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레스카 공녀.”
황제 알현을 마치고 카이사르와 복도를 걷고 있는데, 멀리서 황후가 나를 불러 세웠다.
황후가 다가오자 카이사르가 날 보호하려는 듯 슬그머니 내 곁에 와서 바짝 붙었다.
나는 살기를 감추지 않는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본 후,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황후마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혹시 내가 노파심에 한 말에 마음 쓰는 건 아니겠죠?”
황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카이사르의 살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절 걱정해 주시는 마음,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니 기쁘네요. 누구와 다르게.”
그 말을 하며 황후가 카이사르를 향해 빙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사르가 협박하듯 웃으며 대꾸했다.
“저 역시 마마의 평판을 염려하여 드린 말씀이라는 걸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이죠. 이 어미를 생각해 주는 이가 황태자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하긴, ‘생각’이야 많이 하겠지. 항상 생각하고 경계하는 중일 테니.
“언제 한번 내 처소에 오세요, 공녀. 아들의 스승인데, 어미 된 자로서 대접을 해야죠.”
“기쁘게 받겠습니다, 마마.”
“황태자도 같이 오세요. 실은 브란테 영애가 황태자의 귀환 소식을 듣고 안부가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답니다.”
아…….
율리카 말이지.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꽤 됐네.
“브란테 영애가 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한번 찾아뵙지요.”
카이사르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소녀의 부끄러움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황태자.”
“나무라긴요. 제가 브란테 영애를 나무랄 일이 뭐 있겠습니까. 딱히 친분도 없는 사람을.”
정말 칼같이 자르는구나.
황후가 반박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황후가 먼저 복도를 떠나고, 나와 카이사르는 남겨졌다.
“율리카……, 요즘 뭐 하고 지내려나.”
황후가 떠난 곳을 응시하다가 나는 무심결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말에 카이사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카 브란테가 대체 왜 궁금하지, 내 스승님은?”
“아, 죄송합니다.”
브란테는 황후 측 사람이니 카이사르에겐 적이다. 관심을 보이면 당연히 싫겠지.
그러나 카이사르가 싫은 이유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남자들 견제하는 건 차라리 쉬운데, 네가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
“하아, 아고트만으로 충분한데, 율리카 브란테까지 경계해야 하나?”
“뭔가요? 설마 질투?”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말고 다른 것에 관심 가지는데, 당연하지.”
얘는 좋아한다는 말을 뭐 이렇게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거지.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카이사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고트의 말이 맞았네.’
날 독점하려는 시커먼 속내가 보인다고 할까. 하다 하다 동성을 상대로 질투할 줄이야.
뭐, 싫지는 않지만.
“그럼 사과의 의미로, 공작저에서 저녁 식사 하시겠어요?”
창피함을 참고 그렇게 제안해 보았다.
카이사르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기뻐했다. 조금 전까지 살 떨리는 살기를 내뿜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혹시 헬레나가 직접 만들어 주는 건가?”
“저, 요리 못 합니다.”
“괜찮아. 헬레나가 주는 것이라면 독극물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
카이사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담일 것이다.
나는 카이사르의 각오에 감격하여, 카이사르의 팔을 찰싹 때려 주었다. 하여튼, 얄미운 자식.
* * *
날이 풀린 어느 날, 나는 아고트와 함께 서점에 나갔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책과 잉크 냄새가 나를 반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법 서적을 모아 둔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앗, 아가씨. 검술 서적은 이쪽이에요.”
아고트가 날 향해 다급히 설명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검술 서적 사러 온 거 아냐.”
“네?”
아고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내 뒤를 총총 따라왔다.
“무슨 책 사시려고요?”
“마법.”
“하지만 아가씨, 마법은 전혀 못 하시잖아요.”
“요즘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긴 해?”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더니 아고트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500년 전에는 강력한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법사의 수가 줄었다. 있다고 해도 모자에서 비둘기나 꺼내는 수준이다.
지금 마법은 ‘학문’의 영역에 불과하다. 나야 그때도 지금도 마법과는 연이 없는 인생이긴 하지만.
“마법도 공부하고 싶어지신 거예요?”
“아니, 어떤 사람에게 선물할까 하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마법 서적을 모아 둔 책장 앞에 서서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음,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게요…….”
마법에 대해 뭘 알아야 책을 고를 텐데,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결국 나와 아고트는 책장 앞에 비석처럼 서 있을 뿐, 어느 책 하나 꺼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책장 건너편에 웬 영애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건너편도 마법 서적이 있는 코너였으니,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알 만한 사람에게 추천을 받으면 되겠다.’
나는 재빠르게 건너편 책장으로 넘어가, 커다란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영애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제가 마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책을 추천받을 수 있을까요?”
“추천이요? ……허억!”
“엇?”
내 질문에 고개를 든 사람은 율리카였다.
율리카는 나를 보자마자 그 새초롬한 표정을 순식간에 노골적으로 일그러뜨렸다.
“와아, 브란테 영애. 오랜만에 뵙네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율리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연도 참 기가 막히네. 율리카에게 줄 책을 사러 나왔는데, 그 당사자를 만나게 되다니.
“아……, 아하하. 네. 안녕하세요, 공녀. 참 우연이네요.”
율리카가 한쪽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미소를 지은 채 옆으로 시선을 쓱 피했다.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폼이 꽤나 방어적이다.
“책을 구입하러 오신 건가요?”
“그럼 서점에 왜 왔겠어요?”
자세는 방어적인데 말투는 공격적이군.
“그렇군요. 잘됐네요. 영애가 마음에 드는 책이 뭔지 추천받아도 될까요?”
“글쎄요. 서점 직원을 부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영애는 마법에 대해 잘 아시니, 영애의 추천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제야 율리카가 다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을 해 주니 조금은 마음이 동한 모양이다.
“뭐……, 제가 마법에 대한 지식이 매우 우수하긴 하죠.”
율리카가 새초롬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쉬운 녀석.
“여기 있는 책이 가장 신간인데, 학자들 사이에서 평이 좋아요. 뭐, 공녀께서 읽고 이해나 하실는지 모르겠지만요.”
율리카가 책 한 권을 뽑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책은 꽤 크고 묵직해서 무기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영애는 이미 구입하셨나요?”
“오늘 구입할 생각으로 나온 거예요.”
“그렇군요. 잘됐네요.”
“네? ……엇, 잠, 잠깐만요! 공녀!”
나는 율리카의 손을 잡고 카운터로 향했다. 율리카가 쩔쩔매며 내 손에 잡혀 질질 끌려왔다.
나는 곧장 그 책을 계산했다. 그리고 리본으로 예쁘게 묶어 달라는 주문도 빼먹지 않았다.
“저기요,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죠?”
곁에 선 율리카가 꽥 소리를 쳤지만, 난 그런 율리카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아, 실례했어요. 하지만 5분만 기다려 주지 않겠어요?”
“아니, 도대체……!”
“여기, 끝났습니다. 손님.”
다행히 율리카가 더 크게 화내기 전에 책의 포장이 끝났다. 책이 담긴 종이봉투의 윗부분이 두 겹의 리본으로 예쁘게 묶여 있어 꼭 사탕 봉지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율리카에게 건넸다.
“자요. 선물이에요, 영애.”
“……?”
율리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수작이죠?”
“수작, 좋네요. 수작 걸면 받아 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율리카의 품에 책을 안겨 주었다. 율리카가 떠밀리듯 내가 준 선물을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떨떠름한 표정을 향하여 방긋 웃어 준 후 말했다.
“영애, 저와 데이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