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침묵을 밀어냈다.
흔들리는 마차 안, 나는 마차 진동에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
머리 위에서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어깨에는 그의 겉옷이 걸쳐져 있었다. 세심하기도 해라.
“곧 공작저야. 그러잖아도 깨울까 했었어.”
“으응.”
“내일 나 대외 업무라 검 수업 없는 거, 알고 있지 스승님?”
“으음.”
“그리고 아까 네가 맛있다고 한 케이크, 따로 주문해서 공작저에 보내 뒀어. 레너드랑 아고트랑 나눠 먹어.”
“하아.”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헬레나?”
애매모호한 내 대답에 카이사르가 물었다. 그의 뺨이 내 이마에 닿아 따뜻했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 역시, 내가 잠에서 깨길 기다려 주겠다는 듯 말이 없었다.
말이 포석을 지나치며 걷는 소리가 경쾌했다. 사실 잠은 진작부터 깨어 있었다.
“고백할 거야.”
“고백은 이미 했어, 헬레나.”
내 말에 카이사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직 잠꼬대를 하는구나 싶은 모양이었다.
“너한테 말고.”
“아, 그래? 누구에게? 내가 누굴 죽이면 될까?”
웃으면서 이런 얘길 하다니. 농담인 듯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아마 농담 아니겠지.
나는 몸을 일으켜 카이사르와 마주 보고 말했다.
“아고트한테 말할래. 나, 카이사르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것.”
“그 녀석이 날 죽이러 오겠군.”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그게 뭐야. 내 고백은 꼭 사상자를 낳고 마는 거야?”
“상대가 아고트라면 달리 다른 반응이 떠오르질 않는데.”
“그건 그렇지, 역시…….”
우리 두 사람은 ‘으으음’하고 동시에 소리 내어 신음했다.
“뭐, 날 좋아한다는 건 그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거겠지.”
“목숨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무슨 이리도 난이도가 높은 공녀님이란 말이야?”
“그래서, 싫어?”
으응? 하며 나는 고갤 갸웃했다.
평소엔 보여 준 적 없는 애교 –사실 이걸 애교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나로서는 정말 필사의 의지로 끌어 올린 표현– 에 카이사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이내 흐물흐물 녹는 표정이 되어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정말 꼬오옥.
“목숨, 걸게……!”
“옳지, 옳지. 착해라.”
토닥토닥. 내가 카이사르의 등을 두드려 주자, 카이사르가 ‘크흑!’ 하는 소릴 냈다. 그 숨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그건 웃음을 참는 것이었을까, 체념을 하는 것이었을까. 결국 끝까지 물어보진 못했다.
* * *
어느 타이밍에 말해야 좋을까.
나는 복도의 카우치에 앉아, 환기를 위해 복도 창문을 열고 있는 아고트를 보며 생각했다.
너무 진지해도 무거운 분위기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말할 얘기도 아닌 것 같고.
‘으음. 부모님한테 얘기하는 것보다 왜 더 어렵게 느껴지지.’
무엇보다 내가 아고트에게 살인검을 가르쳐 줬다는 사실이 제일 걱정인데.
음, 카이사르에게도 같은 걸 가르쳤으니 괜찮으려나?
아니, 잠깐. 더 위험한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황성에 가지 않으시네요.”
내가 아무 말이 없으니 아고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아고트가 창문 걸쇠를 여는 것을 보며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응, 오늘은 카이사르에게 대외 업무가 있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모처럼 푹 쉬실 수 있겠어요. 요즘 어쩐지 계속 바쁘셨잖아요?”
“그랬지…….”
“간식거리라도 방에 가져다 드릴까요? 어제 녹트 자작께서 보내 주신 쇼콜라 케이크가 아직 남아 있는데.”
“아, 그 케이크…….”
나는 카이사르와 카페에서 먹었던 홀 케이크를 떠올렸다.
아, 카이사르와 먹은 건 아니구나. 카이사르와 있었지만, 먹기는 나 혼자 먹었지.
“아고트는? 어제 먹어 봤어?”
“네. 도련님께서 같이 먹자고 해 주셔서 한 조각 먹어 보았어요. 정말 맛있던걸요.”
“그렇지, 역시?”
아고트의 반응이 좋아서, 나는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건, 기회일지도!’
그 케이크가 사실은 카이사르가 고르고 보내 준 것이라는 점을 어필하면, 아고트 안에서 카이사르의 점수가 좀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 케이크, 사실 카이사르가 챙겨 준 거야.”
