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3. 에레즈 그레이의 연심 융화
그녀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성벽 위에 올라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황혼의 붉은 바람에 거칠게 나부꼈다. 한 발만 잘못 내디뎌도 끝없는 낭떠러지였으나, 그녀의 뒷모습엔 두려움이 없었다.
하긴, 인간이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하던 악룡을 봉인해 버린 영웅이 아니시던가. 에레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단테에게 한 걸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바람이 강합니다. 위험하니 내려오시죠, 황녀 전하.”
에레즈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단테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에레즈를 돌아보았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깊고 강렬한 눈동자. 칼로 벤 듯한 냉정하고 날카로운 미소.
에레즈는 그동안 수많은 레나투스 일족을 만났고 섬겨 왔지만, 그녀만큼 기품과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 황위에 앉아 있는 인간마저도.
“그레이 공.”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단테가 웃었다.
“언제 온 거지?”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대도 참 기인이군그래. 황제가 밖에서 낳아 온 계집이라 다들 엮이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뭐 떨어질 콩고물이 있다고 여길 찾아오는지…….”
“떨어질 콩고물을 바랄 정도로 없이 살지 않습니다, 전하.”
“푸하핫!”
단테가 입을 가리지도 않고 폭소를 터뜨렸다.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기인이라 하면 성벽에 서서 맞바람을 맞으며 멀리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더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레즈는 그녀에게 더욱 다가갔다.
“그만 내려오시죠. 바람이 셉니다. 제가 잡아 드릴 테니…….”
에레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테가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너무나도 가뿐하게 에레즈의 곁에 착지한 단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레즈를 쳐다보았다.
“응?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나?”
“……아뇨. 바람이 차다는 말이었습니다.”
에레즈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쭙잖게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려 한 자신이 조금 창피했다.
“음, 그대의 말이 옳다. 북풍이 더욱 강해졌군. 올해 겨울은 몹시 춥겠어.”
단테가 아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서리가 일찍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농가의 피해가 이만저만 아닐 테니.”
“농가도 살피십니까?”
“살피려면 아래를 살펴야지. 무너지지도 않을 하늘을 살펴 뭐하겠나.”
단테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투박한 미소에 에레즈 역시 마주 미소 지었다.
“뭐, 슬슬 내려가지. 내 그대를 위해 솜씨를 발휘해 파이를 만들어 주겠네.”
“요리, 못하시지 않습니까.”
“후후, 얼마 전에 키친 메이드에게 배웠거든. 혹시 정어리 파이라고 먹어 봤나?”
“……실은 제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와서…….”
“하핫, 잔말 말고 따라와.”
“……예.”
일전에 단테가 만들어 준 호박 수프를 마시고 배탈이 났던 에레즈는, 의사에게 미리 소화제를 부탁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얌전히 단테의 뒤를 따랐다.
* * *
굉장히 혼란한 시기였다.
부패한 황가의 권위는 추락했고, 황태자는 무능해서 진작 모 백작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다른 황자들은 혹여 자신에게 후계권이 넘어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었고, 귀족들은 혼란한 틈에 영토의 자치권을 주장하려 검은 속내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레나투스가의 운은 다했다. 분명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에레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무사하십니까, 전하?”
늦은 밤, 황성 내 단테의 침실.
황가의 파티에 초대되어 온 지 만 이틀이 지났다.
단테를 고깝게 보던 레나투스 일족이 어쩐 일로 초대장을 보내왔나 했더니 다 꿍꿍이가 있어서였음을, 에레즈는 이틀이 지난 밤에야 깨달았다.
에레즈의 발치에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가린 자객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에레즈의 검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침대에 걸터앉은 단테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여전히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해. ……하, 참. 손님 대접이 험하군.”
단테의 오른손에도 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 에레즈가 달려오지 않았더라도 그녀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저 지금껏 그녀 혼자 해결해 왔다는 의미일 뿐이다.
