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는 벤 변경후의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밴달리움을 출발했다.
“아, 드디어 내 방 침대에 누워 잘 수 있겠구나.”
나는 푹신한 벨벳이 깔린 마차 의자에 기대며 황홀한 양 중얼거렸다.
변경후가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고는 해도, 역시 집이 최고다. 남의 집 침대는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에게 이제 내 집이라고 생각할 만한 확실한 공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웃음이 피식 나왔다.
단테 레나투스가 헬레나 페레스카의 인생을 보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할까. 나도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아가씨, 안 추우세요? 담요 하나 더 덮어 드릴까요?”
내 곁에 앉은 아고트가 내 머리맡에 쿠션을 괴어 주며 물었다.
그 질문에 맞은편에 앉은 카이사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옷을 겹겹이 올려서 헬레나를 압사시킬 작정인 건가?”
“아, 아니거든요! 아가씨가 감기 걸리시면 안 되잖아요!”
카이사르의 도발에 아고트가 금방 발끈했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왜 이 마차를 타신 거예요? 에버그린 님께서 전하의 마차를 따로 준비하셨잖아요!”
아고트의 말대로, 로위나는 이 마차에 나와 아고트만 배정했다. 아직 팔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내 기준에서는 완치나 다름없기는 했다만– 내가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본인의 크고 화려한 마차에 해밀턴만 남겨 놓고 내 마차에 올라탔다.
“전하 때문에 우리 아가씨가 푹 쉬지 못하시잖아요?”
“네가 거슬려서겠지. 어때, 헬레나? 쉬고 싶으면 언제든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도 좋아.”
카이사르가 능글맞게 웃으며 자기 허벅지를 탁탁 쳤다.
“자, 멋지지? 이거, 헬레나 거야.”
히죽 웃는 카이사르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 없다.
“아가씨, 전 허벅지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머리도 다 아가씨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영혼까지 헬레나 거야.”
“저는 전부 다요!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전부 다!”
얘들은 진짜 질리지도 않고 싸우네.
나는 두 사람에게 씩 웃어 준 후, 다치지 않은 쪽 팔로 마차 벽을 쾅 하고 내리찍었다.
그 요란한 소리에 카이사르와 아고트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나는 둘을 향해 미소 지은 표정을 유지한 채 다정하게 충고해 주었다.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뻥긋하는 녀석은 달리는 마차 문밖으로 밀어 버리겠어.”
나의 충고에 두 사람이 동시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후, 다행이군. 다정하게 말했더니 알아듣는구나.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방긋 웃어 준 후에, 아고트가 건네주었던 쿠션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그 후 내가 잠들 때까지 두 사람은 정말 찍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아, 평화롭다. 혹시 숨도 쉬지 않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고요하긴 했다만, 뭐 알 게 뭐야. 조용한 게 최고지.
나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마차가 수도의 대로변에 들어섰을 때, 나는 기분이 조금 들떠 있었다.
분주하면서도 낯익은 풍경들이 마차의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것을, 나는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고 주시했다.
‘이상하네. 수도에 처음 올라왔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모든 게 관심 밖인 나로서는, 새삼 수도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와 박히는 게 꽤나 생소한 감각이긴 했다.
카이사르도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씩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재미있다는 듯 창밖을 쳐다보고 있길래.”
나는 무슨 영문 모를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그런 내 표정에 카이사르가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방해해서 미안해. 계속 봐.”
그 말에 난 다시 차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 이후, 카이사르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게 의식되어서 도무지 차창 너머를 쳐다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얼마 안 가 한숨을 쉬며 다시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만 봐. 얼굴 뚫어지겠어.”
“이 정도로는 안 뚫어져.”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냥, 좋아서.”
카이사르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뭔가에 관심을 갖는 게 좋아 보여서.”
“우리 어머니 같은 말을 하네.”
“공작 부인뿐이겠어? 레너드도 지금 여기 있었다면 나랑 같은 기분이었을걸.”