“아. 하하.”
아고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짧게 웃었다.
고맙지만 고마워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아고트는 아직도 카이사르가 싫은 거야?”
“싫은 건 아니지만……, 자꾸 아가씨를 독차지하려 하잖아요.”
“흐음.”
“어제만 해도 그래요. 몸종인 절 빼놓고 가시다니, 분명 전하 때문이었죠?”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군.
명색이 데이트인데, 옆에 시종을 끼고 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잖아도 카이사르의 호위들이 달라붙는 것도 짜증 났었는데.
“그리고 검에 재능이 있으신 건 알겠는데요, 사람 얼마나 무시하는 줄 아세요?”
“그래? 오라버니랑은 잘 지내던데.”
“그거야 도련님이 착하시니까 그런 거고요. 저더러 아가씨 명성에 민폐 끼치지 말라고 비웃었다고요!”
“저런. 그랬어? 속상했겠네.”
“뭐……, 저도 전하께 ‘아가씨 귀찮게 하는 일등 공신’이라고 반박했으니 괜찮지만요.”
황태자를 상대로도 절대 안 지는구나, 아고트. 과연 내가 데려온 아이답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생각보다 두 사람의 원한이 깊어 보이는데.
나는 결국 깊은 고뇌로 ‘으음’ 하고 신음했다.
“저기 말이야, 아고트.”
“네, 아가씨.”
“만약에 말이야. 만약의 만약에, 내가 카이사르랑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아?”
빠각.
헉, 아고트가 창문 손잡이를 부러뜨렸다! 정신 차려, 아고트!
아고트가 바르르 떨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사람의 동공이 그렇게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 여여, 연인, 연인 관계…….”
“아고트, 숨 쉬어.”
망했다. 누르면 안 될 버튼을 눌러 버린 건가.
“아, 아하하. 네. 만약이니까요. 괜찮아요. 그런 만약, 있을 수 있죠. 전 아무렇지 않아요. 요호호호.”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기에는 얼굴이 백지장이 됐는데.
나는 ‘으음’ 하고 눈을 감았다. 지금 말하면 어쩐지 아고트가 졸도할 것 같다.
하지만 대체 언제까지 말하지 않고 침묵할 건데? 이러다가 나중에 들키게 된다면 더 실망시키게 될 거다.
‘말해야 해.’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다시 눈을 뜨고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아고트. 솔직히 말할게.”
나는 자세를 바로 앉아 아고트에게 말했다.
“뭘 말인가요, 아가씨?”
“만약이 아니야.”
“네?”
“카이사르랑 나 말이야.”
터엉. 텅, 텅.
아고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창문 손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저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부러진 손잡이를 시선으로 쫓았다.
한동안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불온한 공기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얼마 후.
아고트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내 치맛자락을 쥐고 소리쳤다.
“왜 하필 그 능구렁이랑!”
“으헉!”
아고트가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쏟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눈물이 이렇게 갑자기 나와?!
“왜죠?! 왜 하필 전하인가요! 아가씨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더 좋은 남자 많은데! 찾아보면 도련님처럼 괜찮은 사람도 많을 텐데, 왜!”
“그렇지만 오라버니랑 결혼할 순 없잖아.”
“결혼이요오?!”
아고트가 정말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이크, 결혼은 아직 금기어였나.
“벌써 약혼하신 거예요?! 곧 결혼하시는 건가요?! 황성으로 가게 되시나요?! 절 버리고 가시는 건 아니죠?!”
“뭐? 아니야. 널 왜 버려.”
“버리지 말아 주세요! 으아앙!”
저런.
아고트는 아직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구나.
나는 카우치에서 내려와 아고트의 앞에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내가 바닥에 앉으니, 아고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나는 아고트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며 웃었다.
“결혼은커녕 약혼 얘기도 아직 안 나왔어. 그리고 황성이 아니라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아고트는 데려갈 거야.”
“정말이세요? 정말이시죠?”
“그럼, 당연하지.”
그제야 아고트의 얼굴에 안도가 살며시 퍼졌다. 이 녀석, 내 옆에 있기만 하면 정말 지옥이라도 좋은 건가.
“그리고 난 있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아고트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아고트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주면 안 될까?”
아고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눈물 그렁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고갤 숙였다. 고였던 눈물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말로 직접 들어서 충격이었던 거지.”
“응, 그렇구나. 알고 있었……, 응?”
엇?!
“아, 알고 있었다고?!”