에레즈는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왜 베개 밑에 검을 두고 자는 것인지. 왜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인지. 왜 이 사태에 이리도 의연한 것인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
생각이 결론에 다다르자, 에레즈는 뿌득 이를 갈았다.
“……그만 돌아가죠. 여긴 위험합니다. 사방이 레나투스 놈들인데, 제대로 쉴 수나 있겠습니까?”
후계자 자리도 내놓고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 유유자적 남은 생을 즐기려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힐 이유가 있나.
“됐어, 이 정도 일로 뭘. 하암, 졸리군. 잠이나 더 자야겠어.”
“이 정도 일이라니, 이게 어떻게 이 정도 일입니까?”
“자객은 황성이 아니어도 찾아와. 황가에서 내 저택에 시종을 들여 준답시고 꽂아 놓은 인간이 몇인 줄 알아?”
“그러면 여기 계속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일정만큼은 있다가 가야지. 저것들 하는 짓이 재수 없어서라도.”
도망치듯 가는 건 싫다는 의미다.
에레즈는 단테의 고집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결국 한숨만 내쉴 뿐 그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사람을 불러 치우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어. 아, 그리고 사람을 불러서 물 한 잔만 가져다 달라고 해 주겠어?”
“제가 가져오죠.”
“이것 참, 그대에게 폐를 많이 끼치는군, 그레이 공.”
“뭐 어떻습니까. 이 정도 폐는 끼쳐도 될 사이 아닙니까.”
에레즈가 쓰게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단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무슨 의미인가?”
“네?”
단테의 생소한 반응에 에레즈가 오히려 당황했다.
“뭐……,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만.”
단테와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깊은 밤이라 들키진 않았겠지만.
“폐를 끼쳐도 될 사이는, 뭐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단테가 미간을 찡그리며 재차 물어 왔다. 그리고 그제야 에레즈는 깨달았다.
그녀는 ‘너와 난 그런 관계가 아니야’라고 선을 긋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순수하게, 사전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다.
“글쎄요. 예를 들면 가족이라든가…….”
“내 혈육들은 충실하게 내게 폐를 끼치고 있는데, 내가 이걸 용인해야 할 이유가 있나?”
“……아니지요.”
에레즈는 바닥에 널브러진 자객의 시체를 흘끗 보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녀에게는 ‘폐를 끼쳐도 괜찮을 사이’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풍파 많은 인생을 살았고, 많은 업적을 쌓았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겠지만, 모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을 뿐.
‘이 사람에게는 마음 편하게 폐를 끼쳐도 될 사람 하나 없었단 말인가.’
에레즈는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예를 들면 친우, 같은 것 말입니다.”
“친우?”
단테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그런가. 친우. 그렇군. 친우란 그런 것이군그래.”
그러더니 생긋 웃으며 에레즈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폐 정도는 끼쳐도 될 사이인 우리는 친우인 건가?”
“……전하께서 그리 여겨 주신다면야, 저는 영광입니다만.”
“그렇군. 아닌 밤에 친우가 생겼어.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에레즈의 대답에 단테가 어린애처럼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 해맑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자객의 등장에 강퍅해져 있던 에레즈의 마음도 스르륵 풀어졌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응, 수고롭겠지만 좀 부탁하지.”
단테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웃었다. 성인 여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천진난만한 모습이라 에레즈는 짧게 실소한 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방문을 나서기도 전, 에레즈는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등 뒤에서 털썩,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전하?”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니, 단테가 침대 옆에 쓰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나 생각했다. 아니면 피곤해서 갑자기 잠이 든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서서히 검붉게 물들어 가는 새하얀 침대 시트를 발견하고, 에레즈는 온몸에 피가 식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전하!”
에레즈가 황급히 단테에게 되돌아갔다. 뺨을 어루만져 보니, 거짓말처럼 차가웠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전하? 제 말 들리십니까?”
아무리 불러 보고 뺨을 비벼 보고 몸을 흔들어 보아도 반응이 없다. 맥박은 뛰고 있으나 희미하다. 체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단테!”
에레즈가 본인은 들을 수 없는 이름을 애타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