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69/156)

8. 여름이여, 오라

황성 복도를 걷다가 문득 걸음이 멈췄다.

복도 창 너머, 내원에서 여름벌레의 울음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먼 곳의 건물이 아지랑이에 흔들렸다.

“우와. 덥네…….”

나는 나도 모르게 손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체면이고 뭐고, 더워 죽겠다.

“이런 날은 훈련이고 뭐고 엄두도 안 나.”

“그러게요. 까딱 잘못하다가는 열사병으로 쓰러지겠어요.”

내 뒤를 따라오던 아고트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고트의 얼굴도 더위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 오늘은 일정도 없는데, 달튼 단장은 왜 호출을…….”

내가 달튼을 향한 험담을 투덜거리고 있을 때.

“어머나, 공녀.”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하고 돌아보니, 황후였다. 그것도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이다.

황후의 곁에는 율리카 브란테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율리카는 ‘윽’ 하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황후마마.”

“덕분에 무탈합니다. 검을 가르치러 오셨나요?”

“아뇨. 오늘은 적기사단에 볼일이 있어 왔습니다.”

“적기사단? 아, 페레스카 소공작이 부단장이라 하였지요.”

황후가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정한 말투와 일상적인 이 대화만 들어서는, 이 여자와 내가 극단에 선 채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사이라는 걸 전혀 알 도리가 없을 듯싶다.

“브란테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라리 표정에 싫은 티가 팍팍 나는 율리카가 대하기 편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율리카에게 먼저 인사를 청했다. 율리카는 가벼운 묵례로 내 인사를 받았다.

‘흐음. 지난번 일에 대해 지금 말을 꺼내는 건 좋지 않겠지.’

서점에서 율리카를 만났던 날, 그녀는 마수의 몸에 새겨져 있던 문양에 대해 더 알아봐 주겠노라 약속했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다지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지난번 파티 이후로는 더욱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아 말도 못 붙이게 됐다.

곤란하군.

“공녀, 혹 황태자에게 청혼은 받으셨습니까?”

율리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뜬금없는 황후의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네?”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너무 조용해서 말입니다.”

황후가 빙긋 웃으며 내 대답을 재촉했다. 난 대답 대신 율리카를 쳐다보았다.

율리카는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문 채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직……, 아닙니다만.”

“왜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왜 황태자는 공녀에게 청혼하기를 망설이고 있을까요? 이상하지 않나요?”

황후의 가느다란 미소가 가면처럼 보였다.

이 여자는 내게서 뭘 알아내려 하는 것일까.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여자이니, 생각을 읽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옆에 율리카를 세워 두고 이런 얘길 하다니, 진짜 악질이네.’

율리카는 내가 자신을 동정한다고 화를 냈지만, 이것 봐. 동정하지 않게 생겼는지.

“저야 모르지요. 그리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알고 싶지 않다?”

“초조하게 굴지 않아도, 마음이 내키시면 하고, 아니면 안 하시겠죠. 저 역시, 내키면 받고, 아니면 거절할 테니까요.”

“거절?”

황후의 눈썹이 으쓱 올라갔다. 내 대답이 기가 찬다는 듯.

“황가에서 청한 혼담을 거절하겠다? 공녀, 착각하고 있군요. 이것은 사랑 놀음이 아니라 정치랍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전 사랑 놀음입니다.”

나는 황후를 향해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마마께서도 진정 정치라 여기셨다면, 그 질문을 제가 아니라 제 아버지께 하시는 게 타당하지 않았을까요.”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참 어리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젊지요.”

아, 열 받았다.

나는 황후의 한쪽 눈이 찌그러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

표정이 전혀 무너지지 않던 황후였는데, 의외로 이런 말에 울컥하네.

‘피하는 게 상책이지.’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혀 황후에게 인사했다.

“그러면 전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황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내 뒤를 따르던 아고트도 꾸벅 인사를 한 후 서둘러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런 내 등 뒤로, 희미하게 노기 섞인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분들의 패기가 부럽네요. 그 사랑 놀음, 충분히 즐기세요.”

