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이사르와 기사들이 벌인 2차전은, 뭐 설명할 것도 없이 카이사르의 완승이었다.
차례로 쓰러지는 단원들 앞에서 비열하게 웃는 카이사르는 악당 그 자체였다.
저런 인간이 내 남자라니.
짜릿하군.
그렇게 한바탕 학살……, 이 아니라, 훈련을 마친 후 달튼, 레너드와 함께 저택 휴게실로 되돌아왔을 때.
“앗, 이게 누구야. 녹트 자작 아닌가?”
“자작님, 역시 오셨군요.”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달튼 단장. 페레스카 소공작.”
방에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녀!”
차례로 인사를 한 해밀턴이, 날 보자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로 그가 나를 반기는 이유는, 무언가 넋두리를 늘어놓을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자작님.”
“공녀! 글쎄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으음. 나한테는 인사치레도 없이 바로 고자질 시작인가.
“저희가 여기 왜 온 줄 아십니까?”
아,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하다.
수도에 있어야 할 인간이 여기에 왜 있는 거냐, 카이사르.
“전하께서 엘그리드에서 성회에 참여하겠다며 여기까지 오신 겁니다!”
“성회 참여요? 업무차 온 건가요? 그러면 뭐, 하는 수 없는…….”
“하는 수 없긴요!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였단 말입니다. 수도에서 열리는 큰 행사도 아니고, 지방행사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글쎄, 나에게 동의를 구해도 말이지.
“뭐야. 벌써 고자질을 시작한 거야, 해밀턴?”
해밀턴이 날 붙잡고 하소연하는 사이, 카이사르가 방에 들어왔다.
이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듯,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그는 곧장 카우치에 드러누우며 해밀턴의 말에 반박했다.
“고자질이라니! 이게 고자질이라니요, 전하!”
“뭐가 문제야? 지역의 일정도 두루 살피고 신경 쓰는 것이 군주의 미덕이잖아.”
그 얄미운 태도에 해밀턴이 ‘으윽’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전하께서 언제부터 군주의 미덕에 신경이나 쓰셨다고!”
“어제부터?”
“서류나 제때 처리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라고요!”
“업무를 하루 이틀쯤 밀리는 것은 인간의 미덕이고.”
“으아아아악, 진짜!”
……불쌍한 해밀턴.
나와 달튼, 레너드는 셋 다 똑같은 표정이 되어 해밀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엘그리드면 여기에서도 꽤 멀지 않나요? 말을 달려도 두 시간은 걸릴 텐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타앙!
레너드의 말에 흥분한 해밀턴이 테이블을 부서질 듯 내리쳤다.
“아니, 숙소를 잡으려면 엘그리드에 잡아야지! 아니면 성회에서 묵으시던가! 왜 여기에서 묵으시겠다는 거냐 이 말입니다!”
으으음, 왜지.
왜 내가 미안해지지.
달튼과 레너드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어서 굉장히 부담스럽다. 나도 아니까 제발 앞을 보라고, 둘 다.
“이렇게 좋은 황가 소유의 대저택을 두고 어디서 묵으란 말이야?”
이 와중에도 카이사르는 자신을 변호할 말이 있는지, 도리어 인상까지 찌푸린 채 해밀턴에게 반박했다.
“일도 제대로 했고, 성회 장로들도 만족해했잖아. 대체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두 시간이나 말을 달려 제 엉덩이가 쪼개질 것 같단 말입니다!”
헉, 나도 모르게 해밀턴의 엉덩이에 시선이 꽂히고 말았다. 미안해라.
뭐, 달튼과 레너드도 해밀턴의 하체를 쳐다보고 있으니 나만의 실례는 아니게 됐지만.
“마차로 달리면 너무 늦다고. 지름길로 오기도 힘들고.”
“공녀, 제발 전하께 한마디 좀 해 주십시오!”
“엣?! 제가요? 왜요?”
