘했어.”
내 칭찬에 시무룩해하던 아고트의 얼굴이 다시 활짝 개었다.
하여튼 단순하기는. 하긴, 그런 성격 덕분에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는 걸 테지만.
‘근성만은 셋 중 최고라니까.’
나는 애틋한 기분으로 피식 웃으며 검을 내렸다.
“오늘은 이쯤 하자. 오후에 나갈 준비도 해야 하니까.”
“네! 감사했습니다!”
아고트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 * *
황성에 들어서니, 성내 시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익숙한 복도를 걸어 접견실로 향했다.
황성은 변한 듯 변한 게 없는 느낌이라 묘한 향수를 자극했다. 카펫이나, 조각상의 위치나,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종류가 바뀐 정도다.
아마 비밀 통로 같은 것도 그대로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접견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미리 약속되어 있던 해밀턴이었다. 소파 옆에 선 로위나 역시 내게 허리를 숙여 말없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작님. 지난번엔 고마웠어요, 에버그린 씨.”
율리카의 생일 파티에 갈 때도 로위나의 손을 빌렸던 나는,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로위나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냥 로위나로 충분합니다, 공녀님.”
인사를 나눈 후, 우리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자마자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인사치레 같은 건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동안 주셨던 명단을 토대로 사교 모임에 참석하며 동향을 살펴봤어요. 우리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일 소재가 충분한 귀족들이 꽤 있더군요.”
나는 정리한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해밀턴과 로위나가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살펴보았다.
한참 후에, 로위나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이런 내밀한 정보를 어떻게?”
“시종들 입을 다 막긴 어렵죠.”
“시종들이요?”
“영애들이 모임을 가질 동안 시종들은 시종들끼리도 모임을 하니까요. 아고트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몇 가지 긁어낸 정보를 토대로 따로 조사하다 보면, 그 가문이 처한 곤란한 상황이나 약점 등을 알아내기 쉽다.
“아고트는 아직 어린 데다 여자애라, 상대가 방심하기 쉬워요. 말은 그런 곳에서 새죠.”
그런 이유로, 전생의 나 역시 온갖 구설과 야화를 듣고 자라 왔다.
지금의 나는 ‘공녀’라는 벽이 있으니 그때보다는 말을 줍기 어렵겠지만.
“하! 이 정도라니. 이젠 제안이 아니라 매달려야 할 판이군요.”
해밀턴의 영문 모를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기왕 수도에 올라오셨으니, 정식으로 전하의 검술 교관이 되어 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미간만 찡그렸다.
내가 카이사르의 검술 스승이라는 것은, 지난번 황성 주최의 검투 대회 이후 암암리에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소문뿐으로, ‘설마, 헛소문이겠지’ 하는 분위기로 착실히 흘러가는 중이다. 그보다는 ‘황태자비 후보’라는 이슈가 더 재미있을 테니까.
“저를 도망 못 가게 카이사르 옆에 묶어 두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별수 있습니까? 놓치기는 아까우신 분이고, 황태자비는 싫다 하시니, 이렇게라도 곁에 모시는 수밖에요.”
해밀턴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이사르의 스승이 되겠다는 건 내 뜻이었다. 검술 교관이 되어 달라는 건 내 의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뜬금없이 절 그런 자리에 앉히면 반발이 있을 텐데요.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수도 있고요.”
지금껏 나는 검투 대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제자들의 뒤에 존재했을 뿐.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여성을 황태자의 검술 교관으로 들인다니, 누가 반기겠는가.
“실은 그런 이유로, 제안 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로위나가 끼어들었다.
“벤 변경후를 아십니까?”
“벤 변경후?”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난번 내 생일 파티에 참석한 귀족 중에 벤 변경후가 있었다.
페레스카와 마찬가지의 구귀족으로, 정치에서 발을 빼고 영지에 틀어박혀 변경을 지키고 있는 자였다.
‘그러잖아도 그가 페레스카의 파티에 참석했던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인데.’
내 의문을 해소해 주려는 듯, 로위나가 특유의 감정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최근 페레스카 공작님을 통해 사병 지원을 희망하시더군요.”
“사병 지원이요?”
“요즘 변경 지역에 마수들이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변경에 마수들이 들끓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을 막기 위한 변경 귀족이고 말이다. 변경 귀족들에게 독자적인 사병 지휘권이 허락되는 게 괜한 이유가 아니다.
“변경후에게도 사병이 있을 텐데요.”
“감당 안 될 정도인 거겠죠. 저희도 아직 시찰을 가 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그래도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니라 같은 변경작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게 순서일 텐데.”
“브란테 변경백에게 이미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황태자파인 공작님께 요청한 거고요.”
오호라. 황후 측에게 감정이 상했다 이거로군.
“황성에서는 아직 상비군을 보낼 생각이 없을 겁니다. 예산 문제도 있고, 황성의 상비군은 마수 퇴치엔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벤 변경후가 속이 타겠군요.”
그렇군.
이럴 때 변경후에게 도움을 주면, 그를 황태자 측에 끌어들일 수 있다.
‘사병을 보유한 변경후가 황태자 측이 되면 대환영이지.’
변경백도 사병 보유를 할 수 있지만, 변경백과 변경후의 보유 한계 규모는 현저히 다르다.
확실히 이건 기회다.
내 눈빛이 변한 것일까. 날 바라보는 해밀턴의 얼굴에 확신이 떠올랐다. 그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공녀께서 마수 토벌단을 꾸려 변경후의 지원을 나가시는 거죠.”
“그러면 제 실력 검증도 되고, 변경후도 포섭하고 말이죠?”
내가 ‘핫’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뭘 믿고 거기에 절 보내시겠다는 거죠?”
“전 어릴 때부터 공녀를 뵈어 왔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해밀턴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는 카이사르의 납치 사건 때 거기 있었던 사람이다. 내가 성인 남자 셋을 제압했다는 걸 이미 아는 남자.
‘그렇지만 내가 이번 생에서까지 마수랑 드잡이를 해야 되나? 아, 생각만 해도 귀찮은데.’
대체 왜 난 공녀로 태어나서도 피 튀기는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역시 저의 제안이 너무 무례했을까요?”
내가 한참 대답이 없자, 해밀턴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감히 누가 귀족 영애한테 마수를 잡으러 가 달라고 부탁을 하겠는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밀턴이 내게 제안한 건, 그가 나를 오롯이 한 명의 ‘검사’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건 싫지 않다.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데려갈 이들은 제가 골라서 꾸리겠어요.”
“그야 두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귀찮지만 뭐, 좋게 생각하자.
이를테면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실력향상을 위해 실전 기회를 내준다든가 하는 쪽으로.
“물론, 저의 제자 세 명을 포함해서요.”
후학 양성은 이번 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의욕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