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46/156)

* * *

내가 의식을 차린 건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앞이 안 보이니 낮인지 밤인지,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간에.

나는 깨어났다.

“……삭신이 다 쑤시네.”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다소 품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삭신이 안 쑤셔도 이상하지.”

“히익.”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바로 곁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덜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누, 누구신지?”

“누굴 것 같아?”

“아……, 전하시군요.”

“지금, 우리 둘뿐이야.”

“그래?”

내 조심스러운 존댓말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둘뿐이라면 예의 차릴 것 없지.

뭐, 예의를 차리고 싶어도 침대에 누운 채라면 한계가 있긴 하지만.

“나 좀 일으켜 줄래?”

내 제안에 카이사르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화가 난 분위기인데, 그런 것치고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 헷갈린다.

“아이고오……, 안 아픈 데가 없네.”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도 간신히 해낼 정도로 온몸이 찌릿찌릿 아팠다.

“갈비뼈 두 대 나갔고, 견갑골 부서졌고, 상완골에 금이 갔어. 아픈 게 정상이야.”

카이사르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뭐야, 왜 화가 난 건데?

“앞은? 얼마나 보여?”

“알고 있었어?”

“안 보이니까 마수 위치 타령했던 거 아니야?”

“그게……, 형태 정도만.”

카이사르에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여 솔직하게 자백했다.

카이사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삐거덕거리며 그가 앉은 쪽으로 침대가 약간 기울었다.

카이사르의 긴 손가락이 헝클어져 뺨에 달라붙은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의사 말로는, 눈은 일주일쯤 지나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고 하더군.”

“그래? 다행이네.”

“수도에 돌아가는 일정은 잠시 미루기로 했어. 대원들만 보내 놓고, 난 여기 남을 거야.”

“오라버니는?”

“네가 깨어나는 것만 확인하면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했어.”

“정말? 하아, 고마워. 오라버니가 안 가겠다고 고집 피울까 봐 걱정했거든.”

내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다쳤을 때 눈이 뒤집혔던 레너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사실 앞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걱정은 안 했다.

웜의 독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눈이 다 나을 때까지는 당분간 이래저래 불편하겠네.”

“걱정하지 마. 네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내가 보좌해 줄 테니까.”

“파하! 황태자께서 공녀의 뒤치다꺼리를 하시겠다? 사람들이 웃겠는걸.”

내가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카이사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표정이 보이질 않으니, 그 침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드는 심정으로 카이사르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저기,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뭐든 말 좀 해 줄래, 카이사르?”

“헬레나.”

“응?”

“넌 그때, 날 보냈어야 했어.”

그때라니, 언제 말이야?

웜을 잡을 때를 말하는 건가?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웜의 급소를 아는 건 나뿐이었어. 더구나 황태자를 다치게 할 순 없잖아.”

“넌 어째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감당하는 거야?”

“엇, 그거야…….”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냥,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30여 년의 인생을, 오로지 나 하나 믿고 헤쳐 나갔으니까. 나는, 강하니까.

“네가 다치거나 잘못됐을 때 내가, 아니 하다못해 레너드나 아고트가 얼마나 절망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전투에서 다치는 건 비일비재한 일인걸.”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과 네가 다치는 건, 나에게 그 경중이 달라.”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한풀 꺾인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안해. 사실 네게 화낼 일이 아닌데. 다 내 탓이야.”

“무슨 소리야? 아니야, 네 탓 아냐. 그런 생각 안 해.”

“아니, 내 탓이야.”

카이사르가 내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내가 뻔히 곁에 있었는데도, 널 지키지 못했어.”

“나 아직 안 죽었어.”

“대체 뭘 위해 배운 검인지.”

“뭐야? 왜 약한 소릴 하고 그래? 카이사르는 강한 사람이야. 황제가 될 사람이 그런 약한 소리 하면 안 되지.”