왜 잔소리의 화살이 가만히 있던 나에게 날아오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공녀 때문 아니겠습니까?! 공녀께서 여기 계시니 없던 일정 만들어서 여기 오신 거잖아요!”
“아니, 그게 왜 제 탓…….”
난감하군.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제일 난감하다.
그때였다.
“해밀턴.”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카이사르가 해밀턴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해밀턴이 ‘흡’ 하고 숨을 참으며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일어나 앉은 카이사르가, 미소 한 조각 걸리지 않는 표정으로 해밀턴을 노려보았다.
늑대가 재림했다.
해밀턴, 안녕…….
“지금 감히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거지?”
해밀턴과 카이사르는, 내가 카이사르를 알기 전부터 함께해 왔던 사이다.
때문에 해밀턴은,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카이사르에게도 거침없이 잔소리를 해 왔다. 카이사르 역시 그런 해밀턴을 귀찮아하면서도 다 받아 주었고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 잔소리 좀 했다고 사람이 저렇게 돌변할 줄이야.
‘음, 이건 좀 끼어들어야 할지도.’
해밀턴은 신뢰해도 좋을, 카이사르의 절대적 아군이다.
괜히 관계를 어그러뜨릴 수는 없지.
“전하.”
나는 일부러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자작님은 전하가 걱정되어 하는 말씀이잖아요? 그렇게 겁을 주시면 안 되죠.”
내 질책에 카이사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자신은 날 위해 화를 낸 건데, 왜 자신을 질책하느냐며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내 잘못이라는 거야?”
카이사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카이사르의 성격을 잘 아는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나는 물러남 없이 카이사르를 타박했다.
“네. 전하의 잘못입니다.”
나와 카이사르는 한참 동안 눈싸움을 했다. 긴장감이 팽팽하다.
뭐라도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카이사르가 해밀턴에게 사과했다.
“겁줘서 미안했다, 해밀턴.”
으잉?!
나머지 세 사람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됐다. 카이사르가 너무나 순순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됐지?”
심지어 내 쪽을 쳐다보며 확인까지 받는다.
나는 칭찬의 의미로 카이사르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전하.”
“큭……, 크윽, 늑대 위에 대마왕……, 큭큭큭……!”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달튼이, 의미 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 * *
그 후로도 몇 시간쯤 하소연을 늘어놓던 해밀턴을 달래 돌려보내고 나니, 깊은 밤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그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도 하소연을 할 생각이 들다니…….’
나는 해밀턴의 용기, 혹은 눈치 없음에 내심 감탄했다. 어떤 의미로는 카이사르의 보좌로 딱 맞는 사람일지도.
달튼과 레너드는 내일 훈련 준비로 일찍 돌아갔고, 카이사르는 내 방에 남아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창가 곁에 앉아 책을 읽는 고요한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저 얼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문득 울컥한단 말이지.’
신은 불공평해.
“……혹시 아까, 불쾌했어?”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그림 같은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던 카이사르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갤 돌렸다.
“뭐? 아까, 뭘 말이야?”
“내가 카이사르가 아니라 자작님 편을 들었던 거.”
“그게 왜 불쾌한 일이지?”
“카이사르도 체면이라든가 있을 거 아냐. 내가 끼어들어도 될 문제였을까, 지금 좀 후회 중이야.”
내가 옆으로 힐끗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카이사르는 내 친구이자 연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황태자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라면 무슨 말이든 못하겠느냐마는, 달튼이나 해밀턴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그를 질책하는 게 옳았을까 문득 염려가 됐다.
내 불안함을 읽은 것일까. 카이사르가 피식 웃더니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내가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적어도 나는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라고 늘 옳은 말을 하는 것만은 아냐.”
“그렇지만 옳은 선택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카이사르의 커다란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졌다.
그 체온은 내 불안한 마음을 한 점 남기지 않고 녹일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거야. 헬레나는 나에게 길잡이 같은 존재거든.”
