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2/156)

S4. 율리카 브란테의 축제 무휴

율리카 브란테가 마리안느 발레르 황비를 만난 건 10살 때였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가 본 황성은 몹시 크고 휘황찬란했다. 가슴이 마구 뛰어서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가장 좋아하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싶었으나, 유모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혔다. 이런 시커먼 옷을 입어서야 전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 전날 펑펑 울었다.

그러나 율리카는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날, 마리안느 역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려한 무늬도 없고 레이스도 많지 않았다. 머리 장식도, 그 장식에서 뻗어 나와 얼굴을 가린 베일도 검은색이었다.

온통 검은색인 와중에,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 도드라졌다. 율리카는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로군요. 브란테 백작의 고명딸이.”

마리안느는 어머니보다도 다정한 미소로 율리카를 맞아 주었다. 율리카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를 죽이며, 몇 번이나 연습한 대로 인사했다.

“브, 브란테의 딸, 율리카 브란테가 황비마마를 뵙습니다.”

“어쩜,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같이 귀엽습니다. 자, 이리 올라오세요.”

마리안느가 율리카에게 팔을 뻗었다.

율리카는 곁에 선 브란테 백작의 눈치를 흘끗 살폈다. 백작은 턱수염을 손등으로 쓸며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허락의 의미다.

율리카는 긴장이 탁 끊긴 기분으로 마리안느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곁에 앉았다.

“마마에게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어쩜, 윗사람에게 아부할 줄도 알고.”

마리안느가 활짝 웃었다.

아부가 아니었는데. 진심에서 한 말이었는데. 율리카는 조금 섭섭했지만, 마리안느가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을 삼켰다.

“여자아이는 참으로 사랑스럽군요. 제가 딸을 낳았어도 좋았을 뻔했네요.”

“마마도 참,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사실 저는 딸을 키우고 싶었답니다. 아들을 바란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죠.”

“그게 다 마마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늠름하고 듬직한 아드님을 낳으셨으니, 공작께서 참으로 흐뭇하시겠군요.”

“아직은 그저 ‘아들’이죠. 그걸로 아버지의 욕심을 어찌 다 채워 드리겠어요?”

“곧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게 되실 겁니다. 저희가 전력으로 마마와 어리신 황자 전하를 보필할 테니까요.”

율리카는 백작과 마리안느가 나누는 대화를 귀담아들었지만, 그중 어떤 말도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카는 쓰게 웃는 마리안느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딸이 좋으신가요? 그러면 제가 마마의 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어쩜, 기특하기도 해라!”

마리안느가 어린 자녀의 재롱을 보듯 크게 기뻐했다.

“영애는 우리의 보물이랍니다. 곧 이 제국의 가장 높고 고귀한 여성이 될 거예요.”

높고 고귀한 여성은 어떤 걸까.

마리안느 황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일까.

칠흑 같은 드레스조차 빼어나게 어울리는, 이 젊고 아름다운 황비처럼.

마리안느와의 만남은 짧았다.

황비의 방을 나와 황성의 복도를 걸으며, 율리카는 오가는 사람들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흘끗거리지 마라. 귀족의 체통도 지킬 줄 모르느냐.”

백작의 벼락같은 지적에, 율리카는 흠칫하며 치맛자락을 쥐었다.

“어깨를 펴. 듣지 못하였느냐? 고귀한 여성이 될 아이가, 그리 움츠려서야 될 일이냐.”

하지만 황성 내를 감도는 무겁고 어두운 공기가 율리카를 자꾸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왜 황성의 사람들은 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건가요?”

결국 율리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장례가 치러지고 있어서 그런 거다.”

“장례? 누가 죽었나요?”

“그래. 넌 알 필요 없는 사람이야.”

백작의 단호한 말에 율리카는 시무룩하게 고갤 숙였다.

정보의 필요와 불필요는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 의해 결정됐다. 불필요한 정보는 차단된다. 두 번 물으면 호통이 돌아왔다.

