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77/156)

9. 덫

여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한낮에도 그늘에 들어서면 목 뒤가 서늘해지는 어느 날.

단골 차 가게에 올해 딴 찻잎이 입고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아고트와 함께 오랜만에 시내 나들이에 나섰다.

시향용 찻잎을 차례로 맡아 보던 나는, 번뜩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과 함께 깨달았다.

“너무…… 평화로워……!”

세상에. 내가 지금 한가하게 찻잎 향기나 맡고 있다니.

가게 주인에게 주문 품목을 설명하던 아고트가,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셔요?”

“아고트. 요즘 지나치게 평화롭다는 생각 안 들어?”

내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아고트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는 듯 고갤 갸웃할 뿐이다.

“평화로우면 좋잖아요?”

“평화로울 리가 없는데 평화로운 건 좀 기이하잖아.”

“평화로울 리가 없다니요?”

“생각해 봐. 불안 요소가 꽤 많지 않니?”

마수 토벌 이후로, 날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상당하다.

일단, 날 견제하는 황후와 브란테 가문.

마수 토벌 때 마수의 가죽에서 발견되었던 이상한 문양. 그 문양에 반응하듯 통증을 호소했던 내 심장. 마수 수의 급증과 드라코교와의 관계.

그리고.

‘노에.’

드라코교의 집회에서 본 듯 만 듯한, 금발 남자의 뒷모습.

‘아니, 노에에 대한 건 너무 비약인가.’

나는 고갤 저으며 접었던 손가락 하나를 도로 폈다.

뒷모습만으로 그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 설령 그가 그 현장에 있었다 해도 추궁할 문제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기묘하게 머릿속에 맴돌아 신경 쓰였던 것뿐.

“어쨌든, 의심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냐.”

나는 아고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문제는 의심스럽기만 할 뿐, 확실한 문제는 하나도 없다는 거지.”

“으음……, 그렇군요.”

아고트가 억지로 동의하듯 천천히 고갤 끄덕거렸다.

이런 평화는 좋지 않다.

흡사 폭풍 전야와 같다. 즉, 곧 감당하기 어려울 폭풍이 몰아칠지도 모른다는 반증이다.

“하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접었던 손가락을 모두 펼치며 한숨을 내뱉었다.

마수의 몸에서 발견된 문양은 전문가조차도 답이 안 나오던 문제였다. 지금은 율리카에게 맡겼으니, 답을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후와의 문제도, 그쪽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이쪽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고.’

황후와의 관계는 어느 쪽이든 성급하게 움직이면 양쪽 모두가 휘청거릴, 아슬아슬한 대치 상태다.

이쪽이 조심스러운 만큼, 저쪽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겠지.

지금은 불안과 경계를 품은 채, 이 기이한 평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아가씨. 이거 라벤더 차예요. 불안을 해소해 준대요.”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인지, 아고트가 라벤더 꽃잎이 들어있는 시향용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코 밑에 두고 숨을 크게 들이셨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라코교 정도면, 내가 먼저 쑤셔 볼 만할지도.”

몇 번 심호흡을 한 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곁에 서 있던 아고트가 그 작은 목소리를 듣고도 냉큼 반응을 해 왔다.

“그, 용을 숭상한다는 종교 말씀이죠?”

“응. 전에 마수 토벌 갔을 때, 후작님이 마수가 급증한 게 드라코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랬잖아.”

“그랬죠. 심증일 뿐이지만.”

“그렇긴 해.”

그걸 아니까 벤 변경후도 그 사실을 황가에 보고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고트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드라코교라면 저도 좀 들은 게 있긴 하네요.”

“응?”

“요즘 교단 세력이 예전만 하지 않대요. 추종자들 중에 행방불명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행방불명?

내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어?”

“저택에 식료품을 대 주는 에버렛 씨에게서요.”

드라코교는 대중 종교였다. 서민들에게서는 정보가 꽤 빨리 돌지만, 귀족인 나에게까지는 정보가 닿질 않았던 모양이다.

“성회가 교단을 해체하려고 급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있나 봐요.”

“그렇구나. 혹시 아고트도 그 종교 집회에 나가 본 적 있니?”

“아뇨, 저는 전혀.”

고갤 젓던 아고트가, 막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에버렛 씨는 몇 번 가 봤대요.”

저택에 식료품 대 준다는 그 사람 말인가.

하긴, 직접 참여도 해 본 사람이니 그런 세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거겠지.

“궁금하시면 에버렛 씨를 소개해 드릴까요? 목요일마다 배달 때문에 오거든요.”

“그거 좋네. 부탁해, 아고트.”

“맡겨 주세요.”

아고트가 활짝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임무가 생긴 게 뿌듯한 모양이었다.

나는 시향 그릇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진짜 대중 친화적인가 보네, 그 종교.’

평범하게 자기 일 잘하며 사는 사람도 집회에 끌어들일 정도라니.

‘용을 추종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로 그 정도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니.’

교주가 엄청나게 카리스마 있는 사람인가?

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도, 한 번쯤 만나 보고 싶긴 하네. 그 교주.

“음, 그쪽 일은 됐고. 이제 슬슬 율리카에게 부탁했던 일도 답을 듣고 싶은데 말이지…….”

율리카를 생각하니 깊은 한숨이 나온다.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닌데, 브란테가에 접견을 신청하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더구나 문양의 해석을 부탁했던 그날, 본의 아니게 율리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채 헤어지기도 했고.

‘또 뇌물이라도 사서 연락을 해 봐야 하려나.’

고급 찻잎이라도 사서 선물해 볼까? 나 참, 연인을 달래는 것보다 더 까다로워서야, 원.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는 때.

딸랑, 하는 방울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가게 입구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율리카 브란테 영애?!”

이 무슨 기가 막힌 우연인지.

가게에 들어선 건 율리카와 그녀의 몸종이었던 것이다.

“헉, 공녀……!”

뒤늦게 날 발견한 율리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 노골적인 혐오라니, 귀엽기도 해라.

나는 성큼성큼 율리카에게 다가가, 그녀가 도망가기 전에 재빨리 양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식을 끌어모아 활짝 미소 지었다.

“와아, 반가워라! 이런 곳에서 뵙네요! 정말 기뻐요, 영애!”

아하하하하. 율리카의 웃음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그녀는 가식을 끌어모으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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