난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을 첫사랑에 미련은 없어야지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가 얼굴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앗, 다행히도 이루어지지 못할 제 첫사랑은 이미 지나갔답니다.”

율리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후 역시 미간을 찡그렸다.

흥, 어디 마음껏 고민하고 있어 봐라, 바보들.

난 그 둘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든 내버려 둔 채 복도를 빠져나왔다.

* * *

달튼의 단장실에 앉아 시원한 냉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카이사르가 들어왔다.

뛰어왔는지 숨은 헐떡거리지, 땀은 범벅이지, 얼굴은 달아올랐지…….

그런 몰골을 해선 쿵쿵거리며 내 곁에 다가오더니 협박하듯 묻는다.

“누구야.”

“뜬금없이 뭔 소리야?”

“헬레나의 첫사랑.”

“으잉?”

아니, 불과 몇 분 전에 황후랑 나눈 얘길 얘가 어떻게 벌써 알아?!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었어?”

“무슨 자의식 과잉이야, 그건.”

“처음이라면서? 내가 처음이라고 했잖아! 날 속였어? 농락했어? 희롱한 거야?”

“이, 이상한 소리 그만해!”

가만히 있어도 더워 죽겠는데, 카이사르의 단어 선택 때문에 다시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지!

“속 시원하게 말해 줘! 헬레나 첫사랑이 누군데!”

카이사르는 처절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처절한데, 이 자식은.

“레너드 오라버니.”

“대체 누가……, 뭐?”

“내 첫사랑. 레너드 오라버니라고.”

“아니……, 대체 왜?”

카이사르가 예상치 못한 답변에 고장 났는지 입술을 떨며 되물었다.

나는 손가락을 꼭꼭 접어 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왜긴. 착하지, 똑똑하지, 노력가지, 미남이지, 집안 좋지. 안 좋아할 이유가 있어?”

내가 어릴 때 레너드를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오라버니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친 오라버니만 아니었으면 내가 진작 어떻게든 해 버렸을걸.”

“뭘 어떻게 하는데?!”

“음, 여러 가지 말이야.”

“그런 건 나한테 좀 하라고, 나한테!”

“솔직히 카이사르랑 오라버니랑 비교하면 우리 오라버니가 훨씬 낫지 않아? 응?”

카이사르가 혼돈에 빠진 얼굴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호소하듯 소리쳤다.

“헬레나와 레너드는 가족 관계이지, 결코 연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음, 진짜 당황했나 보다. 존댓말을 다 하는 거 보니. 그나저나 멀미 날 것 같으니까 그만 좀 흔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와아, 헬레나 첫사랑이 나였어?”

레너드가 그 천연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단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내 오라버니. 타이밍을 아는군.

“앗, 오라버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너드에게 통통 달려갔다. 그리고 레너드를 품에 폭 안았다.

“카이사르. 이제 와 고백하는 거지만, 사실 우린 친남매가 아니었어.”

“하! 무슨 그런 재미도 없는 농담을……!”

카이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비아냥댔다.

그러나 레너드가 내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식었다.

“전하, 속여서 죄송했습니다. 사실 어릴 때 이미 헬레나를 제가 책임지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레너드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 거짓말은 아니긴 하다. 귀찮음의 끝을 달리던 나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책임져 주기로 약속했던 건 사실이니까.

레너드의 말에 카이사르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말은 신뢰를 못 해도 레너드의 말에는 고민이 되나 보다.

사실 나도 좀 의외긴 했다. 천사 같은 레너드가 내 짓궂은 장난에 장단을 맞춰 줄 줄이야.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이런……!”

와, 큰일이다.

난 분명 카이사르를 좋아하는데.

그런데 카이사르가 쩔쩔매는 걸 보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 방의 주인인 달튼이 등장했다.

건들거리며 방에 들어오던 달튼은, 이 기묘한 상황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엇…… 뭡니까? 이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막장 소설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은.”

달튼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우리의 뜨거운 사기극을 평가했다.

보는 눈이 꽤 정확하군, 달튼 경.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나는 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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