궁금함은 또 이렇게 해소되지 못한 채 흘러갔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백작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율리카를 복도에 세워 두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율리카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창가로 쪼르르 이동했다.

“황성……, 크다.”

창밖으로는 화려한 정원과, 여러 개의 화려한 별채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브란테 성이 가장 크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황성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

율리카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웃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 끝에, 한 소년이 걸렸다.

정원 어귀에서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어느 성인 남자와 말다툼을 하는 게 보였다.

“난 안 가! 분명 안 간다고 말했어! 난 여기 남을 거야!”

“폐하의 명이십니다. 이유도 다 아시는 분이, 왜 이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가려면 해밀턴 너나 가! 난 이곳에 남을 거니까!”

‘쟤도 황성이 되게 좋은가 보다.’

아마 자신처럼 황성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떼를 부리는 게 아닐까.

‘철이 없네.’

부모님 말씀 한 번 거역한 적 없는 율리카로서는, 참 생소하고 비웃음 나는 장면이었다.

“율리카, 이리 오너라. 그만 돌아가자.”

그사이, 용건을 마친 백작이 방에서 나왔다.

율리카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쪼르르 달려가 백작의 곁에 섰다.

‘저런 애랑은 친해지지 말아야지.’

백작과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율리카는 굳게 결심했다.

방에서 나온 아버지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났다. 간신히 기침을 참으며, 율리카는 큼직한 백작의 보폭에 맞춰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 * *

어느 여름, 율리카는 악보를 사러 서점에 들렀다가 마법 서적을 한 권 더 샀다.

계산대 앞에서 떨이로 팔길래 흥미 본위로 집어왔을 뿐, 딱히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한 권을 읽은 후, 율리카에게는 마법을 향한 동경과 열망이 생겨났다. 좀 더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아버지. 저, 마법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요.”

어느 날 율리카는 브란테 백작의 서재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서재에서, 백작은 그런 율리카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법? 네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느냐?”

“아뇨, 그건 아니지만…….”

“말을 또박또박 마저 해야지, 율리카.”

백작이 질책의 말을 할 때마다, 율리카는 심장이 뚝 떨어질 것 같은 긴장감을 맛보아야 했다.

“학문으로서……, 관심이 생겼어요.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학교가 안 된다면 가정 교습이라도요.”

“흐음, 마법이라. 요즘 그거 배워 봐야 어디에 써먹는다고.”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서 나쁘지 않은 학문이라고 생각―”

“율리카.”

히익.

백작의 살벌한 목소리에 율리카가 경기하듯 몸을 떨었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율리카의 앞으로 걸어왔다. 율리카는 백작을 설득하려 들고 온 마법 서적을 품에 더욱 꽉 끌어안았다.

지금 의지할 곳이라고는 책밖에 없다. 손가락이 굳을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니. 넌 황후가 될 여자란 말이다. 쓸모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하지만 아버지.

프란 황자님은 아직 너무 어리신걸요. 어제도 제 치마를 들추며 좋다고 낄낄거렸다고요. 그런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하나요.

……같은 이야기,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율리카가 겁먹은 채 고갤 숙이고 있으니, 백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뭐……, 독서 취향까지 나무랄 필요는 없겠지. 독학이라면 내게 굳이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율리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율리카. 언제까지 우물쭈물할 거냐. 황후가 될 여자면 좀 더 당당하고 의연해야지.”

“죄송해요.”

“브란테가에 태어난 이상, 쓸모를 다 해야지.”

쓸모.

자신은 황후가 된다는 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걱정 마세요. 한시도 잊은 적 없는걸요.”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율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싫은 담배 냄새가 온몸에 배는 것 같았지만, 율리카는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 * *

검은색 드레스가 아름다울 사람은 다시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헬레나 페레스카의 검은 드레스는 아름다운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은 마치 제왕의 갑주 같았다. 강하고 세련되었으며, 고귀하고 기품이 넘쳤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홀로 빛이 났다.