“하여튼 그만 쳐다봐. 민망해.”
“왜 그럴까, 새삼.”
“새삼?”
“그래, 새삼.”
카이사르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으쓱했다.
“난 전에도 늘 너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그랬어?
그 말에 좀 놀랐다. 나에게 자주 치대거나 장난을 걸긴 했지만, 지금처럼 날 지그시 쳐다보는 시선 같은 건 전혀 몰랐다.
아니, 신경을 안 썼다는 게 맞나.
지금은 한번 의식하게 되니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고.
‘카이사르가 날 좋아하는 걸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게 더 놀랍다는 해밀턴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네.’
그래, 인정하자.
연애 경험 결여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난 정말 둔한 여자였구나. 끄응.
“네가 정 불편하면 눈 감고 있을게. 그럼 됐지?”
카이사르가 짓궂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그래도 입꼬리는 여전히 미소를 짓는 모양이다.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난 대체 쟤가 왜 좋은 거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후에, 난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이마를 대자, 시원한 온도에 열이 조금 내려갔다.
‘아고트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내 곁에 앉아 졸고 있는 아고트를 흘끗 쳐다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 시야 끝에, 거리에 뭉쳐 서 있는 사람들이 걸린 것은.
“……응?”
무슨 사고라도 난 건지, 부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사람이 대로 한쪽에 모여 있었다.
난 차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그곳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설마……, 저게 드라코교인가?”
내 중얼거림에, 눈을 감고 있던 카이사르도 어느새 차창 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같은 것을 확인한 카이사르가 내게 대답했다.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 역시? 한번 가 볼까?”
“으음.”
카이사르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쪽에 세워 둔 지팡이를 들어 마차 지붕 위를 세 번 두드렸다.
내 신호에 곧 마차가 멈춰 섰다. 그 흔들림에 아고트가 퍼뜩 잠에서 깨더니, ‘허으, 응? 흐응?’ 하고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고트, 마차 지키고 있어. 잠깐 다녀올게.”
“네, 네에? 아가씨 혼자 어디 가세요?”
“요 앞에 구경 나가.”
“엇, 제가 같이…….”
내가 마차 문을 열고 내리니, 아고트도 검을 쥐고는 서둘러 내 뒤를 따라오려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그런 아고트를 제지했다.
“됐어. 내가 같이 다녀올게.”
아고트는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다시 자리에 앉아 검을 놓았다.
난 그런 아고트를 확인한 후, 카이사르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몰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의 중심에선 한 젊은 여자가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전 오랫동안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용’을 믿고 몸이 다 나았습니다.”
‘간증인가.’
뭐, 종교에서 간증은 흔한 일이긴 하지.
“의사도 포기한 제 몸을, 용주님께서 만져 주신 후로 말끔하게 나았다 이 말입니다.”
“용주?”
“교주를 말하는 거겠지.”
내 물음에 카이사르가 나직이 대답했다.
“다들 용주님을 사기꾼이라 하는데, 용주님은 제 병을 고쳐 주신 후에 돈 한 푼 안 받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용께서 베푸신 은혜라 하셨죠.”
“오오, 용이시어!”
“용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으웩…….”
나는 주변 사람들의 ‘용 찬가’에 헛구역질을 했다. 정말 역겹네.
용이 사람을 살리고 은혜를 베푸는 존재라니, 말도 안 된다.
녀석들은 마을은 궤멸하고 사람을 몰살하고 금은보화를 훔쳐 간다. 뭘 빌어서 들어줄 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거다.
“용은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용의 백성입니다! 안 그런가요, 여러분?”
“옳소!”
“용이 최고지!”
여기저기서 여자의 말에 옹호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증이군.”
쯧, 하고 카이사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흘끗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혐오감과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잖아도 날카로운 인상에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뿜어 대니,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슬금슬금 우리를 피했다.
“표정 좀 풀어, 카이사르. 다들 도망치잖아.”
