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늦었…… 어……!”
뭐, 예고된 일이긴 했다.
시간을 딱 맞춰 카페를 나선 건데, 건달들 상대하느라 시간을 꽤 허비했으니 말이다.
오페라는 이미 시작한 후였다. 나는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나와 달리, 내 곁에 선 카이사르는 여전히 웃기만 한다.
“큭큭큭.”
“아, 그만 좀 웃어!”
“아야.”
얄미운 마음에 카이사르를 찰싹 때렸다. 이 자식은 건달들 만난 후부터 계속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뭐가 웃긴 거야, 진짜.
“우린 홀이 아니라 입장은 가능해, 헬레나.”
“중간부터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사르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게 연인들 사이에서 진짜 인기 많다고 했단 말이야.”
“누가 그래?”
“적기사단 수련병들이.”
“그래? 뭐, 그다지 애틋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카이사르가 ‘흐음’ 하며 중얼거렸다.
“내용은 그렇지만 음악이……, 아니, 잠깐. 카이사르, 이 오페라 내용 알아?”
“알지. 초연 때 초청받았거든.”
……네?
나는 고갤 홱 들어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이 얄미운 인간은 뭐가 문제냐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봤어? 이미 봤다고? 근데 왜 말 안 했어?”
“그야 헬레나가 뭔가 잔뜩 준비해서 들떠 있길래, 재미있어 보여서.”
“이 바보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게 뭐냐고! 나 혼자 들떠서 삽질한 것 같잖아!
카이사르가 결국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놀림당한 것 같아서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내상이 생길 만큼 걷어차 주고 싶다, 진짜.
“크흠. 어쨌든, 헬레나는 어떤데? 보고 싶었던 오페라였다면, 지금이라도 들어갈래? 아직 몇 곡 안 지나간 것 같고.”
“나는……, 난 됐어. 사실 오페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오페라는 우울하게 끝나는 내용이 많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 완벽한 데이트 코스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난관이.”
나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괜히 내가 다른 일에 끼어들어 일정을 망친 것 같아, 미안하고 속상했다.
카이사르에게 뭔가 보답해 주고 싶었다. 난 연애는 처음이고,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툰 사람이니까.
‘남들처럼 해 주고 싶었는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좋아. 그럼 오페라는 건너뛰자.”
“……?”
카이사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코스로 이동하자. 분명 몽트 대성전이었지?”
“응? 아, 맞아. 야경을 보려고. 그렇지만 아직 좀 이른 시간……,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자아, 출발.”
카이사르가 날 끌어당기며 오페라 하우스를 나섰다.
나는 총총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당황하여 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냐니까? 응? 어떻게 아냐고!”
“어젯밤에 요정님이 가르쳐 줬어.”
“거짓말! 너 설마,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혹시 홀 케이크도 네가 주문한 거야?!”
“아니. 요정님이라니까.”
다 알고 있었구나, 이 자식!
적기사단 수련병들 중에 분명 배신자가 있는 것이렷다! 이 자식들, 다음 훈련 때 지옥을 맛보게 해 주겠어!
내가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뒤쫓아가고 있자니, 카이사르가 날 힐끗 돌아보았다.
“아.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건달들은 진짜 나랑 상관없거든.”
“알아! 앞 보고 걷기나 해!”
나는 짓궂게 웃고 있는 카이사르를 향해 있는 힘껏 호통을 쳤다.
* * *
몽트 대성전 앞 광장 계단.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라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발아래 펼쳐진 도시의 전경이 붉은 빛에 잠겨 가는 것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는 야경을 봐야 한댔는데.”
“노을도 멋진데, 뭘.”
“미안해. 내가 괜히 샛길로 빠지는 바람에 다 망친 기분이야.”
“흐음.”
카이사르가 짧게 소리를 냈다.
화가 난 걸까. 나는 흘끗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이 도시 쪽을 향해 있어 짐작을 하기가 어려웠다.
“홀 케이크, 맛없었어?”
문득,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정말 맛있었어. 진심으로.”
“노을은?”
“응?”
“야경 말고, 노을은 싫어해?”
카이사르가 재촉하듯 ‘응?’ 하고 고갤 갸우뚱했다. 그런 그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너울거렸다.
“……좋아해.”
“응. 그럼 됐네.”
