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1화 (4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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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을 피워 다른 레나투스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릴 필요는 없다.

에레즈는 흥분한 중에도 은밀히 자기 사람을 불러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 말로는 중독 증상이라 했다.

“다행히 상태가 중하지 않으시고 처치도 빨라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사람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안심하라니, 에레즈는 그 말이 굉장히 야속하게 들렸다.

그날 에레즈는 새벽빛이 밝을 때까지 단테의 침대 곁에 앉아, 과연 어떤 자가 독을 먹였을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파티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식전주가 문제였을까. 자객이 뭔가 손을 썼던 걸까.

그런 고민만 거듭해 가는 사이, 의식이 없던 단테가 눈을 떴다.

“……깨어나셨습니까.”

에레즈가 피곤한 얼굴로 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간신히 눈을 뜬 단테는 자리에 누운 채 그저 눈만 껌뻑거리며 에레즈를 쳐다보았다. 한참 지나서야 단테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그레이 공.”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시지요. 중독이었다 합니다만, 몸은 괜찮으십니까?”

“음……, 독인가. 그 술, 어째 맛이 더럽게 없더라니.”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독은 맛으로 대충 구별할 줄 알거든. 이상하다 싶어서 뱉었는데, 몇 모금 마신 게 문제였나 보군.”

술. 식전주가 문제였나? 그것을 누가 가져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경을 쳐야 범인을 색출할 수 있을까?

까득. 에레즈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제가……, 꼭 범인을 색출해서 죽음으로 갚도록…….”

“됐어. 색출해 봐야 내 반쪽짜리 혈육들 중 하나일 텐데, 뭐가 궁금하다고.”

“하오나.”

“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탓도 있겠지. 난 괜찮으니, 그대도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전 괜찮습니다.”

“밤새 여기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다 몸이 축날 거야.”

“곁을 지키겠습니다, 전하.”

“으음, 아니……, 그대가 곁에 있으면 내가 불안해서 잠을 못 자잖아.”

단테가 미간을 찡그리며 속내를 말했다.

불편한 게 아니라 불안한 건가. 그녀의 대답에 에레즈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직 절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시군요.”

“그대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그렇습니까.”

“섭섭한가?”

“아뇨.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전하.”

에레즈는 단테의 머리맡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차가워진 단테의 손을 꼭 감싸 쥐고 다정하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그게 저라고 해도 말입니다. 군주는 그래야 합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이니까요.”

“난 그대의 주군이 아니야. 그대의 주인은 황좌에 앉아 있는 내 아버지 아니었나?”

“저의 왕은 제가 결정합니다.”

“무슨 의미지?”

“전하. 무지하고 오만한 당신의 혈육들을, 당신이 계속 용인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단테가 눈을 깜박였다.

한참 말이 없다. 에레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위험한 발언을 철회하거나 무르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레즈의 확고한 눈빛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단테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에레즈가 그녀를 올려보았다.

“방금 그 말이 얼마나 불경한 것인지 알고 있는가, 그레이 공?”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를 대신하여 당장 그대의 목을 칠 수도 있어.”

“당신이 제 목을 치신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어차피 이 제국에, 레나투스에게 미래는 없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켜보느니, 지금 여기에서 레나투스의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손에 죽겠다.

“전하, 저들을 용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당신의 검이 되어 저들을 모조리 섬멸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을 죽이라 이건가?”

“형제가 아니라 황제라도.”

“반란이라도 일으키라?”

“제가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 내 아무리 사람을 많이 죽였다지만, 이젠 가족까지 죽이라니. 그래선 떨어질 지옥도 없겠어.”

단테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비어 있는 왕좌에 앉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지옥은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에레즈 그레이는 이때를 기다려 왔다.

가장 강하고 현명하며 카리스마 있는 왕을 섬길 수 있을 때를. 레나투스에 그녀 말고 황제가 될 만한 재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혁명도 반란도 아니다.

숙명이다.

“저는 당신의 검입니다. 휘두르기를 원치 않으시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부러뜨려 주십시오.”

그녀를 위하여 죽을 각오 따위,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이미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가볍다.

단테는 한참 말이 없었다. 이런 결정을 당장 내리라는 게 얼마나 무겁고 어려운 일인지 에레즈는 잘 알았다.

그러나 단테는, 오래 고민하더라도, 결국에는 옳은 답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에레즈 그레이는 잘 알고 있었다.

“……친우에게 소소한 폐를 끼치게 되겠군.”

단테가 씩 웃으며 에레즈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져 주겠어, 에레즈?”

“그곳이 어디든, 제가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에레즈의 붉은 눈동자가 새벽빛에 반사되어 결연하게 빛났다.

어둠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밤에 숨어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바닥 위로 융기한다.

주군께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연모는 짙어가는 그림자와 뒤엉켜 침전해 간다. 끝없이, 끝없이.

다시는 떠오르는 일 없이.

5. 나의 검은 권능을 입을지니 (2)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장면들이 의미를 지닌 채 되살아난다.

나는 그의 손길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가 곁에 없을 때 쓸쓸했다.

그래.

쓸쓸했다.

“자작님, 전 카이사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신이 아직도 멍했다.

“큰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해밀턴이 잔디를 씹은 듯한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와……, 어떻게 하죠?”

“아니, 제게 물으셔도.”

“와아……, 이거,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겠죠? 제자랑 어떻게 해 보려는 스승이라니, 이상하잖아요?”

“대체 뭘 해 보려고 하시기에 윤리적 문제까지 나오는 겁니까.”

“와……, 와아……, 내가 카이사르를……, 와아…….”해밀턴이 핀잔하듯 말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로서는 카이사르가 날 좋아한다는 것보다, 내가 카이사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다.

한 번 자각하고 나니 머릿속이 대혼란이다.

카이사르와 해 보고 싶은 온갖 파렴치한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끝도 없이.

“난 여태껏 제자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쳤다.

“뭐, 전하께서도 스승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피장파장이니 괜찮습니다.”

해밀턴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위로가 안 됐다. 더구나 해밀턴은 이제 슬슬 이 화제에 흥미가 떨어진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쨌든 다행이군요. 쌍방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 아닙니까.”

“모르겠어요. 누굴 좋아해 본 적도, 누가 날 좋아했던 적도 없어서.”

“저런. 공녀께 외사랑을 품었을 뭇 남성들에게 절로 동정심이 떠오르는군요.”

“농담은 됐고, 그럼 전 이제 뭘 해야 하죠? 뭘 하면 좋을까요? 제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여긴 점집이 아닙니다만.”

그렇게 말해 놓고서 해밀턴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일단은 그 마음을 표현하시는 게 순서 아닐까요?”

“표현이요? 카이사르를 침대에서 쓰러뜨리란 뜻인가요?”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어떻게 하면 생각이 거기까지 폭주합니까?”

혼란에 빠져 아무 말이나 내뱉는 나에게 휘말려, 해밀턴이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의 고백에 대답을 드리라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카이사르는 날 좋아한다고 말해 줬지만, 난 아직 그에게 내 마음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잊어버려, 라고 말하던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얼마나 외롭게 들렸는지가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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