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단장실에는 나와 달튼, 레너드가 둘러앉았다.
오늘 대화에 굳이 낄 필요가 없는 카이사르도 한 자리 차지했다. 그것도 내 옆자리를. 더우니까 좀 떨어져라.
“오늘은 무슨 용건이시죠?”
내가 먼저 달튼을 향해 물었다.
“아, 뭐 큰일은 아니오. 실은 합숙 훈련을 가게 됐소만.”
“합숙 훈련이요?”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갤 갸웃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
“음. 바닷가 근처에 황가 소유의 별저가 있소. 기사단들이 돌아가며 그곳에서 합숙 훈련을 하지. 우린 다음 주요.”
“그렇군요. 그런데요?”
“해안 도시인데, 해변도 코앞이고 말이지. 조금만 나가면 꽤 큰 관광 도시도 하나 있고. 풍광도 아주 끝내준단 말이오.”
“아하, 네. 그래서요?”
“세상에 이만한 휴가지가 또 없다 이 말입니다, 교관.”
달튼이 계속해서 합숙 장소의 자랑만 늘어놓았다. 요지를 모르겠다. 대화가 계속 헛도는 느낌이다.
결국 나는 달튼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레너드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렇게 좋은 곳인데, 그게 왜?”
“단장님께서는 지금 같이 가자고 권하는 거야, 헬레나.”
“으잉?”
아니, 내가 왜?!
“교관도 여름휴가를 갈 것 아니오? 기왕 갈 거, 같이 가자는 거지.”
“그건 휴가가 아니지 않나요.”
“에헤이, 아무렴 우리가 교관에게 훈련을 시키겠소? 교관은 그저 푹 쉬고, 놀고, 즐기면 되는 거요.”
“아니, 전 집에 콕 박혀서 안 나올 건데요.”
“짧은 인생 즐겨야지. 집에 뭐 꿀단지라도 숨겨 놓았소?”
“그렇지만 귀찮은데…….”
바닷가, 그거 전생에서도 실컷 봤다. 뭐 그립다고 또 보러 가겠어.
‘아니, 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좀 더 세심하게 돌보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게으름은 적당히 피우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가는 게 낫겠지. 으음, 하지만……, 말이야 가서 놀기만 해도 된다지만, 분명 수련병들 훈련을 봐 달라고 할 것 같은데…….’
으으음 하고 나는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은 채 한참 고민했다. 내 안에서 다짐과 욕구가 치열하게 싸우는 기분이다.
“이게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요?”
달튼이 내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곁에 앉은 레너드가 아하하 하고 쓰게 웃었다.
“그래도 고민해 준다는 점에서 많이 발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장님.”
“그렇지.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상황이지.”
“응? 그 정도란 말입니까?”
카이사르까지 고갤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니, 달튼이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그렇게까지 놀라지 마. 아무리 나라도 민망하다고.
“좋아요. 같이 가죠.”
결국 나는 거국적인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내 대답에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깜짝 놀라더니 소파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진심이야?!”
심지어 하모니를 이루며 동시에 똑같은 질문을 한다. 이 인간들이 진짜.
“헬레나, 무리하는 거 아니지? 네가 싫으면 안 가도 돼.”
“혹시 또 해밀턴에게 협박 같은 거 받았어? 그렇다면 차라리 말을 해. 내가 반쯤 죽여 놓을 테니까.”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허둥거리며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다.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달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 지경까지 된 거요, 교관?”
“묻지 마세요. 저도 모르겠으니까.”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내 결심은 용을 무찌르고 세계를 지키는 것보다도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더 많구나. 그런 생각에 어쩐지 살짝 슬퍼지는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 *
설마 합숙 장소가 여기일 줄은 몰랐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넓은 정원과 4층짜리 대저택에, 나는 속으로 ‘으으음’ 하는 신음을 삼켰다.
“정말 크다. 그렇지?”
