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얼마 지나지 않아 아고트가 침실에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으응……, 일어나긴 했지.”
나는 부스스한 몰골을 매만질 생각도 없이 이불에 처박힌 채 중얼거렸다. 몽롱한 내 목소리에 아고트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목이 잠기신 것 같은데. 혹시 감기라도?”
“응? 아니 이건……, 어, 어제 대련하면서 너무 소릴 질렀더니.”
커흠, 커흠. 나는 머쓱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침에 왔을 때 완전히 곯아떨어지셨길래 일부러 안 깨웠어요.”
“그랬구나. 잘했어. 사실 아직도 피곤해.”
피곤할 수밖에. 어제 밤새 힘낸 건 둘째치고, 동쪽이 어슴푸레 밝아 오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으니까.
“저런, 어제 단원들 상대하시는 게 어지간히도 피곤하셨나 봐요.”
“으응……, 그렇지…….”
진실을 말할 수 없으니 괴롭군.
본의 아니게 아고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다.
“어쩌죠? 더 쉬시겠어요?”
“글쎄, 어쩔까.”
“배고프시죠? 그럼 아침 식사를 간단히 준비해서 방으로 가져올까요?”
“그게 좋겠다. 부탁해, 아고트.”
“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아고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러나 아고트가 굳이 식당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아고트가 방을 나서려는데, 카이사르가 한 손에 식사를 준비한 쟁반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윽!”
아고트가 카이사르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카이사르도 지지 않고 아고트를 향해 혀를 찼다.
“이제는 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마주 볼 때도 되지 않았어?”
“이제는 혀를 안 차실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으음, 두 사람이 또 으르렁거리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저 둘이 으르렁대지 않으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관계를 뭐라 하더라. 용과 호랑이?
‘아니, 개와 고양이인가.’
둘 다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정작 손톱을 세우거나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지.
“무슨 생각 중이야?”
적절한 예시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아고트를 보낸 카이사르가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가 가져온 쟁반에는 빵과 버터, 감자 수프, 꿀, 주스, 그리고 싱싱한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
나는 피로한 내 몸에 대한 약간의 원망을 담아 카이사르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뭐야?”
“아침 식사. 분명 늦잠을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누구 때문인데.”
“그래, 그러니까 내가 왔잖아.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되게 먹여 줄 테니 걱정 말라고.”
카이사르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웃었다. 어쩐지 아기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라,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내가 몸을 일으켜 앉으니, 카이사르도 내 쪽으로 조금 더 몸을 당겨 앉았다.
“뭐부터 먹고 싶어?”
“일단, 주스.”
내 부탁 아닌 명령에 카이사르가 곧장 주스 잔을 내 앞에 척 하고 가져다주었다.
나는 양손으로 잔을 받아 들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흐아……, 살 것 같다.”
“목소리가 완전히 잠겼네, 헬레나.”
“너 때문이야.”
“네에, 그렇죠. 그러니 이 죄인을 마음껏 부려 먹으시지요, 스승님.”
카이사르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빵 위에 꿀을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를 맡으니 어쩐지 기분이 풀린다. 그제야 배 속에서도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아아―”
카이사르가 빵을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난 여전히 졸린 얼굴로 카이사르가 내민 빵을 덥석 물었다.
우물우물. 으음. 빵도 따끈따끈하고, 꿀도 달콤해서 맛있군.
‘그러고 보니 나, 카이사르랑 관련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막상 잠에서 깨고 보니,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샐러드도 먹을래?”
“먹을래.”
나는 어미 새가 물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아기 새마냥, 입을 벌려 카이사르가 주는 음식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흐음, 이런 대접이라면 몸이 좀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수프도 먹을래?”
“먹을래, 먹을래.”
큰일이다. 너무 편해서 길들여져 버릴 것 같은데.
카이사르는 정말 세심하고 꼼꼼하게 내 식사 수발을 해 주었다. 매번 대접만 받고 살았을 사람이 이런 건 어찌 이리 잘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앗, 흘렸어.”
그렇지만 난 이렇게 수발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결국 카이사르가 내민 빵을 덥석 물다가, 빵에 바른 꿀이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시트 다 버렸네. 혼나겠다.”
“으음, 그런가.”
카이사르가 심드렁하니 대답하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꿀을 혀로 핥았다.
