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바탕하고 나니 개운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이사르랑 붙을 때가 제일 스트레스 풀리긴 하네.”
황성에서 마련해 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나는 한량처럼 중얼거렸다.
상대를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는 정말 멋진 상대다.
이젠 가르치기 위한 대련이 아니라, 서로 순수하게 대결하기 위한 대련이라는 기분이 든다.
‘좀 섭섭하기도 하고.’
제자의 성장은 기쁘지만, 제자가 날 뛰어넘으면 서글퍼질 것 같다. 내 스승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음, 모르겠군. 내 스승을 떠올리면 두들겨 맞은 기억이 먼저 떠올라 버려서.
“……아, 현기증 온다. 그만 나가야지.”
너무 잡념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머리를 털고 욕조에서 일어났다.
시중을 받으며 물기를 닦고, 향유를 바르고, 훈련복이 아닌 간편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방으로 돌아오니, 뜻밖에도 방엔 토벌 때 함께했던 수련병 몇 명이 와 앉아 있었다.
“대장님!”
날 발견한 수련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사불란한 데다 각이 잡힌 반응이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검술 교관으로 오셨다는 말씀 듣고 축하드리러 왔습니다!”
“저희도 가르쳐 주시는 거 맞습니까?”
“앞으로 쭉 계시는 겁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 아니 다들 왜 이래. 부담스럽게.
“응, 뭐.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수련병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더니 여러 명이 동시에 목소리를 맞춰 내게 말했다.
“그럼 저희도 제자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으, 으응?”
엇, 갑자기?
기사단 수련병들에게는 조언이나 자세 교정 정도만 도움을 줄 생각이었는데 제자라니. 갑자기 용량 초과라고.
“제자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내가 머뭇거리자 수련병들이 다시 소리 높여 대답을 재촉했다.
와, 그러지 마라. 난 그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약하다고.
내가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때.
“다들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등 뒤에서 낮고 험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협박 같은 목소리에 수련병들이 일제히 움찔거리며 바짝 움츠러들었다. 솔직히 나도 살짝 긴장했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더니, 카이사르가 험악한 미소를 지은 채 수련병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와, 살벌하네.
쟨 왜 잘생긴 얼굴을 저렇게 살벌한 쪽으로만 쓰는 걸까.
“제자를 청할 만큼 실력에 자신 있는 모양이지? 어떤가. 나와 겨루어 목숨을 건지는 자는 내 사제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겠다.”
카이사르가 대련할 때보다 더욱 험악한 살기를 뿜으며 말했다.
어, 야, 왜 네가 그걸 허락해? 허락해도 내가 허락해야지. 물론 귀찮으니까 허락 안 할 거지만.
“물론 살아남을 자가 있을지는 의문이군.”
딸꾹. 수련병들 사이에서 누군가 딸꾹질을 했다. 응, 이해해. 지금 카이사르의 살기를 받고서 꿋꿋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장한 거니까.
‘사람 잡겠네, 아주.’
이쯤에서 말리도록 할까. 수련병들이 불쌍하니까.
“제자님.”
나는 빙긋 웃으며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카이사르가 살기를 풀고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응, 스승님.”
“제가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야 하니, 그쯤 하시고 저들을 물리시는 것이.”
애들 겁주는 거 작작 하고 그만 보내, 라는 말을 우아하게 해 봤다.
카이사르가 내 말에 싱긋 웃더니, 수련병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물러가라.”
“가,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 모르겠지만, 수련병들은 저마다 감사 인사를 하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방을 나갔다.
이제 내 제자로 들어오고 어쩌고 하는 말은 찍소리도 못하겠지. 다행인 줄 알렴. 내 제자 중에는 미친개, 아니, 늑대가 있어.
“왜 아랫사람을 겁주고 그래?”
“그러는 헬레나는, 내가 안 끼어들었으면 제자로 다 받아 줄 생각이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 이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안 돼.”
“응?”
“헬레나 제자는 우리 셋으로 끝이야.”
