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1/156)

* * *

얼마 후,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중년의 구귀족들과 눈도장을 찍으며 인사를 나누던 나는, 그 술렁임에 이끌려 고갤 돌렸다.

‘헉.’

소란의 중심엔 카이사르가 서 있었다. 싸늘한 무표정으로 그저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저 옷 뭐야.’

더불어, 나는 율리카와 내 의상이 왜 세트처럼 잘 어울렸는가를 깨달았다.

카이사르는 새까만 제복에 견장에는 금색 장식이 달린 의상을 입고 있었다. 칠흑 같은 색 중에 새빨간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져, 정말 한 마리의 고고한 맹수 같았다.

‘우리 둘 다 카이사르의 의상에 맞춘 거구나.’

과연. 나를 어둠의 여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로위나의 큰 그림이었던가.

허공에서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로위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공녀.”

장내를 둘러보던 카이사르가 날 발견하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워어, 오지 마. 너랑 나랑 나란히 서 있으면 영락없이 어둠의 여왕과 밤의 마왕 같다고. 악의 소굴이란 말이다.

‘그나저나, 카이사르가 이렇게 컸던가?’

어지간한 사람과는 내뿜는 압도력이 다르다.

그야말로 지배자의 등장이다.

“오늘은 공녀를 위한 밤이로군요. 아름다움에 눈이 멀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전하의 눈이 되어 드려야겠습니다.”

“공녀를 내 곁에 매어 둘 수 있다면, 빛을 잃어도 기쁠 텐데 말입니다.”

카이사르가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변 귀족들은 사나운 늑대처럼 보이는 황태자의 미소에 뜨악한 표정이 됐다. 저 인간이 저럴 인간이 아닌데, 하는 거겠지.

바보 같은 사람들. 이 늑대가 사실은 말 잘 듣는 대형견인 줄도 모르고.

“공녀, 오늘은…….”

“전하, 늦으셨습니다.”

카이사르의 눈빛이 한껏 풀어진 그때.

금발의 중년 남성이 카이사르의 곁에 다가왔다. 남성의 곁엔 율리카도 함께였다.

남자의 등장에 카이사르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브란테 백작.”

이 사람이 브란테 변경백?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이럴 수가. 저렇게 고지식하고 냉담해 보이는 사람한테서 어떻게 맹해 보이는 율리카가 태어났지?

“뵐수록 늠름해지시는군요. 그나저나 작년 솔즈베리에서의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아……, 예. 백작의 도움이 컸다고 폐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사르의 일을 브란테 변경백이 뒤에서 도운 건가.’

카이사르가 도와 달라고 청했을 리는 없다. 하물며 변경백도 카이사르 좋자고 한 일은 아닐 테지.

“백작의 수고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사 듣자고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폐하와 제국을 위할 뿐이지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럼 생색내며 묻지를 말았어야지, 이 영감탱이.

“그보다 전하. 제 딸아이가 요즘 피아노를 제법 합니다만,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글쎄요.”

카이사르가 쓰게 웃으며 율리카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율리카가 황급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공녀의 위업을 축하하고 싶다며 밤낮으로 연습을 하더군요. 애가 참, 이렇게나 순진하고 여립니다.”

순진? 여려? 누가?

“공녀, 제 딸아이의 미력한 재주를 기쁘게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절 위한 것이라 하니,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내 반응에 브란테 백작이 고갤 살짝 쳐들고 웃었다.

“율리카, 뭘 하느냐.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들려드리거라.”

“네? 아……, 네, 넵!”

“자, 그럼 함께 가시죠, 전하. 이쪽으로.”

브란테 백작이 능숙하게 날 등지며 카이사르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데리고 피아노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여러분, 같이 가시죠.”

백작의 부추김에 장내 사람들이 하나둘 피아노 근처로 총총 몰려갔다.

아무도 챙겨 주지 않은 나만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 뭔데. 날 위해 치는 거라며.

‘……귀찮았는데 잘 됐지, 뭐.’

장내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창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창밖은 새까맸다.

‘후원에 잠시 피해 있을까.’

곧이어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나는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후원은 어두웠다.

아득하게 율리카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가 들려오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브란테, 강하네…….”

아직 여물지 않은 잔디를 밟고 걸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폐하를 들먹거리며 ‘내가 널 도왔다’는 걸 어필하다니. 카이사르가 거절하면 폐하까지 싸잡아 무례한 사람이 됐을 거다.

일단은 브란테 변경백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알긴 알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은 좋지 않군.

카이사르, 이 나쁜 놈아.

한참을 헤매며 걷다 보니 정원 가장 안쪽의 정자에 도착했다. 나는 텅 빈 정자에 홀로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날 위해 준비했다던 율리카의 피아노 연주는 경쾌한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벌레의 울음소리와 섞여, 음악 소리는 경쾌한데도 어딘가 서글펐다.

뭘까, 이 공허함은.

“카이사르……, 열심히 장단 맞춰 주고 있을까.”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같이 나란히 앉아 연탄곡이라도 치고 있을까? 피아노 칠 줄은 알던가? 아니면 연주에 맞춰 노래라도 부를까?

“꽤 어울렸단 말이지. 얄밉게도.”

나와 카이사르도 한 세트 같았겠지만, 그 두 사람도 정말 잘 어울렸다. 작정하고 노린 거니까 당연하긴 하다.

율리카는 내게,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마음이 왜 필요하느냐 물었었다.

그 말을, 오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카이사르는 율리카한테도 웃어 줄까.”

나를 향하여 소년처럼 웃던 카이사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내게 그렇게 웃었다. 다정하게 바라보고, 상냥하게 말을 걸고, 부드럽게 안아 줬다.

모두 나에게만 허락된 것이구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조금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율리카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그 애도 알게 되는 건가?”

한 번 떠오르니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율리카에게 친절한 카이사르.

율리카에게 다정한 카이사르.

율리카에게 상냥한 카이사르.

율리카에게…….

“헬레나.”

웅크리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어 보니, 후원의 어둠 속에서 카이사르가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서둘러 뛰어온 것인지 호흡이 거칠어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카이사르.”

그 순간, 나는 거짓말처럼 안도했다.

그가 율리카가 아닌 나에게 왔다는 것이 소름 끼칠 만큼 기쁘고 안심이 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사람을 이기적이고 유치하게 만들 줄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다 가지고 싶어.’

조금도 뺏기고 싶지 않다. 나눠 갖고 싶지 않다.

그는 다 내 것이니까.

“와서, 나 안아 줄래?”

내가 웃으며 팔을 벌렸다. 카이사르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안았다.

나를 부서질 듯 안은 그의 품 안에서, 나는 기묘한 희열과 만족감을 느꼈다.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점점 더 욕심이 생긴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된다.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해도 기꺼이 고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이사르를 위해서라면.

“네가 날 망치고 있나 봐. 내 감정을 내 맘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됐어.”

나는 카이사르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투덜거렸다. 내 불만에 카이사르가 작게 웃었다.

“그런 거라면, 난 진작 네가 다 망가뜨렸어.”

“더 망가져도 돼, 카이사르.”

그건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을 테니까.

아득한 피아노 소리도, 열띤 그의 체온도, 밤공기도, 그의 품도.

그리고 수만 개의 색으로 뒤엉켜 출렁거리는 이 감정도.

모든 것이 꿈꾸듯 황홀하여,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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