“그래도 자존심 상하지 않아? 고작 공녀에 불과한 내 말에 휘둘린다고 생각하면.”
나는 지난 세월 내가 마주쳐 온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많은 이들이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위와 아래를 나누려 애썼고,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대개 남자들은 위를 차지하려 발버둥 쳤다.
황제가 된 이래 나는 ‘위’였지만, 그럼에도 나를 깔보거나 낮잡아 보려는 게 사내들 아니었던가.
‘특히나 카이사르는 고집도 세고 고고한 성격이니까.’
그가 다른 이의 명령을 듣고 고갤 숙이는 건, 아무리 나라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건, 자존심이 상해야 할 일이야?”
내 질문에 도리어 카이사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나는 헬레나에게 만큼은 자존심 내세우고 싶지 않아. 상처 주느니 받는 게 낫고, 이기는 것보다 지는 쪽이 나아.”
“왜 그런 거야?”
왜 그런 걸까.
남들에게 냉혈한이라 불리는 이 남자가, 왜 나에게만큼은 이렇게 한없이 약해지는 걸까.
왜 이렇게 약한 말을 하는데도, 난 이 남자가 나보다 강해졌다는 착각이 드는 걸까.
“날 좋아해서?”
“널 좋아해서.”
카이사르가 내 말을 따라 대답했다.
“어쩐지 오늘 처음으로…… 카이사르가 나보다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난 태어난 순간부터 헬레나보다 어른이었는데.”
카이사르가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나는 지금,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패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건 분명 기분 좋은 패배일 테지.
‘조금 알 것도 같네.’
전생에서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인생이라 더 이상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일도, 나를 바닥 없는 무료함에서 구원해 줄 사람도 없으리라 체념했다.
그러나 아직 내가 모르는 일도, 알고 싶은 일도 많이 있다.
그것을 이 고집 센 남자가 가르쳐 준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장식장 위의 시계를 확인한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엇, 잠깐…….”
그런 그를, 내가 붙잡았다.
무의식이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의 소매를 잡아 세우고 나도 놀랐으니까.
“아직 할 말이 더 있는 거야?”
카이사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으음. 변명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민망하기 그지없다. 일해라, 나의 임기응변!
“피곤하지 않아? 밤이 늦었으니까, 중요한 얘기가 아니면 내일 얘기해도 돼.”
“기다려 봐. 중요한 얘기일 거야. 중요하니까 카이사르를 붙잡은 거겠지.”
“그게 뭐야. 일단 붙잡아 놓고 이유를 생각하는 건가?”
“시끄러워. 생각 중이랬잖아.”
“아얏.”
찰싹. 카이사르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더니, 카이사르가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 주고 싶다.
그가 나에게 전력으로 마음을 열어 주는 것만큼, 나도 내가 가진 것들을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카이사르. 언제 돌아가?”
“내일 정오에 돌아갈 예정인데.”
“그러면 밤엔 못 있겠네?”
“아하, 알겠다. 혼자 잠들기 외로운 거지? 그거라면 언제든 곁에서 함께……, 아얏.”
찰싹, 찰싹.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그의 책임인 양, 그의 손등을 몇 차례 더 때렸다
“그게 아니라, 나랑 밤 산책 가지 않을래?”
“밤 산책?”
카이사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해변 건너편에 동굴이 있는데, 거기 같이 가지 않을래?”
“아……, 어딘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밤이라서 배를 띄우기 어려울 텐데.”
“배 띄우지 않아도 돼.”
“그럼 헤엄쳐서 가게? 물이 얕긴 하겠지만 밤이라 위험해.”
“헤엄치지 않아도 돼.”
“뭐? 그럼 무슨 수로 가려고?”
후후후,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음을 흘렸다.
“다 방법이 있어.”
아마 지금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지 않을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카이사르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엄청난 걸 보여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