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58/156)

* * *

정치적인 입장을 제외하면 난 율리카 브란테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다.

오히려 마음이 쓰인다. 정치판 위에서 여성이라는 말의 쓰임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 드세요. 제가 사는 거니까.”

해밀턴과 즐겨 찾던 도시의 레스토랑.

율리카는 빙긋 웃으며 차를 권하는 나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참고로 가게 밖에서는 율리카의 몸종과 아고트가 서로 으르렁대며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죠?”

결국 율리카가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차 한번 같이 마시는 게 뭐 그리 어렵나요?”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낫지, 이렇게 얼굴 맞대고 즐겁게 담소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못 할 건 뭐겠어요.”

“이봐요, 페레스카 공녀.”

“자, 웃어요, 영애.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다들 쳐다보잖아요?”

내 말에 율리카가 그제야 ‘헛’ 하고 주변을 살폈다.

식사 시간과 미묘하게 어긋난 시각이라 식당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얼마 없는 그들 대부분이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자 측의 페레스카와 황후 측의 브란테가 어떤 사이인지, 그리고 나와 율리카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율리카는 날 향해 고개를 내밀며 인상을 썼다.

“애초에 공녀가 날 여기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잖아요?”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만나는 게 나을 뻔했나요? 저, 좀 위험한 사람인데.”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더니 율리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못한다. 이목이 집중되는 이 상황에, 그들에게 괜한 얘깃거리를 던져 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여튼,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하세요. 전 이 식당을 나서면 당장 돌아가겠어요.”

내가 정 싫으면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면 될 텐데, 또 기어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그것이 귀족 영애로서의 품위라 생각하는 거겠지.

“좋아요. 길게 말 안 할게요. 영애의 마법적인 지식을 빌리고 싶어요.”

“마법이요?”

전혀 뜻밖의 용건이었는지, 율리카가 미간을 찡그렸다. 싫다기보다는 호기심이 동한 눈빛이었다.

나는 가지고 온 종이를 율리카에게 쓱 내밀었다.

율리카가 종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야생동물을 만지는 듯한 손놀림으로 조심스레 종이를 집어 펼쳤다.

“……이건 뭐죠?”

“모르겠어요.”

“네?”

“전혀 몰라서 영애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떤 마법인지 알고 싶어서요.”

종이에는 마수 몸에서 발견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벤 변경후가 이미 마법학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율리카는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빛에 비춰 보고 하더니, 그들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모르겠는걸요. 이거, 마법과 관련 있는 그림이 맞긴 하나요?”

“글쎄요. 일단 마법진같이 생겨서 물어보는 건데.”

“하지만 여기 적힌 문자는 룬어가 아니에요. 마법일 리 없어요.”

“룬어가 아니면 마법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하나요?”

“거의, 그렇죠.”

율리카가 ‘거의’라는 말끝에 한 박자 쉼표를 넣으며 말했다. 난 그걸 놓치지 않았다.

“거의?”

“가장 처음의 마법은 다른 언어였어요. 룬어는 인간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언어니까요.”

“그 ‘다른 언어’라는 건 뭐죠?”

“알 수 없죠. 전승되는 자료도, 기록도 없으니까요. 그냥 ‘그런 게 있었다’라는 게 전부예요.”

그러면 역시 마법이 아닌 건가.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이제 어디에서 단서를 찾아야 할지.

그때 내가 다시 회수해 가려는 종이를 율리카가 잡았다.

“혹시 괜찮다면 이 종이, 빌려주실 수 있나요?”

“상관은 없는데, 왜죠?”

“그냥……, 호기심에요. 좀 더 알아보고 싶기도 하고.”

벤 변경후의 집에는 마수 가죽 견본이 남아 있다. 문양을 확인하는 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

내가 쥐고 있어 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나는 흔쾌히 율리카에게 종이를 건넸다.

“대신 뭔가 알아내면 제게 알려 주세요.”

“알겠어요. ……내키진 않지만.”

용건이 끝나자 대화가 뚝 끊겼다. 율리카는 고집스럽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한 조각 입에 가져갔다.

케이크가 맛있었는지, 잔뜩 구겨져 있던 율리카의 미간이 펴졌다. 토끼처럼 뜬 동그란 눈에 웃음이 터졌다.

“이러고 보니, 우리 꽤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율리카가 대번에 표정을 굳히더니 포크를 탁 하고 내려놓는다.

이런, 그냥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을걸.

“나를 모욕하고 싶으신 거군요.”

“저런, 오해예요, 영애.”

“전하의 눈에 좀 드셨다고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황태자비 자리는 브란테가의 것이니까.”

율리카의 말투가 결연했다.

참 이상한 말이다. 황태자비 자리가 ‘자신’의 것도 아닌 ‘가문’의 것이라 말한다.

자고로 정치란 그런 것이나, 그녀는 자신이 한낱 가문의 도구가 되어 버려도 정말 괜찮은 건가.

“전하의 마음은 제쳐 두고 우리끼리 얘기해 봐야 소용없지 않나요?”

“순진한 말씀을 하시네요, 공녀. 황가의 혼약에 마음 같은 게 왜 필요하죠?”

율리카가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혹시 전하께 반하기라도 하셨나요? 웃기는군요. 전하는 당신이 ‘페레스카’이기 때문에 잘해 주는 것뿐이에요.”

율리카는 진심으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면 영애는 좋아하지도 않는데 전하와 혼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내 미간이 저도 모르게 슬쩍 찌푸려졌다.

“공녀, 전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율리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황태자가 된 이가 카이사르 전하가 아닌 다른 이였어도, 전 그분과 혼인했을 거예요. 설령 그게 아직 어리신 프란 황자님이라고 해도.”

나는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황후의 아들을 떠올렸다.

애초에 제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 생각이었으니, 그 계획이 성공했다면 율리카는 그 아이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여자가 뭔지도 모를, 한참 어린 핏덩이와 말이다.

“가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 희생해도 괜찮다는 건가요?”

“많은 귀족 영애들이 이런 삶을 살아요. 더구나 전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어째서 희생이죠?”

율리카는 크게 모욕받은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직 자신이 단 한 번도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문을 위해 살 필요는 없어요, 영애.”

“그런 말로 날 포기시키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없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럼 묻겠는데, 여자인 제가 가문의 비호를 벗어나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 같나요?”

그 말에.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여성이 단테 레나투스 같은 삶을 살 순 없다. 그건 그저, 단 한 번의 커다란 기적이었을 뿐.

“공녀는 참 좋겠어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걸 손쉽게 손에 넣죠. 놀랄 만한 재주에, 전하의 관심에, 사람들의 환대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율리카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날 동정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동정하지 않았어요.”

“아뇨, 동정했어요.”

동정했다.

카이사르의 사랑을 얻지 못할 거면서도 황태자비에 집착하는 것을 가엾게 생각했다.

그래서 밉지 않았던 거다. 내 적임을 알면서도, 내게 얄미운 짓을 하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결국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니까.

안됐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역겹네요.”

그 말이 그 어떤 말보다 내게 비수처럼 꽂혔다.

미안한 짓을 했다. 무례한 일을 했다.

“책, 고맙게 받을게요. 오늘 반가웠어요, 페레스카 공녀.”

율리카는 겨우 한 입 떼어 먹은 케이크를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자리,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율리카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실수했다.

나는 그녀의 노력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비웃은 거다.

“……바보 헬레나.”

식어 가는 찻잔 앞에 홀로 앉아,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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