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고트에게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올라와 달라고 했어.”
“그럴 필요 없는데.”
“지금은 안 아파도 내일쯤 여기저기 멍들고 아플 수도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푹 쉬어.”
의사가 다녀간 후 카이사르가 내게 말했다. 의사도 괜찮다는데 걱정이 많기도 하다.
“나보다는 본인 걱정을 하는 게 낫지 않아? 날 끌어안고 굴렀잖아. 네가 더 많이 다쳤을 텐데.”
“난 앞이 보이니까 괜찮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하하.”
“……그러고 보니, 카이사르. 확실하게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말이야.”
“응?”
“나 너 좋아해.”
“……엉?”
나갈 때 문 닫고 나가, 라는 수준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나의 선언에, 곧장 얼빠진 반응이 돌아왔다.
카이사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좀 보고 싶다. 평생 놀림거리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눈썹을 으쓱하며 재차 말했다.
“너 좋아한다고.”
하, 어떠냐.
너도 내가 느꼈을 만큼의 당혹감을 한번 느껴 보라고.
“엇, 뭐라고?”
카이사르가 다시 내게 물었다. 뭐야, 그렇게까지 당황했나?
“그러니까, 내가 너 좋아한다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한 번만 더.”
“……너 지금 나 농락하는 거 맞지?”
세 번째쯤 되니 아무리 둔한 나라도 알겠다. 이 녀석, 계속 내 입에서 자길 좋아한다는 말을 하게 만들 속셈이라는걸.
“푸핫!”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카이사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찌나 얄밉던지.
잠깐이지만 녀석에게 농락당한 게 민망해져서 얼굴이 뜨거워진다.
“미안해. 그렇지만 너무 좋아서.”
카이사르가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혹시 ‘친구로서 좋아해’라든가, ‘제자로서 아끼고 있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내가 널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좋아해, 가 맞는 거지?”
“윽, 알면서 꼬치꼬치 캐묻지 마.”
카이사르를 당황하게 만들어 줄 속셈이었는데, 결국 당황하는 건 내 몫이 됐다.
별수 없잖아. 카이사르는 내게 자기 마음을 고백한 후에도 의연해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난 내 마음을 깨달은 지 얼마 안 된 초보자라고.
“하핫, 그렇지만 그 말을 이렇게 빨리 듣게 될 줄 몰랐는데.”
“그게 뭐야. 언젠가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다른 놈들한테 널 양보할 리 없잖아?”
으음, 어쩐지 독점욕 가득한 카이사르의 표정이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인데.
“뻔뻔하기는.”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 내가 만약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결국 이 녀석이었을 것 같긴 하다.
달리 내 마음을 끌 정도로 우수한 인재가 주변에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날 위해서 한 번만 더 말해 줘, 헬레나.”
카이사르가 내 귓가에 속삭여 말했다. 그렇게 소원이라는데 못 해 줄 것도 없지.
아니, 사실은 나도 더 많이 말해 주고 싶다.
신기하고, 조금은 두렵고, 간지러운 이 낯선 감정이 전혀 무료하지 않으니까.
“좋아해.”
“응, 한 번만 더.”
“카이사르, 좋아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카이사르가 사탕을 보채는 어린애처럼 내게 애정을 갈구했다.
목소리는 기쁨에 차 있지만, 한편 조금 떨렸다.
마치 나의 이 고백을 듣기 위해 지난 모든 세월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손을 뻗어 카이사르의 목덜미를 살며시 감싸 잡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제일 좋아, 카이사르.”
말로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마음이 흘러넘쳐서 숨길 수 없다.
에레즈, 미안. 나는 너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어.
하여튼, 그레이 인간들은 날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그래도,
“뭐, 살아 보니 살 만하네.”
왜 태어났는지 모를 두 번째 인생이었지만, 생각만큼 지루하진 않은 것 같다.
카이사르,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그 말이 가장 감동인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내 모든 ‘좋아해’를 집어삼키듯 내게 키스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언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의 수많은 말이, 길고도 강렬한 입맞춤을 통해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 * *
마수 토벌 후 일주일이 지나, 내 시력은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친 팔 역시, 의사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다만 북풍이 더욱 강해지자, 주변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나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시면 감기 걸려요!”
“뭐 어때? 방 안인데.”
“안 될 말씀이에요! 자, 이 옷도 입으세요! 이것도 걸치시고요! 한 벌 더 입으세요!”
옷을 두 겹 정도만 입은 채 돌아다니던 날 발견한 아고트가, 당장 나를 방에 끌고 오더니 옷을 휙휙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갈아입힌다고 해야 할지, 그냥 집히는 대로 입히고만 있는 느낌이긴 하다.
사람은 과연 몇 겹까지 껴입을 수 있는가 도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윽, 아고트 잠깐. 이건 거의 굴러가야 할 수준이잖아.”
나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뚱뚱해진 내 몸을 살펴보며 투덜댔다.
“팔이 안 굽혀져.”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는 나아요.”
“이렇게 안 해도 안 걸려.”
“아가씨는 부상을 입으셨으니까, 몸이 약해져 계실 거라고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잔병에 조심해야 해요.”
아고트가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따가 장작도 더 가져올게요. 감기에는 생강차가 좋다고 해서, 여기 메이드들에게 잔뜩 구해 뒀어요. 잠들기 전에 꼭 드세요, 아셨죠?”
“저기……, 나 아직 감기 안 걸렸거든.”
“감기는 예방이 최선이에요.”
마수 토벌 이후, 아고트는 내 시중을 드는 데 더욱 예민해졌다.
