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2화 (50/156)

* * *

“방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해밀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지만 내가 가볍게 거절했다.

“아뇨, 괜찮아요.”

나 때문에 유서를 쓸 각오까지 해 가며 내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가여운데, 일을 방해할 수는 없지.

“하지만 아직 시력이 다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뭐, 그래도 형태는 대충 보이니까요.”

복도를 걷는 중에 방해라고 해 봐야 조각품이나 큰 가구들뿐이다. 그런 건 형태로 구분된다. 천천히 걸어가면 충분히 피해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잖아도 카이사르가 절 안고 내려놓지 않아서 좀 걷고 싶었어요.”

“그럼 시중들 사람을 불러올까요?”

“음, 그것도 괜찮아요. 냉큼 달려와서 소란 피울 사람들이 몇몇 떠올라서.”

나는 아고트와 대원들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레너드는 학교에 돌아갔다는 건가.

“전 그만 돌아가 볼게요. 유익한 상담이었어요, 자작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페레스카 공작께서 제게 크게 분노하시면 오늘을 기억하시어 꼭 제 편 좀 들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저렇게 소심해 가지고 어떻게 카이사르의 보좌를 무사히 해 올 수 있었던 걸까.

‘음 일단은……, 침실로 돌아가자.’

호기롭게 혼자 가겠다고 나오긴 했지만,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긴 하다.

사고 치지 말고 오늘은 이만 얌전히 돌아가야지.

나는 발소리가 울리는 긴 복도를 따라 느리고 신중하게 걷기 시작했다. 걷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니 상념도 사라졌다.

‘나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구나.’

걷는 게 조금 익숙해졌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물론 나는 레너드도 좋아하고, 아고트도 좋아한다. 지금의 내 부모를 좋아하고, 해밀턴도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연애 감정과는 다르다.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을 향하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카이사르를 좋아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기에 앞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난간에 손을 올린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실소했다.

“나도 참. 카이사르가 얼굴만 잘생겼다뿐이지, 성격도 더럽고, 고집도 세고, 능구렁이 같은데, 난 어떻게 그런 녀석을…….”

“누구 성격이 뭐 어쩌고 어째?”

“으악!”

왼쪽 귓가에서 들려오는 낮고 험악한 카이사르의 목소리에 난 창피하게도 비명을 내질렀다.

앞이 안 보여서 누가 바로 곁에 다가온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꺄악!”

너무 놀란 탓에, 나는 계단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망했다!’

나는 잡고 있던 난간마저 놓쳤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헬레나!”

카이사르가 그런 내 허리를 붙잡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딱 10초 정도는.

“헉!”

“엇?”

문제는 앞이 안 보이는 내가 뭐라도 잡으려고 허우적대다가 카이사르의 멱살을 낚아챘다는 점이다.

아하하.

끝났네.

“우아아악!”

“꺄아아악!”

결국 나와 카이사르는 서로 엉킨 채 계단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단에 카펫이 깔려 있었고, 계단 수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사르가 어떻게든 나를 보호하려고 필사적으로 날 끌어안아 주었다. 다쳐도 내가 아니라 카이사르가 다칠 판이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계단 끝까지 밀려 내려온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아으윽, 허리야…….”

“아우, 멀미 나……!”

우리는 동시에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렸다.

“괘, 괜찮아 헬레나?”

“난 괜찮은데, 카이사르는?”

“아, 나도 뭐.”

“정말? 나 끌어안고 있느라 많이 부딪쳤잖아? 정말 다친 데 없는 거 맞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카이사르의 형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눈이 안 보이니 손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다.

음, 일단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네. 어휴, 십년감수했다.

“팔은? 다리는? 아, 맞다. 얼굴은 어때? 멀쩡해?”

몸 이곳저곳을 살펴본 나는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의 얼굴을 덥석 잡고 가볍게 더듬었다.

음, 그런데……, 손으로 얼굴을 만지다 보니 느낌이 뭔가 미묘하네.

손끝에 닿는 오뚝한 코랑 눈썹, 눈두덩이, 말랑한 뺨과 촉촉한 입술……. 와, 어떻게 인간이 손으로만 만져도 잘생긴 게 느껴지지?

“……언제까지 만질 거야?”

“히익!”

카이사르가 말하자, 카이사르의 입술을 더듬던 내 손가락 끝에 그의 더운 숨이 달라붙었다.

의식하고 나니, 얼굴에 피가 확 몰린다.

와, 나 지금 뭐 했지? 진짜 문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미안! 어디 다친 데 없나 확인하느라고……!”

“난 됐어. 그보다 네 팔은?”

“팔? 무슨 팔?”

아, 맞다.

내 팔, 부러진 상태지, 참.

“으허, 내 팔……!”

아, 왜 말한 거야. 자각하고 나니까 눈물 나게 아프네.

나는 부러진 팔을 감싸 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계단을 구를 때의 충격으로 통증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아파?”

“으……, 좀 아파.”

“하아, 넌 정말이지.”

카이사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계단에서 떨어진 건 내 잘못이 맞긴 한데, 그렇게 따지자면 갑자기 귓가에 숨소리 섞어서 말을 건 네 잘못도 지분이 꽤 크지 않니.

‘으, 또 생각났다. 그 목소리.’

더구나 이젠 카이사르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긴장되고 신경이 쓰인단 말이다.

“아이고, 전하! 공녀님! 무슨 일이신가요!”

요란한 소리에 근처의 시종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칫.

계단에서 굴렀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야지……, 라는 나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읏차.”

“……?!”

카이사르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 녀석, 요즘 묘하게 날 품에 안아 드는 일에 재미가 들린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이봐. 가서 의사를 모셔 오도록.”

“네? 앗, 네에……!”

명령을 내리는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 탓에 시종들이 도망치듯 허둥지둥 흩어졌다.

시종들이 사라지자 카이사르가 날 안은 채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의사까지 부를 필요 없거든, 요.”

반말로 말했다가, 혹시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존댓말을 붙였다. 그게 웃겼는지, 카이사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조금 전 시종에게 명령할 때의 싸늘한 목소리는 전혀 생각이 안 날 만큼 천진한 웃음소리다.

어우, 이중인격자 같으니라고.

“나도 따돌리고 아고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 게, 혹시 계단을 굴러서 내려와 보고 싶어서였던 거야?”

뭐야, 일부러 따돌린 거 알고 있었어?

“시력이 다 회복되었다는 진단을 받을 때까지, 앞으로 헬레나는 걸어서 돌아다니는 거 금지야.”

“뭔 소리야, 그게? 그러면 어떻게 돌아다니라고?”

“이동 수단을 이용하도록.”

카이사르가 나를 추슬러 안으며 말했다.

그 이동 수단이 설마 본인을 말하는 건가? 이렇게 안고 돌아다니겠다고?

“……제멋대로야!”

“이하 동문이야.”

카이사르가 내 불만에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거 보면 우린 참 많이 닮았어. 미인이지, 검술 실력도 좋지, 성격 나쁘지. 그렇지 않아, 스승님?”

성격은 너만 나빠.

네가 제일 나빠.

내가 아는 인간들 중에 네가 제일 안 좋다고, 이 능구렁이 자식아!

나는 내지르고 싶은 비명을 꾹 참으며 카이사르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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