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74/156)

* * *

옛날에는 이 동굴 안쪽에 작은 배가 한 척 숨겨져 있었다.

저택이 공격당할 경우, 이곳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배가 없네.’

누군가 배를 발견하여 처분한 것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해 삭아 없어진 것일까.

“여기가 그 해안 동굴이라니…….”

카이사르가 동굴 안을 둘러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동굴에 몇 번이나 메아리치며 돌았다.

“와 본 적 없어?”

“낮엔 몇 번이고 와 봤지. 하지만 밤엔 위험해서 못 와.”

이 동굴에 오려면 배를 띄워야 한다. 그러나 오는 길의 물이 얕고 소용돌이가 많아, 밤에는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낮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걸. 다른 동굴이라고 해도 믿겠어.”

“정작 나는 낮에는 이 동굴에 와 본 적이 없어서 몰라.”

“뭐? 분명 저택 관리인이 관광지로 추천했을 텐데.”

“번거로워서.”

“음……, 그래. 잠시 잊고 있었네. 내 옆에 있는 이 여자가 헬레나 페레스카라는 것을 말이야.”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나는 카이사르를 손짓으로 불러, 동굴 더 깊은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자. 보여 주고 싶은 건 저쪽에 있으니까.”

카이사르는 순순히 내 말에 응했다. 우리 두 사람은 동굴 더 깊은 곳을 향해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그곳에는, 두 명이 간신히 몸을 붙여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 나왔다.

“여기야.”

나는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뒤이어 카이사르가 내 곁에 앉았다. 워낙 덩치가 큰 남자다 보니, 다리를 접어도 공간이 꽉 찼다.

“좁군.”

카이사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팔로 감싸, 나를 폭 안는다.

“이렇게 하면 좀 낫지?”

“좁아서 안은 거야, 안고 싶어서 좁은 걸 핑계로 삼은 거야?”

“둘 다.”

“정말이지…….”

별수 없다는 양 투덜대면서도, 나는 카이사르의 어깨에 고갤 기댔다. 이제는 그의 품 안이 그다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위에 봐, 카이사르.”

“위?”

내 말에 카이사르의 고개가 위를 향해 꺾였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터져 나오는 감탄사.

“와아…….”

까마득한 높이에 크고 동그란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으로 별이 촘촘했다.

마치 성회의 돔 천장 같다. 그러나 아무리 별을 아름답게 새겨 넣은 천장이라 해도, 지금 여기서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르리라.

“별이 원래……, 저렇게 밝았던가?”

“여긴 어두우니까 더 밝게 보이는 거야.”

……라고, 내가 카이사르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에레즈가 한 대답 그대로 내가 답했다.

“가운데 있는 붉은색 별은 길잡이 별이야. 여기 언제 오든, 저 별은 변함없이 볼 수 있대.”

“놀랍군. 이 동굴 안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응. 그렇지.”

설핏 미소가 번진다.

이곳에서 보는 하늘은 500년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길잡이 별은 조금도 궤도를 달리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헬레나에게 이런 장소를 알려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 왔다. 아마, 일부러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닐까.

분명 내게 듣고 싶은 말은 질문의 정답이 아닐 것이다.

나는 고갤 들어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길잡이 별처럼 조금의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카이사르.”

나는 아득히 들리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그에게 숨을 내뱉듯 말했다.

“너를 사랑해.”

어떤 비밀도 비밀로 남겨 줄 수 있을 마법의 말.

그가 내 허리를 안으며 내 목덜미에 고갤 묻었다. 뜨거운 게 나인지 그인지 분간이 안 됐다.

약아 빠진 늑대.

오로지 내게만 복종하는 맹수.

‘오늘 카이사르에게 안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렘, 두려움,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에 저며 든다. 나는 떨리는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언젠가 내 황후가 되어 준다면 좋겠어, 헬레나.”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지만.”

카이사르가 목덜미에 키스하며 말했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에 닿아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아직은 널 지킬 수 있을 만큼 내가 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청혼할 사람은 너뿐이야.”

그 날이,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안다.

“부디, 날 기다려 줘.”

이것은 기약 없는 약속이다. 어쩌면 그의 이기심이고, 어린애의 어리광이다.

나는 카이사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하긴, 황태자비 말고 바로 황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브란테와 발레르.

그 두 가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도우며 나 역시 깨달은 바가 컸다.