“헬레나. 내가 황제가 되려는 건, 네가 황제가 되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야.”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런다고 그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물기 젖은 목소리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확실하게 와닿았다.

“나는 널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어. 그러니 제발 널 위해 나를 사용해, 헬레나. 혼자 다 감당하려 하지 마.”

그의 애원이 내게서 말을 빼앗아 갔다.

혼자서 감당하지 말라니. 하지만 난 지금까지 혼자서 잘 해내 왔는데. 뭐든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었는데.

난 언제나 옳았고, 옳아야 했고, 단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 없었을 텐데.

왜 너는 자꾸만 나에게 남을 의지하라고 말하는 거야?

왜 자꾸만 나에게, 약해져도 괜찮다고 속살거리는 거야?

“너는 공녀가 황태자를, 황제가 될 이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그 남자는 네 거니까.”

“네가 나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내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사르의 크고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아하니까.”

좋아해? 무엇을?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큼, 내가 헬레나 페레스카를 사랑하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 유감이다.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저 고요하고 상냥한 목소리 너머에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줄이야.

‘그렇구나. 단테 레나투스의 인생은, 이제 여기에는 없어.’

여기, 그에게 사랑받는 건 오롯이 헬레나 페레스카의 인생이다. 이제야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분리된다.

단테 레나투스는 선택하지 못했던 삶.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었을……, 외롭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그런 삶.

“몇 번이나 말했잖아, 헬레나. 좋아한다고, 널 좋아한다고 말이야. 대체 언제쯤이면 눈치챌래?”

카이사르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내 탓을 했다.

지금 내가 놀라지 않는 건, 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날 안는 그의 품이 안온했고, 날 붙잡는 그의 손길이 따뜻했고,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달콤했다는 걸, 실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건, 이상해.”

스승을 사랑하는 제자.

제자를 연모하는 스승.

그런 배덕한 관계, 듣도 보도 못했다.

“응, 그래. 그렇다면 지금 내 말은 잊어도 좋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쓸쓸하게 들렸다.

내 내면의 한 부분이 덜컥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공허함이 내 온 정신을 잠식했다.

‘왜지. 좀 울고 싶어져.’

네 얼굴을 봤다면 난 지금 틀림없이 울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 *

깨어나자마자 나는 귀찮은 문제와 대면하게 됐다.

푹 쉬고 일어난 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이제는 침실을 좀 나서 볼까 하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귀찮은 문제는 속속 나를 찾아왔다.

“헬레나, 아직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그래. 정 움직이고 싶으면 내가 업어 줄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레너드였다.

천사 같은 레너드의 동생 걱정하는 마음이야 모를 리 있겠느냐마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업혀 다니고 싶진 않다.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단 말이다.

“오라버니, 학교엔 언제 돌아가는데?”

“네가 이렇게 아픈데, 이 먼 곳에 널 두고 떠나려니 발이 안 떨어져.”

“그러다가 제적당하면 어쩌려고. 좋은 성적 유지해 온 게 아깝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돌아가도록 해.”

나는 레너드를 설득하며 말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고트가 활기찬 목소리로 내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요, 도련님! 아가씨의 수발은 제게 맡기셔요! 다 나으실 때까지 발에 먼지 한 톨 묻지 않게 모실 테니까!”

아고트가 침대에 걸터앉은 내 무릎에 기대어 앉아 내게 말했다.

“아가씨는 손 하나 까딱 안 하셔도 되어요. 식사도, 옷 갈아입는 것도, 몸단장도, 목욕 시중도 모두 제가 도와 드릴게요.”

뭐야, 그거. 좀 무서운데.

“스스로 할 수 있어.”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으니 목숨을 내놓아도 할 말 없는 몸! 부디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그 목숨, 넣어 둬.”

내가 질린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아고트는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라는 허락도 안 했는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여러 명이 우르르 내 침실로 쳐들어왔다.