카이사르가 크게 고갤 끄덕이더니 다시 정면으로 고갤 돌렸다. 그의 시선이 아득히 멀어서, 나 역시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된 건가.’
꾸욱―, 내가 카이사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율리카는……, 오페라 좋아하겠지?”
“이해가 안 되는데. 갑자기 율리카 브란테가 왜 나오는 거지?”
“율리카는 피아노도 잘 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잖아. 성격도 나긋하고 순종적이고.”
“그렇지. 그렇지만 율리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길 가다가 건달 셋을 때려눕히지는 못하겠지.”
“끄응.”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역시 데이트 중에 갑자기 양산으로 남자 셋을 때려눕힌 건 좀 너무했나.
그러나 뒤이어 나온 카이사르의 말은, 내 불안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그런 헬레나를 좋아해, 나는.”
“……뭐?”
“평범하게 데이트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헬레나. 난 분위기 좋은 카페를 좋아하고, 오페라를 좋아하고, 우아하게 양산을 쓰고 걷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카이사르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노을의 빛이 비끼어 그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고 깊게 빛났다. 나는 그의 시선에서 한 치의 거짓도 찾아낼 수 없어, 마음이 술렁였다.
“나는 헬레나 페레스카를 좋아하는 거야. 너만, 특별하니까.”
그렇게 말한 카이사르가,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되지도 않는 내숭을 부려 보려고 애쓰는 헬레나를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지만.”
색이 바래지 않을 것 같은 애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것이 내 착각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난……,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왜인지,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 뭘 해야 하는 건지. 뭐가 맞는 건지.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불안하다고.”
막상 좋아한다고 깨닫고 나니, 그다음엔 잃을 것이 두려워졌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다가왔을 때를 모르듯이 손에서 빠져나가도 깨닫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헬레나. 나도 네가 처음이야.”
카이사르가 말했다.
목소리가 차분하고 고요해서, 나는 그가 나와 같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저 네가 웃을 수 있는 일이면 뭐든 상관없어.”
내가 웃을 수 있는 일.
아마 보통의 연인들과는 조금 다른, 그와 나만 알고 있을 비밀스럽고도 까다로운 일들.
“난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 앞에서도 고민하지 않을 거야.”
아니, 그건 고민해야지.
카이사르의 비장함에 나는 쓴웃음이 터졌다. 아마, 농담은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무슨 마왕도 아니고……. 홀 케이크면 충분하거든?”
“황태자를 곁에 두고도, 나의 연인께서는 어쩜 그리 소박하신지.”
카이사르가 씁쓸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카이사르는 어떤데? 내가 뭘 해 주면 행복해질 것 같아?”
“으음, 그러네. 나야 뭐, 헬레나가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이지만…….”
카이사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은 헬레나에게 키스를 받고 싶어.”
무리잖아, 무리.
나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두 사람만 즐겁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안 보이는 곳에서 호위가 붙어 있으니까 말이다.
‘느껴진다고, 저쪽 편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인기척이.’
아는 사람들이 보는 중에 입맞춤 같은 거 할 것 같냐.
하지만.
‘뭔가, 해 주고 싶어.’
표현하고 싶다.
알려 주고 싶다.
너무 서툴러서 언어로는 아름답게 꾸미지 못할 이 날것의 감정들을.
“눈 감아.”
“엇, 정말?”
“빨리.”
내가 부끄러움을 속이려 재촉하자, 카이사르가 냉큼 눈을 감았다.
난 카이사르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한 후 양산을 펼쳤다. 대가 부러진 양산은 흐물흐물 펼쳐졌다.
‘저쪽이었지, 분명.’
나는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양산을 펼친 후, 그 틈에 재빠르게 카이사르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다.
처음엔 분명 내가 돌격했을 텐데, 호흡이 달릴 때쯤 되고 보니 어느새 카이사르가 나를 리드하고 있었다.
마치 토끼가 함정에 걸리길 기다렸다는 듯, 늑대는 느긋하고도 여유롭게 유희를 즐긴다.
‘심장, 터질 것 같아.’
숨을 쉬기 힘들어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황홀해서인지.
노을은 빠르게 사그라들어 밤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불빛이 발밑에서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카이사르, 이걸로 조금쯤은 행복해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부서진 양산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