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후아, 배불러……!”
카페를 나설 때, 내 배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케이크를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천상의 맛이었다.
곁에서 나란히 걷던 카이사르가 그런 내 모습에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헬레나는 진짜 단 걸 좋아하더라.”
“인생이 쓰니 맛이라도 달아야지.”
나는 전생에서 용병단 동료가 했던 말을 떠올려 따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 그 말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이후로 단 음식에 집착했던 것도 있던 것 같다.
정작 그 동료는 쓰디쓴 담배도 피우는 인간이었다만.
‘그나저나…….’
나는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보았다.
‘카이사르, 즐기고 있는 거 맞나?’
생각해 보니 카페에서도 주로 내가 질문하고 카이사르가 대답하는 식의 대화였다.
더구나 서비스로 나온 건 나만 좋아하는 단 음식이라, 그는 한 입도 안 댔다.
‘이래서는 연애라고 할 수 없어.’
으음.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는 좀 더 연애다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꺄아악, 도와주세요!”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새된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출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나와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카이사르가 날 보호하듯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사실 내가 남에게 보호받을 사람도 아니고, 그도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평범한 연인 같고, 기분 꽤 괜찮은데, 이거?’
나는 카이사르에게 양껏 폭 안긴 채 비명이 들린 쪽을 살폈다.
소란은 길 건너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좋으면서 왜 앙탈이야?”
“이거 놔요! 놔 주세요!”
“그냥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자니까? 내가 깡패야?”
……깡패 맞네.
한 여성이 세 명의 남성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꺾을 듯 강하게 움켜잡아, 여자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차림으로 이 근방 어슬렁거린다는 건, 아가씨도 결국 같이 놀 남자 찾는다는 뜻이잖아?”
여자는 짙은 화장과 노출 심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드러난 뽀얀 어깨에 손을 올려 여자를 제 품에 끌어당겼다.
“꺅! 손대지 마세요! 싫어요!”
“어쭈, 들었냐? 싫단다. 왜 내 귀에는 만져 달라는 말로 들리냐?”
“안 돼요, 돼요, 돼요 하는 거지, 지금? 싫다는 소리가 별로 적극적이질 않네? 킥킥킥.”
남자들이 여자를 희롱하며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도 이내 힐끗거리기만 할 뿐, 얽히기 싫다는 듯 금세 자리를 떴다.
“……곤란한 놈들이네.”
곁에 선 카이사르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수행원들에게 상황을 정리하라고 맡길 생각이구나.’
멀리서 그의 수행원들이 몰래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참이겠지.
그런데.
짝! 뺨 올려붙이는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소리가 워낙 커서, 나도 카이사르도 깜짝 놀랐다.
처음엔 남자가 여자에게 손찌검을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 이년이?!”
뺨을 때린 건 여자 쪽이었다.
“만지지 말랬잖아요!”
여자는 눈물이 그렁한 눈을 하고서도 악을 쓰며 말했다.
“싫어요! 정말 싫다고요! 끔찍하게 싫어!”
……와오.
저것보다 싫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힐 방법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쯤에서 물러날 남자들이 아니다. ‘좀 더 확실하게 싫다는 말 안 했잖아?’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네가 감히?’라는 분노로 바뀐다.
“이년이 예쁘장해서 봐줬더니!”
이젠 저 대사도 식상하지 않나?
남자가 손을 치켜들었다. 여자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맞을 각오로 악을 쓴 것이다.
그래, 몰라서 적극적으로 싫다는 소릴 안 하는 게 아니지.
싫다고 적극적으로 말해 봤자 얌전히 떨어져 나갈 인종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뿐.
그렇게, 남자의 손이 여자의 뺨을 후려치려는 그 순간 나는―
“되게 귀찮네, 진짜.”
“너, 너는 뭐야!”
이미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난 울먹거리는 여자를 등 뒤에 두고 남자들과 대면하여 섰다. 여자를 때리려던 남자의 팔은 양산으로 막아 냈다.
남자들은 크게 분노하고 당황하면서도, 내게 쉽게 달려들진 못했다.
그럴 것이, 척 봐도 귀족가 영애인 티가 났으니까.
“어이, 어느 댁 아가씨인진 모르겠지만, 신경 끄고 갈 길 가쇼. 댁이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들은 최대한 점잖은 말로 ―물론 그들 기준에서― 날 타이르려 했다. 그 같잖음에 웃음이 다 나왔다.
“싫은데?”
“뭐야?!”
“못 들었니? 너네 싫다잖아. 근데 왜 계속 치근거려서 날 끼어들게 만들어, 귀찮게 진짜.”
휘리릭, 나는 양산을 돌려 어깨에 척 걸치고 오만하게 그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았다.
내 말에 남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거, 다치기 싫으면 꺼지쇼.”
피식. 그들의 허세에,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표정에 남자들의 눈썹이 꿈틀댔다.
난 남자들에게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다른 이에게 말을 걸었다.
“옆길로 새서 미안한데, 카이사르. 좀 기다려 줄래?”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다섯 걸음 정도 저쪽.
