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71/156)

* * *

건물 내부는 여기저기가 틀린 그림 찾기 하듯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서쪽 회랑에 깔린 카펫의 색깔이 바뀌었다든지, 귀퉁이가 조금 부서졌던 층계참의 장식장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든지, 침대 위치가 달라져 있다든지.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나 구조는 500년 전 그대로라, 어쩐지 묘한 향수가 느껴졌다.

“좋네, 이런 것도…….”

이틀째의 침실 테라스.

나는 흔들의자에 기대듯 누워 중얼거렸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있자니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밀려왔다.

“모처럼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는 기분이 드네요.”

곁에 앉아서 부채질을 해 주던 아고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네. 사실 저, 바다 처음 보거든요.”

“헉, 정말이야?”

하긴, 내가 아고트를 처음 만난 게 12살 때였던가.

게으른 주인이라 좀처럼 어디 돌아다니질 않으니, 메이드인 아고트도 덩달아 경험 부족에 시달리는구나.

‘좀 더 신경 쓸걸.’

한 번 깨닫기 시작하니, 왜 이리 주변에 무심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중에 해변 나갔다가 올까, 아고트?”

“와,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우린 휴양 온 거잖아, 휴양. 훈련을 하러 온 게 아니라고.”

그렇다.

달튼의 권유로 기사단 합숙 훈련에 끼어서 오긴 했지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휴양이다, 휴양.

분명 그럴 터인데.

“하나, 둘, 셋, 넷!”

“소리가 작다! 구령 다시!”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좋아, 이대로 열 바퀴 더!”

“……좀 조용히 하라고!”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향해 꽥 소리를 내질렀다.

층간 소음이 심해도 너무 심하잖아!

난간 바로 아래 후원, 적기사단의 단원 녀석들이 달튼의 구령에 맞춰 구보를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렇다. 심지어 다들 웃통도 벗어젖히고 있어, 풍기 문란도 한몫하고 있다.

“오오, 교관!”

“뭐가 ‘오오, 교관’이에요?! 훈련을 하려면 훈련장 안에 들어가서 하라고요!”

나는 건너편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합숙 장소로 쓰기 시작하면서 훈련장도 따로 지었다면서, 왜 정원을 뛰어다니면서 시끄럽게 하냔 말이다!

내가 버럭 화를 내는데도 달튼은 껄껄거리며 웃기만 했다.

“건물 안에서만 하면 공기 좋은 곳으로 합숙을 나온 의미가 없잖소?”

“그럼 정원이나 해변을 달리면 되잖아요? 왜 딱 제 방 아래 후원에서 구보를 뛰는 건데요?”

“어허허허허허, 그러게 말이오?”

달튼이 눈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 계산된 행동임에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들 구보를 뛰다 말고 내 방 테라스 밑에 우르르 몰려와 떠들어 댈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랑 대련하시죠, 교관님!”

“검 챙겨 오신 거 다 압니다!”

“수련병들 말고 저희도 상대 좀 해 주시죠! 저희도 공녀와 한 번 제대로 붙어 보고 싶습니다!”

기사부터 수련병들까지 아주 난리다. 누가 보면 시위라도 일어난 줄 알겠다.

더구나 나와 마수 토벌을 함께했던 몇몇 녀석들은 내가 동요할 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교관님이 상대 안 해 주시면 부단장님하고만 종일 대련할 겁니다!”

“뭐야?! 내 오라버니 귀찮게 하지 마!”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토벌대 선발할 때 내게 이죽대며 시비를 걸었던 호크가 손을 흔들며 히죽댔다.

다른 건 다 흘려들어도 그 말은 무시 못 하겠다.

“아고트, 내 검!”

“네? 앗, 넵!”

아고트가 서둘러 침대 밑에 넣어 두었던 무기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내 검 두 자루를 꺼내 내 곁으로 총총 다가왔다.

나는 검 두 자루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오, 교관! 오시는 거요?”

“그래요. 다들 딱 기다려요.”

“이봐, 호크! 교관님 오신단다! 네가 가서 모시고……!”

“필요 없어요.”

달튼의 말을 자르고 내가 외쳤다.

다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게 주목했다.

나는 한 손으로 난간을 쥐고 2층 테라스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고, 공녀!”

“교관!”

히죽대던 단원들이 드레스 차림으로 2층 난간을 뛰어내리는 내 모습에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2층 정도야 나한테는 별것 아니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렸겠는가.

나는 가뿐하게 단원들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허둥거리던 단원들이 질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게 꽤 재미있었다.

나는 검을 각각 양손으로 나누어 쥐고 단원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자 그럼, 누가 먼저 나에게 패배하러 올 건가요?”

