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76/156)

S5. 테라 번즈의 소녀 몽상

소녀의 어릴 적 꿈은 공주님이 되는 것이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긴 드레스 자락을 끌고, 입으로 손을 가리고 웃고, 고상한 말투와 반짝이는 장신구로 무장하고 싶었다.

다들 덧없는 꿈이라 취급했지만,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소녀는, 허름한 집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허름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틀림없는 번즈 백작가의 핏줄이었으니까.

* * *

아고트가 11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다.

일가친척이 없는 어머니의 장례식은 매우 초라하게 치러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모녀를 찾아온 적 없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작님이 못 온 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아직 못 들었기 때문일 거야.”

어머니를 묘지도 아닌 곳에 파묻은 날. 아고트는 동네 친구였던 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마 내가 소식을 전해 드리면 크게 슬퍼하시며, 혼자 남은 날 받아 주시겠지.”

흙투성이가 된 손을 털며 아고트가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아고트보다 세 살 위인 샘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널 받아 줄 사람이면 너희 모녀를 한 번은 진작 보러 왔었겠지.”

“그거야 백작 부인의 눈치가 보여서였겠지.”

“자기가 바쁘면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있는 거잖아. 돈이라도 보내든가.”

“흥. 너는 내가 이제 귀한 집 아가씨가 되는 게 못마땅한 거지?”

아고트는 샘이 자신을 시기한다는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자기 자식 모르는 척하는 부모가 세상 어디 있어? 어쨌든 난 확실한 번즈가의 핏줄인걸. 이 머리카락만 봐도 말이지.”

아고트는 이 날을 위해 한 번 자르지 않고 정성껏 기른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난 여자애라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할 리도 없고. 분명 흔쾌히 받아들여 줄걸.”

아고트는 자신이 있었다.

백작은 정략결혼으로 부부가 된 백작 부인보다 자신의 어머니를 더욱 사랑했을 거라 확신했다.

백작 부인의 핍박이나 눈치 따위 얼마든지 견뎌 낼 자신도 있었다. 그런 건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들도 겪는 시련의 하나일 뿐이니까.

“두고 봐. 우아한 아가씨가 되어 돌아올 테니까.”

허름한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드레스처럼 살짝 잡아 올리며 아고트가 웃었다.

* * *

아고트는 우아한 아가씨로 거듭날 자신이 거쳐 갈 여러 시련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다고 생각했지만, 문전박대는 예상치도 못했다.

“헛소리 말고 빨리 꺼져.”

번즈가 저택의 입구.

저택 건물은 까마득히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곳에서, 아고트는 진작에 아가씨를 향한 여정에서 탈락당했다.

“헛소리가 아니에요. 전 백작님의 딸이란 말이에요.”

자신을 내쫓으려 하는 시종 때문에 아고트는 답답해했다.

“한 번만 백작님을 뵙게 해 주세요. 그러면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너 같은 거지새끼가 일주일에 몇 명이나 찾아오는 줄 알아?”

“제 이름만이라도 전해 달라니까요? ‘테라 번즈’요. 분명 바로 아실 거란 말이에요.”

‘테라’라는 이름은 백작님이 지어 준 것이라 했다.

동화 속 공주님들이 반으로 쪼개진 목걸이 따위를 징표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듯, 분명 그 이름이 자신을 증명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시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냉큼 꺼져! 감히 우리 주인님을 모욕하다니!”

“모욕이라뇨?”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고결하신 분인데, 밖에서 함부로 씨를 뿌리고 돌아다니는 놈들과 같이 취급을 하는 거냐!”

“무, 물론 백작님은, 그, 고결하신 분이겠지만…….”

“에잇, 꺼져! 당장 꺼져!”

“꺄악!”

결국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시종이 말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위협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채찍 끝에 걸린 아고트의 살갗이 찢어졌다. 아고트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을 받아 줄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종 주제에!’

이를 악물고 버티면 이 소란이 백작의 귀에 들어갈 테고, 분명 백작이 나와 보리라.

백작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머리카락 색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이 억울함도 풀릴 것이다.

그때였다.

“그만둬.”

맞은 등짝이 화끈거리며 열이 오르기 시작할 무렵,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시종의 폭력도 거짓말처럼 그쳤다.

“이크, 도련님.”

“저택 앞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계집이 하도 끈질겨서…….”

아고트는 바닥에 쓰러져 먼지투성이가 된 몰골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같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피부가 희고 볼이 창백한 소년이었다.

앳되고 여려 보이는 외모에 반해, 아고트를 향한 소년의 시선은 경멸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테라, 라고 했지?”