“대장님!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침대에서 내려오시겠다니, 무슨 말입니까!”

“더 쉬십시오, 대장님! 저희에게 시키면 뭐든 할 테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대원들이다.

이 녀석들은 날 돕기 전에, 여성의 침실에 들어서는 매너부터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산책할 생각인데, 그럼 너희가 나 대신 산책해 줄래?”

난 농담으로 말했는데, 녀석들에겐 농담으로 들리지 않은 것 같다.

“들었지! 대장께서 산책을 원하신다!”

“저희가 대신 산책을 다녀와 드리겠습니다, 대장님!”

“아니……, 산책은 본인이 하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걱정 마십시오! 다 같이 정원을 100바퀴쯤 뛰겠습니다!”

“산책이 아니지 않아, 그거?”

이 녀석들, 말이 안 통해.

“역시 내가 업고 가는 게 좋겠어, 헬레나.”

“아니에요, 아가씨! 같은 여자인 제게 몸을 맡기시는 게!”

“얘들아, 대장께서 직접 나가신단다! 편하게 가시도록 인간 가마를 만들어 모시자!”

“우오오오오오!”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소리로 위치를 파악하는 상황이라 더 어지럽다.

“다들 필요 없어!”

결국 나는 품위고 체면이고 내다 버리고 버럭 소리쳤다.

그때였다. 내 앞을 빙 둘러서 있던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누군가 내 앞으로 척척 다가왔다.

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지라,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상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까맣고 키가 크구나 하는 것만 알았을 뿐.

그 누군가는 내 앞에 잠시 서 있더니, 곧 나를 품에 번쩍 안아 올렸다.

……으응?

“우와악!”

갑자기 몸이 가뿐하게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나는 당황해서 날 안아 올린 사람의 멱살을 힘껏 쥐었다.

“뭐, 뭐야!”

“산책을 원하신다 이거지?”

“카이사르……?!”

녹을 것 같은 그 속삭임을 듣자마자, 나는 지난밤 그와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밤.

그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으아아악!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난 틀어쥔 그의 멱살을 반사적으로 놓았다. 그 탓에 몸이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아앗!”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것을, 카이사르가 다시 끌어당겨 안정적으로 제 품에 폭 안았다.

“꽉 잡아. 안 그러면 떨어진다.”

카이사르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얄밉다.

그러나 떨어지는 것도 싫은지라,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감은 채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자아, 봤지? 스승님은 내가 모실 테니, 다들 그만 물러가 보도록.”

황태자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다들 아쉬운 양 투덜대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방을 나갔다.

모두가 방을 나갔다는 것을, 문 닫히는 소리와 고요해진 공기로 알았다.

그러나 난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의 어깨에 파묻고 있었다.

“모두 나갔어. 헬레나, 고개 들어도 돼.”

“시끄러워.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녀석 같으니.”

“응? 내가 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웃음이 섞인 그 말에, 그제야 난 고개를 팍 하고 들었다.

“아니, 어제 그런 소릴 해 놓고 그럼 안 부끄럽단 말이야?!”

“어제 뭐 말이야?”

“어제! 어제 여기서……, 네가! 응? 네가 말이야!”

아, 미치겠네.

난 입 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그런 내 반응에 카이사르가 실실 웃으며 –이건 안 보여도 안다― 말했다.

“아, 좋아한다고 했던 거?”

“다시 말하지 마!”

“새삼 부끄러울 이유가 있나? 널 좋아했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대체 언제부터……?”

“글쎄, 언제부터일까? 너무 오래되어서 나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으쌰, 하고 나를 다시 추켜 안은 후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아마도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재미없는 신소리.

“……정원으로 이동이나 해.”

“후후, 스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미치겠군.

원래는 좋아하는 쪽이 안달복달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나만 부끄러운 건데?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네.’

인생 최대 난관이다.

그 난관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거라고는, 다시 태어나기 전엔 생각도 못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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