“내 탓만일까.”
“응?”
“헬레나 표정도 만만치 않은데.”
아, 그런가.
나도 무의식중에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이것들이 저승에 간 단테가 벌떡 일어날 소릴 하고 있으니…….
“용은 우리의 신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왕입니다!”
사람들의 호응을 받은 여자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응? 잠깐만.’
저 대사.
어디서 들어 본 기분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어디에서…….
[당신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나의 보물, 나의 신, 나의 구원자. 하나뿐인 나의 왕.]
“……헉.”
기억났다.
어릴 때, 축제에서 만난 금발 남자. 영문 모를 소리를 잔뜩 늘어놓고는, 심지어 내 앞에서 눈물까지 글썽였던 그 사람.
퍼뜩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저 미친 사람이라 여겨 금세 기억에서 지워 버린, 그날의 일이.
‘그때, 그 사람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지. 떠올려, 헬레나 페레스카. 분명히 이름을 들었어. 뭐였지? 뭐…….
‘……노에.’
그때, 거짓말처럼 내 시야에 한 남자의 모습이 포착됐다.
무리의 건너편, 검은 후드를 쓴 금발 남자. 얼핏 하얀 옆얼굴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고개를 숙일 때 녹색 눈동자가 확연하게 나의 시야에 와 닿았다.
틀림없다.
그 사람이다.
“노에!”
나는 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 나에게 쏠렸다. 나는 남자에게 가기 위해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이, 당신 뭐야! 이봐! 밀지 말라고!”
“뭐야, 이거. 귀족이잖아? 귀족이 여기 왜 있어?”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길을 터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차림을 보더니, 주변을 더욱 에워싸며 방해했을 뿐이다.
그사이 남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놓치고 보니, 그가 정말 ‘노에’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설령 그 남자가 ‘노에’가 맞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를 만나서 뭘 할 생각이었던 거지, 나는?
“어쭈, 웃기네. 곱게 자란 양반 같은데, 여길 왜 와?”
어느새 내 주변에는 기분 나쁜 인상의 남자들만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드라코교는 서민 위주의 종교다. 이 무리에 웬 귀족 여자애가 끼어 있으니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리 없다.
“어이, 이봐. 예쁘장한 아가씨. 뭐가 그렇게 바빠?”
덩치 큰 남자가 내 앞으로 나서며 희롱하듯 내게 말했다.
평소라면 그 가상한 용기에 비웃어 주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노에’라는 존재에 온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남자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엄마가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안 가르쳐? 응? 이런 데 끼어 봐야 좋은 꼴은 못 당할…….”
그러나 남자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남자의 명치를 발로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다.
“끄아악!”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카이사르는 내 어깨를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나도 ‘노에’에 팔려 있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카이사르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서민들이 우릴 둘러싸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모임을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군. 사과하지.”
카이사르가 말했다. 상당히 점잖은 목소리였지만 위압감은 상당해서, 다들 움찔하며 어깨를 떠는 게 보였다.
눈빛으로 사람들을 침묵시켜 버린 카이사르는, 그대로 내 손을 잡고 무리를 빠져나와 마차 쪽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우리를 뒤따라와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거겠지. 카이사르를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괜찮아?”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후에야, 카이사르가 내 안부를 물었다.
여전히 멍한 상태였던 나는 고개를 들어 카이사르를 쳐다봤다.
“엇, 응.”
“뭐야, 누굴 본 거야? 노에가 누구야?”
“아……, 아니야. 착각한 것 같아.”
“싱겁기는. 놀랐잖아.”
“미안해.”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 잘못 본 거다. 타이밍 좋게 금발에 녹색 눈의 사람을 발견해서 착각한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지.
그럴 것이…….
‘거의 10년이 지났는데, 그때랑 똑같은 얼굴일 리 없잖아.’
나는 가볍게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 모를 공포가 피부층 아래로 얇게 저며 드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