조금 전에 사람 죽일 듯이 살기를 뿜어 대던 인간이, 그렇게 심통 부리면 내가 귀여워할 줄 아나 보지.
‘……하긴, 얼굴은 죄가 없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이사르는 얼굴이 잘생겼다. 얼굴을 보다 보면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넌 정말 그런 유전자를 물려준 조상에게 감사하렴. 조상님이 누구신지 참 훌륭하신 분 같구나. 아, 내 친구였지.
“안 받을게. 너랑 오라버니랑 아고트로 끝이야. 자, 됐지?”
사실 카이사르의 말이 아니어도, 더 받을 여력도 없다. 귀찮다고.
그러나 내 확답을 들은 후에야 카이사르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리 와. 머리 말려 줄게.”
카이사르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나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가 앉았다.
카이사르가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려 주는 동안, 난 손 하나 까딱 않고 앉아 그저 카이사르를 관찰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우 신중하게 내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열중한 그 표정에, 나는 조금 웃었다.
* * *
오랜만에 수도의 별저에 온 아버지가 나를 서재로 따로 부르더니, 달갑지 않은 말을 했다.
“네? 황제 폐하 알현이요?”
현 황제, 즉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날 좀 보잔다.
“아, 아니, 왜요?”
내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물었더니, 아버지가 도리어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게냐?”
“제가 폐하를 딱히 뵐 일이……?”
“동도의 마수 토벌에 관하여 치하의 말씀을 내리고 싶으신 거겠지.”
“그거라면 봄에 열릴 파티로 끝난 얘기 아니었나요?”
“싫은 게냐?”
“좋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여기’에 발 들이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아버지가 다소 엄한 표정으로 내게 충고했다.
‘여기’란, 정치판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간 아버지와 상의하지 않고 내가 저질러 온 일들이 떠올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적극적으로 무언가 하는 건 매우 기쁜 일이나, 그것이 설마 정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저는……, 휩쓸렸다고나 할까…….”
이게 다 해밀턴 때문이다! 해밀턴이 자꾸 날 부추겼다고!
“헬레나, 좀 더 평화로운 삶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니?”
“어떤 삶이요? 시 낭송하고 자수 배우는 그런 삶 말인가요? 아버지는 제가 자수를 배우며 앉아 있는 모습이 상상되세요?”
“그래도 정치는 좀…….”
빈말로라도 상상된다는 말씀은 안 하시는구나. 너무하시네.
“말씀 안 드리고 함부로 휘젓고 다닌 건 죄송해요. 하지만 이젠 발 빼기 늦었어요.”
내 말에 아버지가 깊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자.”
“그게 뭐죠.”
“너는 황태자비가 될 의향이 있는 게냐?”
……엇, 나왔다.
나는 대답에 앞서 쓴웃음을 보였다.
“지금 대답해야 하나요?”
“녹트 자작이 궁금해하더군. 네가 그럴 의향이 있다면, 페레스카가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행보를 걷게 될 테니.”
카이사르를 돕기 위해 다시 수도로 올라왔지만, 애초에 아버지는 정치와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내 문제가 아니라면, 카이사르가 황제가 된 후에 다시 영지로 돌아가셨겠지.
그러나 내가 황태자비가 되면 페레스카가는 정치에서 발을 뺄 수 없게 된다.
지금 황후 뒤에 발레르가가 있듯, 내 버팀목이 되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처럼 황태자비 후보로서 브란테가를 견제하는 정도로 그칠 거냐, 아니면 정말 마음이 있는 거냐?”
황태자비라.
솔직히 전에는 별로 관심 없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인데, 직함부터 ‘귀찮은 일 가득’이라는 느낌이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다만…….
“아직 청혼을 못 받았어요.”
웃지 마라. 난 진지하다.
“주변에서는 황태자비가 되어라, 할 거냐 말 거냐 말은 많은데, 아직 그 당사자가 저한테 청혼을 안 했다고요.”
“……으음.”
아버지가 모호한 표정으로 신음하셨다.
설마 자신의 딸이 자유연애를 지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