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제를 배알하러 가는 마차 안, 나는 구두 끝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고트가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그냥 좀 긴장되어서.”
긴장? 내가?
내가 대답해 놓고도 웃음이 다 나온다. 황제 만나는 일이 뭐라고 긴장을 해? 내가?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됐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내가 실수하거나 밉보이면……, 가문에 피해가 돌아가겠지?”
지금의 나에겐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전처럼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제가 모조리 뒤엎은 후에 아가씨 데리고 도망치죠, 뭐.”
“와, 그것참 든든하네.”
“아가씨만 저희를 지키는 게 아니에요. 저희도 아가씨를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요.”
아고트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이사르는 나에게 혼자 감당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네 말대로, 나도 내 사람들을 조금 더 믿도록 해 볼까.
“고마워. 아고트 덕분에 긴장이 가셨어.”
내가 웃으며 말했더니, 아고트가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삼엄한 경비와 몇 겹의 문을 지난 뒤에야, 나는 황제가 있는 방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방문 앞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카이사르가 날 맞았다.
“어서 와, 헬레나.”
카이사르는 검은색 계통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인상이 깔끔하고 날렵하다.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정중하고 무게감이 있었다.
“전하께서도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 문 너머에 폐하만 계신 게 아니라서 말이야.”
아, 설마 황후도 있는 건가.
“적진에 헬레나를 홀로 들여보낼 수야 없지.”
카이사르가 내게만 들리게 속삭여 말했다. 그 말에 피식 실소가 나왔다.
“그러면 제 등을 전하께 맡기죠.”
“영광이군. 목숨 걸고 지키도록 하지.”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나는 카이사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게.”
방의 가장 안쪽.
금색 선으로 구분된 저쪽 편. 황후 곁에 중후한 분위기의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물어보나 마나 황제겠지.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많이 놀랐다.
‘엇, 하나도 안 닮았어?’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놀랄 정도로 카이사르와 닮은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카이사르가 에레즈와 워낙 닮았기 때문에, 황제도 당연히 에레즈와 닮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레이가의 우성 유전자……, 사람 가리는 건가.’
카이사르, 넌 괜찮은 조합으로 잘 태어난 거구나.
“페레스카의 딸, 헬레나 페레스카.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인사는 해야지.
나는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인사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앞을 보니, 황후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편히 앉게. 그저 사담이나 나눌까 하여 불렀으니.”
나는 싱긋 웃으며 준비된 자리에 앉았고, 카이사르도 간단히 인사한 후 내 곁에 앉았다.
‘사담하러 불렀다면서, 이렇게 멀리 앉아서야.’
나는 멀리 앉은 황제 쪽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하긴, 공작가의 여식과 무슨 공통된 화제가 있다고 사담을 나누러 불렀겠는가. 그냥 하는 소리지.
“밴달리움에서 있었던 그대의 활약은 빠짐없이 전해 들었네. 황가에서 미처 돌보지 못한 일을 해결해 주다니, 그대의 공이 크군.”
“페레스카는 폐하의 충신이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황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대가 황태자에게 검을 가르친다는 이야기 역시 익히 들었다. 그 실력이 참으로 궁금하구나.”
“제 검은 폐하의 위업을 위해 쓰이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부르시면 지체 없이 달려오겠습니다.”
“하핫, 내 이토록 든든하고 호쾌한 이를 사내 중에서도 본 바 없다. 아니 그렇소, 황후?”
황제가 황후에게 동의를 구했다. 황후가 우아하고도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말에 화답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폐하. 공녀의 재주가 많고도 뛰어나니, 심려가 들 정도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이 칭찬 같은데 칭찬이 아니다. 카이사르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 황후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심려되십니까.”
“공녀를 칭송하는 무리가 많더군요. 이는 오히려 폐하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황제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렇게 풀어져 있지 말고, 날 좀 경계하라고.
카이사르가 황후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가 차갑고도 냉정하게 웃으면 어쩐지 낯설어진다.
“폐하의 치세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누라니요. 연세 지긋하신 분이 그리 젊은 영애들을 고까워하시면 보기 안 좋습니다.”
와, 직구네.
반면 황후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 긁는 게 특기이고 말이다.
“고깝다니요.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황태자야말로, 공녀를 감싸고 돌기만 하니 판단력이 흐려지신 게 아닙니까?”
“아, 혹시 다들 알아보지 못한 이 우수한 인재를 황성으로 불러들인 제 판단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날 소재로 싸우지 마라. 지금 되게 불편하니까.
“이런, 황태자는 마치 제가 공녀를 질투라도 하는 양 말하는군요. 공녀가 우수한 인재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슬슬 불편해지니, 황후가 한 걸음 물러서듯 말했다.
“폐하, 공녀의 공이 여느 귀족들보다 큽니다. 파티만으로는 너무 약소합니다.”
“그런가. 그럼 황후가 보기에 적절한 상은 무엇인 것 같소.”
“봉토를 하사하고 작위를 내리심이 어떠신지요. 마수를 토벌하는 재주가 높으니, 변경작을 내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잠깐. 이 여자, 날 아예 변경으로 보내 버릴 작정이야?!
“폐하를 향한 충심이 깊으니, 공녀도 분명 거절하지 않겠지요?”
까라면 까, 이건가.
날 치워 버리려 하다니, 어지간히 내가 신경 쓰이긴 한 모양이다.
“마마, 봉작의 권위는 오로지 폐하만의 것입니다.”
그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카이사르가 황후에게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 말에는 황후도 조금 움찔하며, 눈웃음을 짓고 있던 눈이 동그래졌다.
“그저 의견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압니다. 다만 말 많은 자들이 마마께서 폐하의 권위를 넘본다고 수군거릴까 저어되는군요.”
황후는 대답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황제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친교를 위한 자리입니다. 논할 주제가 아닙니다, 폐하. 더구나 공녀는 제 검술 스승입니다. 제 곁에서 멀리 보내는 건 옳지 않습니다.”
잘한다, 잘한다! 내 제자 잘한다!
카이사르의 표정이며 말투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이 자리에 카이사르가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황태자의 말이 옳다. 이 자리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니로군.”
황제는 카이사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네요. 제가 마음이 앞섰습니다, 폐하.”
이쯤 되니 황후도 고집 피우지 않고 뜻을 굽혔다. 치고 빠지는 때를 참 잘 아는 여자다.
‘적진, 맞네.’
나는 문 앞에서 카이사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이렇게 불편한 티타임은 생전 처음이다.
차라리 마수 100마리를 토벌하는 게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