‘웃기지 마. 그래도 결국엔 내가 이긴 거야.’

콰앙.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장대한 선율이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결국에는 다들 날 보고 있잖아? 전하도 내 옆에 있어. 너 같은 건, 그냥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광대에 불과해.’

매끄러운 피아노 표면에 비친 카이사르와 브란테 백작을 확인하며, 율리카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역시, 일찍부터 신부 수업을 받은 사람은 다르네요. 공녀는 피아노나 치실 줄 아나 몰라.”

“피아노 좀 못 치면 어때요. 거긴 마수를 때려잡는데.”

“하긴, 그렇지. 브란테 백작이 꽤나 당혹스럽겠어.”

“당혹스럽다 뿐이겠어요? 자기 딸을 애면글면 이만큼 키워 놨더니, 갑자기 나타난 공녀가 자리를 위협하면 말이죠.”

“브란테 영애만 안됐지, 뭐.”

“맞아, 가엾게도.”

시끄러워. 닥쳐, 좀.

수군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율리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난 안 불쌍해. 멍청이들.’

자신이 왜 불쌍하단 말인가.

자신은 카이사르와 결혼할 것이다.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왔다. 누가 감히 브란테가의 일을 훼방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길었던 연주곡이 끝났다.

율리카는 얕은 숨을 내쉬며 건반에서 손을 뗐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앙코르가 날아들었다. 살짝 땀이 배어 나와, 율리카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정말 멋진 곡이에요, 영애!”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였습니다.”

사람들이 율리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분위기를 돋웠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율리카도 약간 안심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순간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헬레나 페레스카가 아니라.

“전하. 전하께서는 어떤 곡이…….”

율리카가 환하게 웃으며 카이사르가 서 있던 자리로 고갤 돌렸다.

그러나 피아노를 치면서도 수시로 확인했던 카이사르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아, 조금 전에 녹트 자작이 불러 자리를 비우셨답니다.”

“그래도 첫 곡은 끝까지 다 듣고 가셨어요. 일찍 자리를 비워 굉장히 아쉬운 듯 보이시던걸요.”

몇 명의 영애들이 눈치 빠르게 율리카를 위로했다.

율리카 역시, 언제 당황했냐는 듯 침울한 표정 한 톨 보이지 않고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군요. 리퀘스트라도 받아 볼까 했는데.”

“그러면 반주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와 일리오 경이 함께 노래할게요.”

“그거 좋네요.”

버빙카 영애의 리퀘스트는 작년 겨울 무대에 올랐던 오페라의 삽입곡이었다.

노래가 밝고 경쾌하긴 하지만, 정작 오페라 내용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짧고 강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난관을 이겨 내지 못하고 병으로 죽어 버렸으니까.

‘선곡을 해도 참 자기 같은 것만 하네.’

율리카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꽃처럼 웃으며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 옆에서는 버빙카 영애와 일리오 영식이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당신들 모두와 함께 나누리

흥겹고도 기쁜 시간을.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할 뿐

기쁨 이외의 모든 것은.

경쾌한 음악에 주인 없는 파티의 분위기는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밤은 화려한 불빛에 저물고, 공허한 쾌락은 연회장을 채웠다.

삶은 축제요.

사랑을 모르는 이에게 그렇다오.

율리카는 자신의 삶이야말로 축제의 한가운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축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 그러나 뭐 어떠랴. 자신은 이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있기만 하면 될 일이다.

사랑 따위, 알 필요 없다.

아버지께서 알려 주지 않으신 것들은, 분명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일 테니까.

자아, 즐기자.

술잔과 술, 그리고 노래를.

이 아름다운 밤과 웃음을.

율리카는 더욱 강하게 건반을 눌렀다.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어쩐지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묻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넓은 연회장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텐데도.

(*삽입된 가사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삽입곡인 <축배의 노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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