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73/156)

* * *

창 하나 나지 않은 어두운 복도.

들리는 것이라고는 나와 카이사르의 발소리뿐이다. 빛이라고는 카이사르가 쥐고 있는 등불이 발치를 비추는 정도였다.

이 길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사박거리며 걷기 시작한 지 약 10분쯤.

내 손을 잡고 앞서 걷던 카이사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헬레나.”

“응?”

“대체……, 이런 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이미 물어놓고선 뭘 ‘물어봐도 될까’인가. 뭐, 당황한 탓이겠지만.

‘하긴,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지.’

이 저택은 그레이 가문의 소유지였다.

그런데 그레이 사람들도 모르는 이런 ‘비밀 통로’를, 처음 방문한 내가 알고 있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렇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저택의 비밀 통로를 걷고 있었다.

“우연히 알았어.”

“그래, 우연히 말이지. 우연히 네 개의 설치물을 우연히 순서에 맞게 건드린 후, 우연히 회화 뒤에 숨겨진 벽면을 우연히 밀어서, 우연히 문이 열리고 우연히 통로가 나왔다 이거지?”

“그렇지.”

“그리고 우연히도 그 통로가 해변 건너편 동굴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았고?”

“우연이야, 우연.”

“하아.”

나의 뻔뻔한 대답에 결국 짧은 한숨이 돌아왔다. 어이없어하는 카이사르의 태도가 우스워 결국 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정말 널 모르겠어.”

“그래?”

“널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느끼거든.”

“예를 들면?”

“으음……, 마수 토벌 때, 마수들이 네게만 달려들었던 일이라든가.”

아, 맞다. 그랬지.

그때 그 현상을 가장 먼저 의심했던 건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가 그만큼 날 지켜보고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나조차 인지하지 못한 내 일면을, 어쩌면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분명 마수의 가죽에서 발견된 문양과도 연관 있는 거겠지.”

카이사르의 담담한 혼잣말이 들렸다.

난 고갤 들어 그를 보았으나,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고로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그저 넓은 어깨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만 등불의 그림자에 어른거려 보였을 뿐.

“그런데도 나에게 묻지 않았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일부러 한 톤 높여 말을 걸었다.

그제야 카이사르는 힐끗 내 쪽을 돌아보았다. 금세 다시 앞쪽으로 고갤 돌리긴 했지만.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준비?”

“나에게 말해 줄 준비.”

“내가 말이야?”

“그래. 헬레나는 아직 많은 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

많은 것이라.

내 전생을 말하지 않은 것 외에, 그가 보기에 나는 아직 무엇이 덜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총총 속도를 높여 그와 속도를 나란히 했다. 내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자 카이사르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뛰지 마. 발밑을 잘 보고 걸어야지.”

“괜찮아, 괜찮아. 안 넘어져.”

그렇게 대답하며,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마수 때려잡는 건 걱정 안 하면서, 넘어지는 건 걱정 돼?”

“헬레나는 큰일은 잘 해치우는데, 작은 일에 덤벙대고 바보같이 구는 경향이 있어.”

“뭐야, 그게.”

반박은 했지만, 맞는 말 같아서 더는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이 길은 옛날에 친우였던 사람이 가르쳐 준 길이야.”

“친우? 헬레나한테 나 말고 친우가 있어?”

“혼날래?”

“아니, 친우에게 들었다고 해도 이상한데. 그레이가가 모르는 그레이 저택의 비밀 통로를, 그 친구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대?”

“삑, 시간 초과. 대답은 여기까지.”

내가 손날로 허공을 내리찍듯 휘두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묻고 싶네. 그레이가의 소유인데 왜 그레이가 사람들은 모르는 거야?”

“에레즈 그레이가 황위에 앉으면서, 이 저택의 관리는 가령에게 모조리 떠맡겼다나 봐.”

“저택을 아예 비웠다는 거야?”

“응. 다른 친척이나 방계 사람에게도 저택을 물려주지 않았다더군. 전해 오기로는, 그래.”

거기까지 말한 후 카이사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레즈 그레이 사망 후에 비밀 통로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있었는데, 끝내 찾아내지 못했어. 백여 년쯤 지난 후부터는 황가의 별장으로나 사용하고 있고.”

“그랬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에레즈가 가르쳐 준 덕분에 알고 있는 거다.

가주에게만 전승되는 비밀이라며 내게 이 길을 가르쳐 줬다.

가주에게 전승되는 걸 가문 사람도 아닌 내게 가르쳐 줘도 되냐 물었더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제가 주군께 숨길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라고.

‘나한테는 그래 놓고, 후손들한테도 안 가르쳐 줬다 이건가. 에레즈 녀석, 의외로 삐딱한 구석이 있었네.’

하긴.

내가 내 형제들을 말살할 때 그 녀석도 함께했었던 걸 생각하면, 마냥 선량한 녀석은 아니었지.

나에게만 선량한 녀석이었을 뿐.

‘응?’

잠깐.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에레즈와 카이사르는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닌 것 같다.

‘성격도 좀, 닮은 건가?’

그러나 나는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집어삼키듯 고갤 저었다.

‘아니, 에레즈는 날 여자로 좋아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내게 충성을 바치는 남자와, 내게 연심을 바치는 남자는 근본부터 다르지.

“내가 진실을 다 말해 버리면 카이사르는 까무러칠 거야.”

나는 카이사르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작게 웃었다.

“헬레나가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온 대마왕이라고 해도 까무러치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걱정 마.”

“푸하하. 대마왕이라니.”

“어쨌든 비밀이 있기는 있다는 얘기로군, 그거.”

결코 말할 수 없는 비밀.

나는 분명 죽는 순간까지 카이사르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쓸쓸해졌다.

“미안. 그렇지만 말할 수 없어.”

비밀은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한계점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것만은 말해 두고 싶었다.

“그럼 됐어.”

“응?”

“언젠가 말하고 싶어질 때, 그때 말해 주면 돼.”

“……평생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래도 상관없어. 그게 옳은 일이니까 말하지 않는 거겠지.”

그렇게 말한 카이사르가 날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혹여 섭섭해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의 미소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했다.

“혹시 헬레나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내가 물으면, 헬레나는 한마디만 하면 돼.”

“뭐라고 하면 되는데?”

“날 사랑한다고.”

아아, 역시.

‘이 녀석의 맹종은 분명, 에레즈를 닮았어.’

어쩌면 그의 저택에서, 그와 함께 걸었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등불에 흔들리는 카이사르의 모습은 영락없는 에레즈의 그것이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한참을 걸은 끝에, 우리는 출구에 다다랐다.

희미한 바다 내음과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전방에서 잔머리가 살포시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밀려오고 있었다.

“가자, 헬레나.”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아득히 먼 옛날, 나를 이끌어 이 길을 걸었던 에레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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