* * *

그렇게 시작한 자유 대련은, 유감스럽게도 전혀 재미가 없었다.

실력이 좀 비등비등해야 반전도 생기고 긴장감도 있을 텐데, 그저 내가 일방적으로 도전해 오는 기사들을 차례차례 고꾸라뜨리는 게 전부였다.

“꺄아, 역시 우리 아가씨가 최고예요! 아가씨 짱!”

등 뒤에서 들리는 아고트의 열렬한 응원만이, 이것이 일방적인 폭력이 아님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대략 열댓 명의 기사들을 쳐부순 후에야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오른손에 쥔 검을 어깨에 걸친 채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부추겨 놓고 이렇게 무료하게 만들다니…….”

내 중얼거림에, 내게 패배를 선언하고 돌아섰던 기사들의 얼굴에 굴욕감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갈아입지 말 걸 그랬네요. 드레스 입고 싸우는 핸디캡이라도 줄 걸 말이에요.”

우후후후. 나는 악당의 미소를 지으며 이죽댔다. 내려다보는 내 시선에, 기사들이 크아아 하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마왕……, 마왕이다! 대마왕이 강림했다……!”

“지금까지는 황태자 전하가 최강인 줄 알았는데, 우린 속고 살아왔어……!”

“부단장! 구경만 하시는 겁니까? 나서서 복수해 주셔야죠! 부단장님도 우리 편이지 않습니까!”

직접 부딪쳐서 안 되니, 기사들이 레너드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공적 하나 없던 시절부터 적기사단의 기사들을 쓰러뜨려 그 이름을 드높였던 나의 첫 번째 제자가, 단원들의 요청에 싱글싱글 웃었다.

“엇, 지금 제가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입니까?”

그러더니 검을 뽑아 척척 걸어서 내 앞에 다가왔다.

응? 우리 천사 같은 오라버니가 날 향해 검을 겨누는 건가? 라고 고민했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지.

레너드는 내 곁에 나란히 서더니, 기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이다.

“전 그러면 헬레나 편인 걸로.”

“치사하다! 자기만 살겠다고!”

“배신자다! 부단장이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우릴 배신했다!”

기사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달튼이 멀찍이 서서 껄껄대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쯤에야 나는, 이 인간들이 훈련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놀 구실만 찾고 있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난 거기 놀아난 건가.’

쓴웃음이 다 나오네.

아니……, 딱히 놀아난 건 아닌가.

‘조금은……, 재미있나?’

목적도 없고, 성과도 없고, 그저 왁자지껄하기만 할 뿐인 시간.

치열할 필요도 없고, 나를 보호해야 할 필요도 없는 관계.

“아가씨, 피곤하지 않으세요?”

이젠 나 대신 레너드와 한판 붙기 시작한 기사들은 내버려 두고, 아고트가 어느새 수건을 들고 내 곁에 다가왔다.

나는 수건을 받아 들며 작게 웃었다.

“응, 괜찮아. 괜찮다고 해야 할지……, 나쁘지 않네, 이런 것도.”

나는 기사들 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생각만큼 귀찮은 일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쯤은 마음을 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다른 사람 말고, 나와 좀 더 친밀한 관계가 되도록 노력해 주는 게 어떨까?”

“……?!”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당겨 안는다. 뒤이어 귓가에 들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

덕분에 뒷덜미가 오싹했다.

누구인지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다정하지만 희미하게 질투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만 들어도 말이다.

“카이사르!”

뒤를 돌아보니,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나 없이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노는 거 보니 질투 나는데.”

“아니, 너……, 가 아니라, 전하께서는 기사단 소속도 아닌데 왜 여기에 계신 거죠?!”

“헬레나가 여기에 있으니까?”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잖아!

“그나저나 훈련에 매진하는 적기사단 여러분을 보고 있으니, 황태자로서 흐뭇함을 감출 길이 없군 그래.”

카이사르가 기사단을 향해 말하며 씩 웃었다. 왁자지껄하던 기사단 녀석들이 그 악당 같은 미소에 그 즉시 모두 차렷 자세가 됐다.

카이사르가 내 왼손에 쥐어진 검을 가져가 쥐더니, 기사들을 향해 겨누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이 몸이 좀 끼어들어도 되겠나?”

‘끼어들지 마!’, 라고 외치고 싶은 듯한 단원들의 표정이 꽤나 애처로웠다.

‘대체 뭘 위한 합숙인지 모르겠네.’

기사들과 카이사르의 2차전에 앞서, 나는 이 목적 불분명한 합숙에 결국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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