“전하가 아가씨 좋아하는 거야 대놓고 티를 내니 모를 수가 없고, 아가씨 마음도……, 이렇게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모르는 것도……, 쿨찌럭.”
와, 어쩜 이러냐.
정말 나 빼고 세상 사람 모두가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냐고.
“그렇구나……, 알고 있었던 거구나…….”
아, 갑자기 기운이 빠진다. 이 위험천만한 고백에 앞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내 지난 시간은 뭐가 되는 거지. 아하하.
“……?”
내가 허탈한 실소를 흘리고 있으니, 아고트가 내 양손을 잡았다.
나는 고갤 돌려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아고트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로, 그럼에도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비장해져 날 쳐다보고 있었다.
“꼭 행복하세요.”
이상한 말이다. 문법적으로도 안 맞는 말 같은데, 그거.
하지만 그런 걸 지적할 수는 없지. 적어도 그 이상한 문장으로 아고트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고갤 갸우뚱하며 쓰게 웃었다.
아고트의 애정이 차고 넘칠 정도로 밀려와서, 어쩐지 가슴이 알싸해진다.
“응. 그럴게.”
“우윽……, 이 아고트가 아가씨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에에에!”
그러나 허세도 잠시. 아고트는 결국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내 목에 매달렸다.
나는 아고트를 안은 채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고트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알고 있을까.
날 행복하게 해 주는 얼마 안 되는 것들 중에, 결코 널 빠뜨릴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작고 여리고, 그럼에도 강인한 나의 소녀가 말이다.
* * *
며칠 후, 레너드의 저녁 식사 초대로 카이사르가 공작저를 찾아왔다.
초대라고는 해도, 워낙 공작저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던 황태자이신지라 그다지 위화감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체스 두는 것을 구경했다. 레너드가 연승했고, 나와 아고트가 레너드만 응원하는 바람에 카이사르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늦은 저녁.
체스판을 정리하고 보니 카이사르와 아고트가 보이질 않았다.
“오라버니. 두 사람, 어디 갔어?”
“아고트는 차를 가져온다고 나갔고, 전하께서는…… 글쎄? 바람 쐬러 나가셨나?”
음, 그 녀석이 혼자 나갔다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내가 손을 멈추고 ‘으음’ 하고 신음하고 있으니 레너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헬레나.”
“응?”
“아고트에게 말했어? 전하와 네 관계.”
“어? 아……, 어떻게 알았어?”
“뭐, 그냥.”
레너드가 작게 웃었다. 어쩐지 공허한 웃음소리다.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가슴 안쪽이 쩡 소리 내어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레너드의 뒤로 다가가 살며시 안았다. 레너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긴, 그는 한 번도 날 거절한 적이 없는 오라버니이지.
“그래도 나한테는 오라버니가 세계 제일이야.”
“아하하, 그건 기쁘네.”
레너드가 끌어안은 내 팔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난 언제나 헬레나 편이야.”
“응.”
“그냥 조금……, 쓸쓸해서 그래.”
“응.”
알아. 이젠 나도 알고 있어.
사람을 잃는다는 것. 멀어진다는 것. 소중히 한다는 것. 그게 어떤 기분인지. 어떤 무게인지. 어떤 온도인지.
“고마워, 레너드.”
처음으로,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레너드는 그저 말없이 내 팔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주 오랫동안.
* * *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을 찾으러 나섰다가, 어두운 복도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다.
발견했다고 해야 할지, 아고트의 악쓰는 소리가 워낙 커서 모를 수가 없었다.
“아가씨를 울리면 가만 안 둘 테니까요!”
“그래그래, 알았다니까.”
“아가씨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셔야 해요! 절대 토 달지 말고요!”
“이미 그러고 있거든.”
“바람피우면 진짜 용서 안 해요!”
“바람?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랬다가는 죽이러 갈 거니까!”
우와, 지금 반역의 현장을 목격한 건가.
나는 복도 코너에 숨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진짜 죽일 거니까! 아가씨 울리면 당신,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설마 또 싸우는 건가.
그러나 카이사르는 화내지 않았다.
“응. 기꺼이.”
그는 아고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드물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내가 부탁할게. 그건 너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일까.
아고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주저앉아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카이사르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고트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려 주었을 뿐.
나 역시 벽에 기대어 서서, 그저 조용히 아고트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 왜 이렇게까지 몰랐던 걸까.’
나는.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믿는 마음을. 의지하는 방법을.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내 작은 소녀의 눈물이 너무나 솔직하고 다정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