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41/156)

* * *

연무장에 들어선 순간, 확실히 각오가 필요하긴 했다.

그럴 것이.

‘새싹 밭이네.’

착잡하군.

단상에 올라 정렬한 새싹, 아니 수련병들을 보며 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들도 단상에 선 날 보며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카이사르는 달튼과 함께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발코니로 쫓아냈다. 그 녀석이 곁에 있으면 수련병들은 내가 아닌 카이사르를 보고 따르려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연무장이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선언했다.

“본인, 헬레나 페레스카는 이번 동도 밴달리움의 마수 토벌을 이끌 토벌대의 대장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련병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다들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저와 함께 마수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은 함께할 이들을 선발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차분히 설명했지만,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총기 대신 당혹감만 가득한 수련병들의 눈빛에 나는 더욱 착잡해졌다.

그중 가장 앞줄에 서 있던 키 큰 수련병 하나가 손을 들더니 내게 물었다.

“혹시 저희들 임무가 영애의 수호입니까?”

여기저기서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런, 야만족 군대도 이것보다는 군기가 있겠는걸.

나는 그들을 향해 빙긋 미소 지어 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겁니다. 전 저보다 약한 자들의 수호는 받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소란하던 연무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침묵은 경외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나는 단상에서 내려가 그들 가운데로 들어갔다. 나를 가운데 두고 자연스럽게 둥그런 원이 만들어졌다.

연무장 중앙까지 걸어간 나는, 그곳에서 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전 지금부터 여러분의 실력을 시험할 생각입니다. 자, 자유롭게 오세요.”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대뜸 덤벼들 이가 있을 리 없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보며 쭈뼛거릴 뿐이다.

그러니 구미 당기는 보상이 주어져야겠지.

“혹 날 이기는 이가 나온다면, 그 사람에게 이번 토벌대의 대장직을 양도하겠습니다.”

다시 공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련병에게는 다시 없을 승진의 기회다. 이런 큰 건의 대장이 된다면, 명성은 물론 당장 기사작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여자를 상대로 검을 들어도 될까? 라는 일말의 거리낌은, 곧이어 내뱉은 내 도발에 사라졌을 거다.

“아, 물론 그것도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제야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조금 전 내게 손을 들고 질문했던 바로 그 수련병이었다.

이죽대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그는 폭이 넓은 검을 뽑아 들고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수련병 호크 밀렌입니다. 영애를 다치게 했다고 나중에 제게 엄벌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겠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 확답이 떨어지자마자, 호크가 엄청난 기세로 내게 달려 들어왔다.

보아하니 내 검을 멀리 날려서 전투 불가 상태로 만들 생각인 것 같다. 그러면 날 다치게 하지 않고 대련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아, 정말.

쓸데없는 배려심.

“하아아아앗!”

호크가 내지르는 괴성이 연무장을 울렸다.

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가, 호크의 검이 진로를 바꾸는 그 순간, 반격에 들어갔다.

기합도 없었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 준비 동작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 호크가 보기엔 갑자기 눈앞에 사람이 솟아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허억!”

호크가 당황하며 내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단 3연격 만에 대련은 끝났다. 눈 깜짝할 사이 내 검은 호크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숨이 찰 틈도 없었던, 실로 짧은 대련이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호크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나는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다른 수련병들을 둘러보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자, 다음.”

* * *

여러 명을 상대하려면 체력 배분을 잘해야 한다.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수련병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갔다. 대부분은 3연격 내 패배했다.

“다음!”

무슨 기록이라도 세우는 사람처럼, 나는 쉴 새 없이 ‘다음’을 외쳤다.

더러는 이미 내게 한 번 졌던 수련병이, 도무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다시 공격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음!”

처음 서너 명 까지는 여전히 날 우습게 여기며 다가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라는 걸 자각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자각한들, 더 나아지는 건 없다.

“자, 다음!”

그리하여 서른 명 남짓한 수련병들을 모조리 굴복시키기까지는 네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저, 저희가 졌습니다……!”

결국 수련병들은 하얗게 뜬 얼굴로 내게 최종 패배를 선언했다.

나는 턱밑에 매달린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사실 나도 슬슬 체력이 바닥나 가던 참이었다.

최대한 움직임을 적게 하여 체력을 아꼈음에도, 막판엔 거의 깡으로 버텼다.

그러나 나는 아직 쌩쌩한 척하며 수련병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의 실력, 잘 보았습니다. 토벌대원으로 선발된 이는…….”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외쳤다.

“……없습니다.”

다들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반발은 없었다.

* * *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그로부터 사흘 후. 달튼의 부탁에 적기사단 본부를 다시 찾아갔더니, 몇 명의 수련병이 내 앞에 허리를 숙이며 사정했다.

마침 지난번 인선 때 눈여겨봐 두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인선은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저희가 자만했습니다. 더 노력해서 누가 되지 않게 할 테니, 부디 배움의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가장 큰 소리로 말한 건, 나에게 ‘영애 수호가 임무냐’라고 빈정댔던 호크라는 이름의 수련병이었다.

대련 때도 저 혼자서 세 번이나 내게 도전했을 만큼 자존감이 강한 이이기도 했다.

맹랑하다고 해야 할지, 근성이 있다고 해야 할지.

‘뭐, 예상한 결과지만.’

실력으로 짓눌러 내 가치를 증명하는 게 효과를 본 건, 적기사단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주의’라는 자신들의 방침에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내세워 굴복시키려 했다면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

내 반말에 수련병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내 무표정을 확인하고는 바짝 긴장하여 차렷 자세를 취했다.

깨달은 것이다. 내 반말의 의미.

그들을 내 부하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내 훈련은 결코 녹록하지 않을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수련병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목소리에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다.

“나는 따르지 않는 자를 설득시켜 함께할 만큼 너그러운 이가 아니다. 내 명령에 불복하거나 내 권위를 시험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겠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장님!”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수련병들이 대답했다. 그 쩌렁쩌렁한 대답이 좁은 방 안에 터질 듯 메아리쳤다.

이제 이들 중 누구도 나를 ‘귀족 영애’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좋아. 연무장으로 돌아가 대기하도록.”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의 내 명령에 수련병들, 아니 내 대원들의 눈빛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존명!”

간신히 떡잎이 떨어진 새싹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