내가 그의 약점이 될 수는 없다. 그 역시, 내가 위험한 자리에 서서 된서리를 맞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카이사르의 머리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상대가 누구든 이겨. 지지 마, 카이사르. 나는 널 패배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이 세상 전부와 싸워도, 너는 이겨야 한다.

그 상대가 나라 하더라도, 너만은 이겨야 한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 * *

열띤 그의 얼굴에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빛이 떠올라, 나는 웃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조금 웃었다.

때때로 소년 같은 눈빛을 할 때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그에게 세계를 다 안겨 주고 싶어진다.

나의 살갗 위를 더듬어 가는 그의 손길이 애달파서, 나는 그의 몸에 손톱을 세웠다. 더운 호흡과 시끄러운 심장 소리에 정신이 아득했다.

“아―”

끝내 잇새로 새어 나온 내 목소리를 덮듯, 그는 격렬하고도 거침없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배운 것 없이 우는 법을 터득한 갓난아이처럼, 본능적으로 서로를 잠식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애초부터 서로를 갈구했다는 듯이.

‘세계는, 이렇게 태어나는 거구나.’

여름의 밤은 어째서 이렇게도 짧은 것일까.

그의 등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를 쓰다듬으며,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꿈을 꿨다.

* * *

나의 양옆에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사내 둘이 앉아 있었다. 한쪽은 카이사르일 테고 한쪽은 에레즈일 텐데, 둘 다 워낙 닮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폐하께서는 모든 이들의 주인이시며, 이 제국의 지배자이십니다.”

왼쪽에 앉은 이가 말했다.

아, 이쪽이 에레즈구나.

“누구도 폐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제가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제가 곧 폐하의 검이며, 폐하를 지키는 방패입니다.”

그래, 에레즈는 이런 녀석이었지.

이런 녀석이라면 제국을 맡겨도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가 정말 행복했어?”

오른쪽에 있는 이가 말했다.

이 건방진 말투를 보니, 이쪽은 카이사르임이 틀림없다.

“에레즈 그레이가 지켜 주던 그 무소불위의 권력이 정말 널 행복하게 해 줬어?”

행복.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어.

어릴 때부터 그저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던 인생이었다. 나의 최선은 삶을 향한 최선이었다.

어쨌든 난 내 백성들에게 그리 나쁜 황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만하면 괜찮은 삶 아니었을까?

“에레즈 그레이는 글러 먹었어.”

네 조상한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카이사르?

“모두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결해 달라고 청하고, 네 재능을 대의를 위해 사용해 달라 할 테지만―”

꿈속의 카이사르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지켜 줄게. 네가 네 행복을 찾는 일에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도록.”

“그것이 제가 당신의 곁에 되돌아온 이유입니다.”

“그것이 내가 너의 세계에 태어난 이유야.”

에레즈의 목소리와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둘은 목소리마저 닮아서,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상한 꿈.’

에레즈와 카이사르가 양쪽에서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마치 커다란 개 두 마리가 제 주인에게 칭얼거리며 애정을 요구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고마워, 둘 다.”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 * *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고 나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을 것 같다…….’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고단함이 채 가시질 않았다. 더구나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하긴, 이건 체력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귀가 뜨거워졌다.

나는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만둬!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라고!”

창피하다.

창피해 죽을 것 같다.

어젯밤의 나는 제정신이었나?

아니,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다. 제정신이고서야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얼굴이 화끈거려서 살 수가 없다.

얼른 잊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다.

나를 부드럽게 만져 주던 카이사르의 손길과, 무너지는 날 끌어 안아 준 우람한 팔, 열띤 눈동자, 슬쩍 찌푸리던 미간, 땀에 젖어 있던 근육의 그늘진 자리…….

……으아아악, 그만! 그만 생각해!

“변태같이 뭘 자꾸 반추하고 있는 거야, 나는……!”

얼굴에 몰린 열기가 가시질 않는다. 카이사르의 손길이 닿았던 몸 여기저기도 괜히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후유증……, 이렇게 셀 줄이야…….”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음, 그렇지만 나쁘지만은 않았지. 아니, 나쁘긴커녕 오히려 좋았다고 봐야…….’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좋았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카이사르의 표정도, 목소리도, 체향도, 모든 게 생소하면서도 즐거웠다.

이래서 다들 연애하는 거겠지.

‘연애…….’

으음, 부끄러움이 가실 틈이 없군.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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