팔짱을 낀 채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카이사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나야 스승님이 기다리라 하면 기다려야 하는 몸이지.”
“어머, 착하기도 해라.”
“그럼. 나처럼 말 잘 듣는 제자가 또 어디 있겠어.”
“이게, 사람 무시해?! 너네 뭐야! 뭐 하는 새끼들이야!”
나와 카이사르의 농담에 남자 하나가 꽥 소릴 질렀다.
“아, 미안. 많이 기다렸지?”
나는 양산을 검 쥐듯 고쳐 잡고 남자들에게 겨눈 채 방긋 웃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서로 귀찮아지니까 중간에 튀지 마. 쫓아가서 팰 거다.”
내 친절한 충고에 남자들의 표정에 혼란이 번졌다. 그러나 그들이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 줄 만큼 난 한가롭지 못하다.
난 양산 끝을 까딱까딱 흔들며 재촉하듯 말했다.
“자, 그러면 누구부터 덤빌래?”
무기도 들지 않은 건달들 상대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훈련 전에 하는 가벼운 스트레칭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나는 날 향해 덤벼드는 세 남자를 가볍게 요리해 줬다.
“우아아악!”
일단, 가장 흥분한 한 놈이 무작정 주먹부터 내지르며 달려왔다. 나는 옆으로 슬쩍 피한 후 양산으로 등짝을 후려쳐 줬다.
“끄아악!”
두 번째 남자는 내 멱살을 잡으려 손을 휘둘렀다. 몇 번 피하다가 순순히 잡혀 줬다.
드디어 내가 손아귀에 잡히자 남자의 표정에 자신만만한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몸을 휙 돌려 그놈을 등지고 선 후에, 양산 끝으로 명치를 힘껏 찔렀다.
“우웩!”
남자는 결국 숨을 꺽꺽대며 주저앉았다. 두 번 공격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패기 없는 놈.
그나마 세 번째 놈은 신중했다.
앞서 두 놈이 가을 낙엽처럼 쉽게 나동그라지는 걸 보고 깨달은 바가 있는지, 근처에서 각목을 주워 들고 내 앞에 섰다.
“오, 무기를 드시겠다?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구나.”
나는 씩 웃으며 남자를 칭찬해 주었다.
“흥, 잔재주도 정도껏 부려야지!”
무기를 손에 쥐자 자신감이 솟았는지, 잠깐의 신중함은 내동댕이치고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양산의 각 끝을 양손으로 쥐고 각목을 막았다. 양산에서 콰득 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뭘 웃고 있어, 아래쪽이 비었는데.”
“뭣? ……뜨아아아악!”
무기만 제압하면 이기는 줄 아나.
나는 텅 빈 녀석의 아랫도리를 힘껏 걷어차 주었다.
남자는 각목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아랫도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대의 2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머리가 좀 더 돌아갔으면 그냥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을 텐데.”
쓰러진 세 놈을 향해 내가 비장하게 말했다.
물론 동의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셋 다 바닥을 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 저기이…….”
내가 나의 성과에 흐뭇해하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소심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던 피해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가, 감사합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으흑, 감사합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성이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이제야 안심이 된 모양이다.
나는 측은한 마음에 여성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안심해요.”
“저기,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은혜는 무슨. 오히려 나도 스트레스 풀고 좋았는데요, 뭘.”
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빈말이 아니다. 요즘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단 말이지.
황후는 계속 견제하지. 브란테 백작도 짜증 나게 굴지. 쉬고 싶은데 검 가르쳐 달라는 인간들은 많지.
이젠 해 본 적도 없는 연애까지 신경 쓰느라 머리 빠질 지경이라고.
“자, 이제 가요. 저 쓰레기들 일어나기 전에.”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여자가 떠난 후 고갤 돌려보니, 내게 혼찌검이 난 건달들 역시 비척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보람찬 하루였다.”
나는 흐르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뿌듯하군. 한동안 내숭 떨고 지내느라 찌뿌둥했는데.
“후련해?”
어느새 카이사르가 내 곁에 다가왔다. 나는 카이사르를 보며 방긋 웃어 주었다.
“응!”
내 미소에, 카이사르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따뜻하고 밝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헬레나가 기분 좋아 보여서 나도 좋아.”
“그렇지?”
“응. 그런데 뭐 하나 얘기해도 될까?”
“뭔데?”
카이사르가 고갤 갸우뚱하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우리, 오페라 늦었어.”
“……아뿔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은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하는 거야! 알고 있었으면 재촉을 했어야지!
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덥석 잡은 채 소리쳤다.
“뛰자!”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드레스 차림으로 자기보다 큰 남자를 끌며 거리를 질주하는 귀족 영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거야 당연하다.
더구나 나도 카이사르도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을 정도이니,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달렸을지야 말 안 해도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남의 시선 따위 문제가 아니다.
오페라가! 연애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내 완벽한 데이트 코스가!
“우아아아, 빨리 좀 뛰어, 카이사르!”
“아하하.”
나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카이사르는 뭐가 재미있는지 연신 웃기만 한다.
정말이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