어느새 곁에 다가온 레너드가 저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얘기만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훌륭하네.”
당시 가장 힘 있는 공작의 저택이었으니 당연하지. 아, 참. 내가 황제로 만들어 줬지.
“본저 뒤편엔 훈련소도 따로 있고, 1층 홀도 넓어서 대련장으로 쓰기도 좋대.”
“그렇구나.”
“후원을 빠져나가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절벽이래. 거기서 보는 풍광이 정말 멋지다나 봐.”
레너드가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하길래, 나는 별로 기대되지도 않았지만 ‘와 기대된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사실, 이미 알고 있다.
이 집 주인이 가르쳐 줬으니까.
아주 오래전, 거기 놓인 그네에 앉아,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바다를 바라보았었으니까.
뜻밖의 향수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묵직한 느낌이 훅 내려앉았다.
“어떻소. 끝내주지 않소?”
달튼 단장이 나와 레너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어깨동무를 한 것이다.
아니, 레너드에게는 그렇다 치고 숙녀를 다루는 게 너무 험하잖아, 이 아저씨.
“알기로는, 에레즈 그레이 황제가 공작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저택이라던데.”
네에, 알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아하하하’ 하는 실소를 흘렸다.
“아가씨. 짐은 어떻게 할까요?”
달튼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는 와중에, 아고트가 커다란 트렁크를 양손에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아고트를 본 달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야, 교관의 메이드도 교관만큼 별종이군. 저 무거운 걸 양손에 하나씩…….”
“아고트도 검을 쓰거든요.”
“흐음. 혹시 기사가 되어 볼 생각은 없다 합니까?”
“네. 이 아이는 제 사람이라.”
내가 딱 잘라 거절했더니, 아고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초롱초롱한 아고트의 눈빛에 달튼이 ‘허허’ 웃으며 고갤 저었다.
“홀에 가 보면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일단 거기 내려놔.”
나 대신 아고트에게 대답을 한 달튼이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교관의 마음에 드는 방이 있다면, 그 방에 묵어도 좋소.”
“그래도 되나요?”
“레이디 퍼스트.”
오, 잘됐군.
나는 방긋 웃으며 아고트에게 명령했다.
“아고트, 관리인에게 3층 왼쪽 끝에 있는 방을 쓰겠다고 말해. 테라스가 있는 방이라 금방 알 거야.”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주문에 아고트가 깜짝 놀라더니, 이내 허둥지둥 짐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놀란 건 아고트만이 아니었다. 레너드와 달튼이 동그래진 눈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죠?”
뭐야. 나 뭐 잘못 말했나?
“엇……, 헬레나. 살펴보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정해도 괜찮아?”
“그 방이 가장 좋은 방이긴 한데……. 혹시 교관, 이미 알고 있었소?”
아차.
나는 지금 이 저택에 처음 온 사람이다. 저택을 한 번 돌아본 후에 골랐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여기 올 때마다 매번 그 방에 머물렀으니까. 익숙해서 골랐는데,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재빠르게 변명의 말을 내뱉었다.
“으음,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그 방이 좋다는 얘길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물거리는 내 대답에 달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오호라. 해밀턴 그 양반이구만.”
“오, 맞아요. 녹트 자작님께 들은 정보예요!”
미안해요, 해밀턴! 앞으로 고지식하다느니 벽창호라느니 하는 소리 안 할 테니까!
그나저나.
“그런데 정말 그 방이 가장 좋은 방인가요?”
“으음, 침실 중 가장 넓고, 풍광도 좋으니까.”
그런가.
에레즈는 매번 나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주던 것이었나. 50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다니, 어쩐지 그에게 미안해지는데.
‘이것도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 사람이어서였겠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긴, 황제 자리를 물려줬으니 보답은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대신 카이사르한테 잘해 주자. 후손한테 잘해 주면 에레즈도 저세상에서 기뻐하겠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