“네? 아, 네!”

“아버지께 네 이름을 여쭈어보았다.”

소년의 말에 아고트의 눈빛이 희망으로 빛났다.

소년은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다고 하시더군.”

“……네?”

아고트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설마 백작이 자신을 부정할 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그만 얌전히 돌아가. 그러면 오늘의 무례는 용서해 주겠다.”

“자, 잠깐만요! 그럴 리 없어요! 모르실 리가 없다고요!”

아고트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소년에게 보여 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거 보세요! 이 머리카락이요! 번즈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거잖아요?!”

푸른 머리카락은 번즈의 혈통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희귀한 색이었다. 이름이야 모르는 척할 수 있을지언정, 머리카락의 색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동요하지도 않았다.

소년은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 들고선 아고트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고트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아고트의 머리카락만을 한 움큼 낚아채, 귀밑에서 싹둑 잘라 버렸을 뿐이다.

“……!”

태어나 한 번 자르지 않고 길러 왔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소년은 손을 털며 일어나, 발치에 흩어지는 잘린 머리카락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못 배운 계집이라 참으로 못 알아듣는구나. 이 집에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다 온 인간은 필요 없단 뜻이다.”

그들은 아고트가 백작이 밖에서 낳아 온 딸임을 다 알고 있었다.

이름 따위 듣지 않아도, 이 푸른 머리카락을 본 것만으로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고트는 그들에게 그저 백작의 오점, 가문의 수치, 뻔뻔한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린 소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 나간 후에야 간신히 그 사실을 깨달았고.

절망했다.

“꺼져. 그리고 다시는 번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소년의 싸늘한 경고와 함께 백작가의 입구가 굳게 닫혔다.

아고트는 그 앞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오열했다.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소녀는.

다시는 꿈을 꾸지 않기로 결심했다.

* * *

기사단 여름 합숙에서 돌아오고 얼마 후, 공작저에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다.

아고트는 서둘러 다과를 준비하려 했지만, 헬레나가 거절했다.

“접대는 베시가 할 거야. 아고트는 다른 일 해.”

“네? 하지만…….”

“자, 어서어서.”

헬레나가 워낙 단호히 거절하기에 아고트는 더 묻지 못했다. 헬레나에게 거절당한 것 같아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헬레나의 곁을 살피는 게 주 업무였기에, 다른 일을 하라 해도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여기저기를 기웃대던 아고트는 결국 주방 한편에 정착했다.

“어휴, 아가씨 껌딱지가 어쩐 일로 풀이 팍 죽었담.”

“베시에게 곁을 한 번 빼앗겼다고 저리 삐쳐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아가씨가 어쩐지 화가 나 보이셨단 말이에요.”

“그래? 나도 아까 뵀는데, 잘 모르겠던걸.”

“전 알아요.”

요즘 카이사르와 있을 때 온갖 표정을 다 보여 주는 헬레나였으나, 그래도 평소에는 무료한 표정이 기본인 그녀였다.

아고트는 그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헬레나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게 특기였다.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아고트는 쪼그려 앉은 무릎 사이에 고갤 처박고 우는 소릴 냈다.

“히잉, 난 몰라.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네가 계속 전하랑 으르렁대니까 그렇지.”

“아가씨는 전하보다 절 더 좋아하시거든요?!”

“아니, 그런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래……?”

아고트의 뻔뻔함에 주방 메이드들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오늘 찾아온 손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사람이었나?”

“약속도 없이 들이닥쳤다며? 대체 누구래?”

“아까 슬쩍 봤는데, 키 크고 깡마른 중년 남자드만.”

“귀족인가?”

“그러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손님, 아고트랑 머리 색이 똑같던데.”

주방 메이드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귀동냥하던 아고트가 그 말에 팍 고갤 들었다.

“머리 색이요?”

“응, 새파랗더라고. 별로 흔하지 않잖아? 그런 색.”

“맞아. 특이하네. 나도 아고트 말고는 본 적 없어.”

……그 사람이다.

아고트는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치는 듯한 기분을 맛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그, 깜짝이야!”

“죄송해요. 저 가 볼게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아고트는 힘껏 달려 응접실로 향했다. 달리는 내내 손발이 덜덜 떨려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 사람이 여기엔 왜 왔지? 날 데려가려고? 아가씨는 뭐라고 하실까? 날 보내겠다고 하시면 어쩌지?’

그런 건 싫다.

여길 떠나고 싶지 않다.

아고트는 순식간에 응접실 문 앞에 도착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로 오긴 했으나, 어째서인지 아고트는 문고리를 열기 전 멈춰 섰다.

