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59/156)

* * *

새해가 밝았다.

스물세 살이 된 레너드는 적기사단 부단장으로 입단했다.

달튼 단장은 한동안 입이 귀에 걸린 채, 황성에서 잡히는 사람마다 레너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물론 나도 그랬다.

“우리 오라버니, 기사단복이 정말 잘 어울리지 않았나요?”

나는 검을 가르치러 갈 때마다 카이사르에게 레너드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카이사르는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제로 달튼 단장이 보이면 도망 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관의 말이 맞습니다! 참으로 듬직한 사내이지요! 이 제국에 그만큼 훌륭한 사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와 달튼이 함께 있을 땐 차마 도망도 가지 못한다.

적기사단 단장실.

나와 달튼, 그리고 카이사르는 사이좋게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레너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주로 떠드는 건 나와 달튼 둘뿐이고, 카이사르는 독극물을 마시는 표정으로 묵묵히 차만 마실 뿐이었지만.

“충성 서약 할 때도 정말 멋졌죠?”

“그럼요! 목소리 한 번 떨리지 않았지요! 교관의 오라비는 참으로 담대한 성격이올시다!”

“뭘 좀 아시네요, 단장님!”

“크으, 말이 통하니 참으로 좋소, 교관!”

달튼과 내가 손을 짝 하고 마주쳤더니, 카이사르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어, 스승님.”

“네? 싫은데요? 전 아직 달튼 경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 반박에 달튼이 ‘우오오’ 하며 흥미진진하다는 양 내 쪽을 쳐다보았다.

이 황성에서 카이사르의 말에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은 나밖에 없다는 걸, 나는 꽤 최근에야 알게 됐다.

더구나 반박하는 말에 카이사르가 화내지 않는 이 역시 내가 유일하다는 것도.

“둘 다 두 시간째 레너드의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어머, 두 시간밖에 안 되었나요? 소소하네요.”

“헬레나…….”

카이사르가 질렸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결국 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알았는지, 카이사르의 타깃이 달튼으로 변경됐다.

“그러고 보니 달튼 경, 변경 지역에서 군사 훈련 요청이 들어왔는데, 출장 가고 싶지 않나?”

그리고 나는 보았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가 한밤중의 맹수처럼 안광을 번뜩이는 것을.

“어이쿠……, 생각해 보니 단원들 훈련을 확인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덩치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큰 달튼이지만, 카이사르의 눈빛 한 번에 깨갱하고 꼬리를 내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두 분, 살펴 가십시오. 저는 먼저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방을 빠져나갔다.

결국 단장실에는 단장 없이 손님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아니 이게 뭐람.

달튼이 나간 후, 나는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켰다.

“뭐야, 한창 재미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오라버니가 잘된 게 기쁘지 않은 거야?”

“기쁘지. 네가 일주일째 레너드 찬양만 하기 전까지는 그랬지.”

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나.

하긴, 근래 카이사르를 만날 때마다 레너드 얘기만 하긴 했지. 확실히 카이사르도 처음엔 웃으며 들어 줬고 말이다.

갑자기 좀 미안해지네.

“물론 너희 남매가 얼마나 팔불출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팔불출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비록 레너드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레너드 자랑을 좀 과하게 하긴 했지만. 레너드가 세상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좀 과하긴 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레너드는 나에게, 형제란 서로 죽고 죽이려 드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준 존재다. 세상 모두가 내게 등 돌려도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사람이라고.

“내가 검투 대회에서 우승할 땐 잔소리만 하더니.”

“그땐 그럴 사정이 있었잖아.”

“나도 황태자 때려치우고 기사단에나 입단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릴.”

내 핀잔에 카이사르가 경쾌하게 웃었다.

“칭찬받으려고 황제가 되려는 건데, 나한테는 영 칭찬이 박하다니까, 우리 스승님은.”

그런 가벼운 이유로 황제가 되어도 괜찮은 거냐고.

“뭐, 그러면 오라버니는 생각도 안 날 만큼 날 즐겁게 해 줘 보든가.”

“세상만사 다 귀찮고 무료한 스승님에게 즐거워할 만한 일이라니, 너무 어려운 과제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이사르는 꽤 즐거워 보였다. 이미 그게 뭔지 다 알고 있고, 준비해 두고 있는 것처럼.

“내 방에 사탕달당 제과점의 신년 한정 초콜릿이 있는데, 어때? 마음이 좀 동해?”

“헉, 그거 예약 다 차서 구입 못 한 건데!”

“그래, 아고트에게 들었어.”

“어떻게 한 거야?”

“그 얘기 듣고 셰프를 황성으로 불렀어.”

뭐야, 그거. 권력 남용 아니야? 그래도 괜찮은 거냐고.

“와, 뭔가 얄미워.”