……와아, 그게 왜 그리 선정적으로 보이는지.
‘어제 일 이후로 내 머릿속의 필터에 음란 마귀라도 끼었나.’
결국 나는 카이사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째 요즘 부정맥이 점점 심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헬레나.”
“응?”
카이사르가 내 이름을 불러, 시선을 피했던 나는 무의식중에 다시 고갤 돌렸다.
그리고 어두워진 시야에 흠칫 놀랐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카이사르의 얼굴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응?’
이게 뭐야? 하고 몸이 굳은 사이, 카이사르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잠을 깨우는 모닝 키스……, 는 아니었다.
그가 내 왼쪽 뺨을 덥석 물었다.
“으어엉?!”
뭐야, 나.
잡아먹힌 거야?!
카이사르는 금세 내게서 몸을 뗐다. 씩 웃는 그의 미소가 어쩐지 얄미웠다.
카이사르가 혀로 제 윗입술을 핥으며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꿀이 묻어 있어서.”
“말로 해!”
“헬레나는 달콤하구나. 단 걸 많이 먹어서 그런가? 내가 단 걸 싫어하긴 하지만, 헬레나는 맛있네.”
“난 먹는 게 아니거든?”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저 혼자 괜히 들떠서는!
결국 나는 카이사르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카이사르가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 댔다.
아프다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 * *
일주일 후, 합숙이 끝났다.
적기사단이 기사단 합숙의 마지막 순서였기 때문에, 우리가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저택의 관리인들은 가구에 다시 흰 천을 씌우기 시작했다.
“앗, 아직 계셨군요.”
내 침실에도 메이드 하나가 커다란 흰 천을 낑낑거리며 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창가에 선 날 발견하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밖에서 짐을 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 나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나중에 오겠습니다.”
메이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연신 고갤 꾸벅거렸다.
나는 다시 방을 나가려던 메이드를 손짓으로 불렀다.
“아냐, 들어와. 와서 하던 일 하도록 해.”
“하지만…….”
“괜찮아. 그거 이고 지고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롭잖아.”
내 배려에 메이드가 감동을 받은 얼굴이 됐다. 이 정도로 그렇게 감격할 것까지야.
메이드는 능숙한 솜씨로 방 안을 정리했다. 가구를 싹싹 닦아 먼지를 없애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서서 그걸 지켜보다가, 문득 지루해져 말을 걸어 보았다.
“혼자서도 잘하네.”
“처음에는 혼자 못 했습니다. 이제는 손에 익어서요.”
“이 저택에서 오래 일했어?”
“여름과 겨울에 집사님께서 부르시면 옵니다.”
전속 메이드는 아닌 거구나.
메이드는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잠시도 손을 쉬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로 벌써 5년째네요.”
“와아, 오래됐구나.”
“집사님께서 계속 불러만 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이 저택을 섬기고 싶어요.”
“어째서?”
“좋아하거든요. 아름다워서.”
메이드가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말에 답했다.
나는 창가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멀리 바닷가의 표면이 여름의 햇빛에 가루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응, 맞아. 아름답지.”
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던 곳.
그래.
나도 이 오래된 저택을 사랑하고 있다.
“올해는 공녀께서 오셔서 더 즐겁고 화기애애했던 것 같아요.”
메이드가 수줍어하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메이드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며칠 전에 시트에 꿀 흘려서 미안했어.”
“별말씀을요. 내년에도 꼭 오셔요. 그때까지 제가 이 방을 깨끗하게 관리해 두겠습니다.”
멀리서 텅텅거리며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가볍고도 통통 튀는 소리만으로 나는 그것이 아고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열린 문 앞에 아고트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아가씨. 마차에 짐을 다 실었습니다! 타실 마차도 대기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수고했어, 아고트.”
떠날 때다.
나는 아고트의 재촉에 방을 나섰다. 메이드가 날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방문의 턱을 넘기 직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머물렀던 방을 돌아보았다.
나는 전생에서도 이 저택에서, 이 방에서 수십 번을 머물렀다. 그 해변 동굴의 구석진 자리에서 빛나는 별을 보았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그때의 나에게도 알려 주고 싶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는 메이드를 향해 당부했다.
“이곳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저택이거든.”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연심이 무엇인지. 애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날 향하여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메이드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