‘들어가면, 뭔가 달라지나?’

이 문 너머에 ‘그 사람’이 앉아 있다.

지금껏 한 번 본 적 없는, ‘테라’라는 이름을 모른다 했던, 자신과 어머니를 부정했던 그 사람이.

‘만나면, 얼굴을 보면, 혹시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나?’

식은땀이 났다.

갑자기 발밑이 아득해지는 기분.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다과를 내어 갔던 베시가 방을 나오던 참이었다.

“어머, 아고트!”

깜짝 놀란 베시의 외침에, 방 안에 있던 헬레나와 남자가 동시에 문밖으로 고갤 돌렸다.

그리고 아고트는, 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머리 색을 가진 남자를.

“테라.”

남자가 낯선 이름으로 아고트를 불렀다. 목소리가 다정해서 아고트는 조금 의외라 생각했다.

그리고 놀랄 정도로, 아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오느라 마구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기까지 했다.

“아가씨.”

아고트는 방 안으로 들어가 헬레나의 곁에 섰다.

“혹시 뭔가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실까 싶어서요.”

아고트의 태연한 말에, 헬레나의 무심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없어, 이 말 안 듣는 녀석.”

“헤헷.”

헬레나가 졌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젓는 모습에, 아고트가 웃었다.

“차라리 잘됐군. 본인과 얘기하면 될 테니까.”

아고트를 본 번즈 백작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헬레나가 그런 번즈 백작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나와 함께 가자. 네 재능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 주마. 넌 훌륭한 기사가 될 능력이 충분해.”

“기사요?”

“그래. 지난번 검투 대회에서 널 보자마자 알았다. 네 어머니를 쏙 닮아서 모를 수가 없겠더군.”

번즈 백작이 미간을 찌푸려 웃으며 호소하듯 말했다.

“테라, 맞지?”

“테라…….”

“그래. 알고 있느냐? 그 이름은 내가 지어 준 것이다.”

그 말에 아고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테라, 내가 너의―”

“모를 수가 없죠. 제가 죽인 계집의 이름이거든요.”

얼굴 만면에 미소를 짓던 백작이, 뒤이어 나온 아고트의 말에 굳었다.

“전 ‘아고트’입니다, 백작님.”

아고트가 이름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 * *

뒷문 계단에 앉아 있으니, 얼마 후 헬레나가 곁에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괜찮아?”

“뭐가요?”

“뭐……, 여러 가지.”

헬레나가 시선을 허공에 보내며 웅얼거렸다. 그 모습에 아고트가 작게 웃었다.

“번즈 백작……, 되게 인자하게 생겼던데요.”

“으음. 그렇지.”

“좀 더 악당 같은 얼굴일 줄 알았어요. 으음……, 그게 감상의 다예요.”

아고트가 비시시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번즈가의 적장자가 낙마 사고로 죽었대.”

“저런.”

아고트는 그 언젠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소년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핏기가 없는 꼴이, 낙마 사고가 없었어도 오래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몇 번 접견을 청해 왔는데 거절했었어. 그랬더니 오늘은 약속도 없이 쳐들어와서 말이야.”

“그랬군요. 전혀 몰랐어요.”

“몰랐으면 했으니까.”

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헬레나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고트가 가 버린다고 할까 봐.”

수줍게 중얼거리는 헬레나의 옆얼굴을, 아고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헬레나의 모습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자신은 그런 모습을 꿈꿔 왔었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교양 있게 말하고,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고, 사뿐하게 걷는 우아한 영애를.

그런 걸 꿈꿨던 적도……, 있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아고트는 아가씨 거예요.”

이제는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아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아고트가 웃었다.

“전 기사도, 영애도 되고 싶지 않은걸요.”

“그럼 뭐가 되고 싶은데?”

“아가씨의 메이드요.”

테라 번즈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남의 주머니나 털며 내달렸던 어느 뒷골목에서.

“그게 뭐야. 여자라면 좀 더 큰 꿈을 가져야지.”

“예를 들면요?”

“세계 정복 같은 거?”

아고트는 꿈을 꾼다.

검을 쥐어도 된다고, 곁에 있어도 된다고, 꿈을 꾸어도 된다고, 헬레나가 허락해 주니까.

그렇기에 헬레나는 아고트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사람. 하나뿐인 스승. 새 이름을 준 주인.

신.

“그래도 역시 전 아가씨의 메이드인 게 제일 좋은걸요.”

꿈꾸는 어린 소녀처럼, 아고트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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