“그래서 싫어?”

카이사르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웃는다.

뭐, 이번만 봐주도록 하자.

“아니, 좋아.”

나는 방긋 웃으며 카이사르의 목에 매달렸다. 카이사르가 그런 날 꽉 안으며 말했다.

“와하하, 매일 초콜릿 100상자씩 사 주고 싶다.”

아, 목소리가 달다.

나는 카이사르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키득거리며 한참 웃었다.

* * *

봄, 나에게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이벤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파티.

황명으로 열리는 파티라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이 장난 아닌데, 심지어 내가 주역이다. 맙소사.

더구나 이런 이벤트가 열리면 꼭 나를 찾아와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다.

로위나 에버그린 말이다.

“무조건 브란테 영애보다 아름다우셔야 합니다.”

어느 아침, 여지없이 저택을 방문한 로위나는 감정 표현이 극히 드문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후가 제국 제일가는 의상 디자이너며 춤 선생들을 섭외해 브란테가에 보냈더군요. 저희가 한발 늦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치욕스러워하는 로위나에게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뭐야, 그게. 춤 선생까지 보냈대? 얘기만 들어도 귀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위로는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로위나를 자극한 듯싶다.

“무슨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녀! 그런 약한 마음으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실 수 없습니다!”

로위나가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날 질책했다.

전생과 현생 다 포함하여 살면서 나약하다는 말 처음 들어 본다. 이럴 수가. 내가 참여해야 하는 게 파티가 아니라 전쟁이었나?

“비록 유명 디자이너들을 전부 황후에게 빼앗겼지만, 걱정 마세요, 공녀. 수소문한 끝에 요즘 뜨고 있는 신인들을 섭외해 왔으니까요.”

지금껏 들은 말 중에 가장 걱정된다.

로위나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유명한 이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고전적인 취향만 고집하죠. 자고로 황태자비란 유행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선도해야 하지 않겠어요?”

유행, 그거 뭔데. 따라가 본 적도 없는 것을 왜 갑자기 선도하라고 하는 건데.

“로위나……, 혹시 브란테가에 빌려주고 못 받은 돈 있어요?”

내가 반쯤 농담 삼아 물었다. 즉, 반쯤은 진담이란 의미다.

브란테가의 일에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다.

로위나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는지, 다소 수줍어하며 괜히 안경을 고쳐 썼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좀 흥분했네요.”

“정말 브란테가랑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굳이 무슨 일이 있다면 황후와 있었던 거겠죠.”

“그래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내가 가볍게 질문했다.

로위나는 내 질문에 일단 한숨을 내쉬었다. 싫은 일을 기억해야 한다는 듯,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아주 오래전, 발레르가에서 제 가문을 멸문시켰습니다.”

……으음.

묻지 말걸.

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진짜 난감하다.

해밀턴! 내가 말실수할 수도 있을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건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잖아!

“모든 걸 포기했을 때, 아무것도 아닌 절 전하께서 거두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늘 공녀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아니라 저에게 말인가요?”

이상한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했다.

내 질문에 로위나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공녀께서 아고트 양을 거두어 주셨듯, 전하께서는 절 거두어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로위나와 알게 된 건 아고트를 공작저에 들인 후의 일이다.

에버그린이라는 성은 들어 본 적이 없고, 로위나는 황태자 측근으로 있기엔 상당히 젊었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실력이 있다면 과거도 신분도 상관없다. 스승께서 그렇게 본을 보이셨으므로, 그것을 따를 뿐이다. 그러니 내 곁에서 네 실력을 증명해라. 전하께서는 제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정말 뜻밖이다.

카이사르는 아고트와 사이가 나쁘다.

물론 반쯤은 장난이다. 이젠 서로 애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때로는 죽이 잘 맞을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실은 아고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그분은 공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의지하고 계시니까요.”

로위나의 시선이 따뜻했다.

그녀는 전심(全心)으로 카이사르에게 충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 아고트가 나에게 하듯이.

나도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멋진 사람이죠, 카이사르.”

“네, 정말 그렇습니다.”

자랑하듯 하는 내 말에 로위나가 긍정해 주었다.

내가 칭찬받은 것처럼 기쁘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멋진 사람이라는 걸, 그를 무서워하는 다른 이들도 알게 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연유로.”

훈훈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로위나가, 다시 미소를 지우고 안경을 고쳐 썼다.

“제 자존심과 복수심을 위해서라도, 황후 측 사람들에게는 결단코 밀릴 수 없습니다. 공녀, 귀찮아하시지만 말고 분발해 주세요.”

“윽……!”

잠깐만.

결국 난 로위나의 복수극에 이용당하고 있는 건가?

피할 수 없는 일에, 결국 나는 마음속으로 들리지 않을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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