사냥 때 입은 내 부상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당연히 아고트를 탓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안 통하겠지. 결국 귀찮긴 해도 당분간은 아고트의 고집에 따라 줄 수밖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딱 한 겹만 벗으면 안 될까?”
“안 돼요.”
아고트가 내게 반항을 다 하는구나.
결국 나는 옷 벗기를 포기했다.
* * *
토벌이 끝나고 나흘 후, 적기사단의 수련병들은 모두 수도로 되돌아갔다.
다들 대장님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시위까지 벌인 모양이지만, 적기사단장인 달튼의 명령에 결국 찍소리 없이 귀환했단다.
“달튼 경이 부상 소식을 듣고 당장 내려오겠다고 난리 치는 걸 간신히 말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와 카이사르의 귀환을 도우러 내려온 로위나가, 그 특유의 사무적인 어투로 수도 소식을 내게 전해 주었다.
나는 홀의 2층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귀로는 로위나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1층 홀에서 대련 중인 카이사르와 해밀턴, 롯트에게 고정된 채였다.
‘하아, 나도 대련하고 싶다.’
검은 이제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참 답이 없구나.
한숨을 내쉰 후, 곁에 선 로위나와 대화를 이어 갔다.
“다들 내 부상이 신기한가? 왜 구경을 못 와서 난리들인지.”
그러잖아도 고작 마수 몇 마리 잡다가 방심해서 다친 거라 자존심 상해 죽겠는데, 뭐 볼 게 있다고 다들 찾아오겠다는 건지, 원.
“다들 걱정하는 거겠죠. 인망이 훌륭하시군요.”
“실력이 좋으면 숨만 쉬어도 사람이 붙죠.”
“그래도 성격이 좋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굳이 걱정까지 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도 사람은 많지 않나요?”
“……예외도 있으니까요.”
카이사르도 성격이 나쁜 건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어쨌든 귀환 일정은 사흘 후 오전 8시입니다. 아, 그리고.”
“그리고?”
“확정된 일정은 아직 없습니다만, 폐하께서 이번 일에 대한 치하로 파티를 열어 주실 것 같습니다.”
“와……, 가장 고맙지 않은 일을.”
나는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귀찮다. 그러나 기분과는 별개로, 카이사르에게 좋은 일이긴 했다.
이번 마수 토벌은 황태자 측의 업적이다. 황제가 베풀어 주는 파티이니 귀족들도 많이 참여할 것이고, 당연히 카이사르의 위신도 올라가겠지.
‘덩달아 나도.’
이번 일로 좀 더 쉽게 황성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황후 쪽에서 입이 바짝 마르겠는걸. 그건 좀 통쾌하긴 하다.
“파티 준비와 초대, 구성은 저희 쪽에서 맡을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좋아요. 일임할게요.”
“중요한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사적인 질문이 하나 있는데,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신지.”
로위나가 안경을 벗으며 나에게 물었다.
사무적인 그녀가 사적으로 궁금한 게 있다니, 오히려 내가 궁금하다.
“뭔가요?”
“전하와 사귀십니까?”
“으읍, 쿠훌럭!”
너무 놀라서 숨을 들이마시다가 사레가 걸렸다.
정작 로위나는 표정 변화 없이 날 쳐다보고 서 있어서, 새삼 그녀가 조금 무서워졌다.
‘해밀턴……!’
그 인간에게 상담하는 게 아니었는데!
“엇, 으음…….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네에. 아마.”
사귀자고 딱 잘라 말한 건 아니라서.
음, 전생 현생 통틀어 연애가 처음이라 확신을 못 하겠네.
내 기침 소리가 요란했던 탓에, 1층에 있던 사람들이 2층의 나와 로위나를 발견했다.
카이사르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날 쳐다보더니 “헬레나!” 하고 세상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앗, 내가 올라갈게!”
카이사르는 롯트와 인사를 나눈 후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해밀턴이 아니라, 저 녀석의 들뜬 태도만 보고 눈치챈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로위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사귀는 거, 맞으시네요.”
로위나가 ‘흠’ 하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런데 그건 대체 왜…….”
로위나도 그런 가십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 오히려 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로위나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지금까지는 브란테가를 견제하기 위해 공녀를 ‘황태자비 후보’로 내세우던 일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정사실로 내세워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그런 이유셨군요. 그럼 그렇지. 갑자기 정신이 확 드네.
“자세한 건 수도에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연애를 즐기세요.”
연애, 라니.
로위나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동시에 등 뒤에서 무섭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온 카이사르가 그 사나운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선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헬레나!”
이 녀석.
내 고백 이후로 스킨십에 더 거리낌 없어졌다.
“우와, 헬레나. 옷을 왜 이렇게 많이 입었어? 허리가 안 잡히는데.”
“윽, 시끄러워.”
창피해진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핀잔을 줬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핀잔에도 싱글벙글이다.
“곰 인형 같고 귀여워.”
거짓말.
“안을 때 푹신푹신해서 좋다. 계속 껴안고 있어도 돼?”
“싫어. 너 지금 땀 냄새 나.”
“아, 씻고 와야겠다. 씻고 오면 안아도 돼?”
“안 돼.”
“그냥 같이 씻을……, 큭!”
나는 카이사르가 말을 다 맺기 전에 재빨리 녀석의 턱을 쳐 올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얼굴에 열이 올라서 귀가 아프다.
“닥쳐! 이성을 지키라고!”
능구렁이가 비글로 진화할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는 말 안 했어!
내 분노에도 카이사르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내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풀 생각도 안 한다.
한마디 하고 싶은데…….
‘잘생겨서 봐준다.’
이런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도 잘생김을 유지하다니, 하여튼 대단한 놈.
한없이 물러진 나 자신의 태도에, 결국 난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