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가게 2층은 차를 시음할 수 있는 살롱이 마련되어 있어, 우리는 멀리 갈 것 없이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고트. 영애께서 갈 때 가져가실 수 있도록 가게에서 가장 좋은 찻잎을 준비해 두렴.”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고트에게 명령했다. 맞은편에 앉은 율리카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공녀.”
“아뇨, 받아 주세요. 부탁한 일에 대해 정당히 대가도 치르지 못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렇게 말하니, 율리카는 한껏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번 반박하진 않았다.
“……하아. 너도 따라가 보렴.”
“네, 아가씨.”
“공녀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1층에서 기다리고.”
“네, 알겠습니다.”
율리카의 몸종이 꾸벅 인사를 한 후 아고트를 따라 1층으로 총총 내려갔다.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아마 이제 2층으로 올라올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다.
단둘이 남게 되어, 나는 일단 가벼운 화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영애도 이 가게 단골이셨군요.”
“저보다는 제 아버지께서 이 가게의 가향차를 좋아하세요.”
“아, 백작님께서.”
퍼뜩, 황성에서 열린 지난 파티 때 마주쳤던 브란테 변경백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황후보다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러고 보니 봄에 만나고는 처음이죠, 우리?”
“초여름에도 한 번 보긴 했죠.”
“초여름에?”
“그……, 황성 복도에서…….”
아, 기사단 합숙 때문에 황성에 불려 갔던 날 말인가.
황후와의 신경전에 신경 쓰느라, 그 곁에 서 있던 율리카의 존재를 잠시 잊었군. 미안해라.
“……공녀.”
율리카가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눈썹을 으쓱하며 율리카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나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였다.
마치 찻잔과 대화를 나누듯, 그녀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공녀는 전하께……, 연심이 있으십니까?”
으잉.
돌직구도 이런 돌직구를?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연적이라면 연적인 사람에게?
“대답해야 하나요?”
황가의 혼약에 마음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한 건 율리카 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연심’에 대해 물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죠. 전하의 연심을 믿으시나요?”
율리카가 고갤 들어 날 쳐다보았다. 떨리는 목소리에 반해, 의외로 눈빛은 굳건했다.
나는 그녀가 대체 뭘 알고 싶어 하는 건지 추측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믿어요.”
내가 말했다.
율리카가 그 대답을 원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카는 ‘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대체 뭘 의미하는 ‘아아’인 것일까. 실망? 경멸? 체념?
‘여자들 마음은 너무 섬세해서 힘들어.’
그래도 기특하구나, 나.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할 줄도 알고.
“공녀께서는 정말 욕심이 많으시군요.”
뜬금없이 비난을 들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땐 역겹다고 했던가. 가만 보면 율리카에게 은근히 일방적인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난번 제게 물으셨던 문양에 대한 얘길 할까요?”
내가 용건을 꺼내기 전에, 율리카가 먼저 내가 원하는 화제를 꺼냈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건 일부러 꾸민 것이겠지.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는 율리카의 변화를 모르는 척했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그 전에 묻고 싶어요. 그 문양, 어디에서 난 거죠?”
“마수 토벌 때, 마수의 몸에 새겨져 있던 낙인 같은 거였어요.”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율리카는 고갤 끄덕인 후, 의외로 순순히 답을 가르쳐 주었다.
“전에 말한 적 있죠? 가장 처음의 언어는 룬어가 아닌 다른 언어였다고.”
“네, 기억나요. 하지만 기록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없어요. 그런데 이전의 언어는 마족의 언어와 어족이 같아요. 애초에 마법의 근원이 마의 존재들에게서 온 거니까요.”
으으, 무슨 소리야, 그게.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족은 뭐고, 마법의 근원은 뭐고.
그러나 율리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눈빛을 빛내며 그 알 수 없는 설명을 이어 갔다.
“마족의 언어는 소리까지 알 수는 없지만, 전리품 등에 일부 문자가 남아 있어요. 그래서 남아 있는 관련 문자를 모두 긁어모아서 배열, 비교해 봤어요.”
“마족의 전리품? 그런 건 어디서 구하고요?”
“우리 가문엔 꽤 남아 있거든요.”
아. 변경 귀족이었지, 참.
오래전부터 변경에서 야만족과 마족들을 상대로 싸우던 가문이다. 마족의 전리품이 남아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바빴겠군요.”
“힘들었어요.”
율리카가 고갤 크게 끄덕였다. 자신의 고생을 알아 달라는 어린애 같아, 나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뭔가 찾아냈나요?”
“완벽한 번역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8할의 확률로 정답일 거예요, 아마.”
거기까지 말한 후, 율리카는 뜸을 들이듯 차를 몇 모금 마셨다. 나는 그동안 애가 타서 손가락을 테이블에 따각따각 두드렸다.
이윽고 찻잔을 다시 내려놓은 율리카가, 마치 전승되는 오랜 격언을 읊듯 고요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오실 왕을 맞이하라.”
“……네?”
“그 문양에 새겨진 문장이요.”
왕?
“그게 대체 무슨 마법이죠?”
“마법적 효과는 없어요. 그냥 평범한 문장이에요. ……아마도요.”
마지막에 불명확한 말을 덧붙이며 율리카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마수들은 분명 나에게 집중적으로 달려들었었는데?’
뭔가 마법적인 게 얽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 심장이 반응한 것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닌 건가?
“아, 맞다.”
“뭔가 더 있나요?”
“마족의 언어는 발음이 알려진 게 없긴 한데, ‘왕’이라는 단어는 발음이 남아 있긴 해요. 워낙 유명해야 말이죠.”
“그게 뭐죠?”
어떤 불길한 예감에, 소용돌이치는 불안을 담아 내가 물었다.
율리카는 그 천진하고 태연한 얼굴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크루세흐요.”
* * *
가게 앞에서 율리카와 헤어지기 전, 나는 율리카에게 작별 인사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이번 일, 도와줘서 고마워요.”
전문 학자들도 해내지 못한 걸 찾아내 준 것이다. 마법에 관한 그녀의 학문적인 열정에 걸어 보길 잘했다 싶다.
“영애가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도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아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 말에 율리카는 고갤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 편한 소릴 하네요.”
“그런가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공녀가 불쌍해서 도와준 거니까.”
내가 불쌍하다고?
영문을 몰라 고갤 갸웃했더니, 율리카가 고갤 들어 날 바라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녀는 진심으로 측은하다는 눈빛이었다.
“뭐가 불쌍한 거죠?”
“전하의 연심을 믿는다는 사실이요.”
아, 그 얘기인가.
카이사르가 날 아끼는 것은 내가 페레스카이기 때문이지, 사랑 때문이 아니라고 했던 이야기.
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설득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설득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다.
“공녀께서 황태자비라는 권력을 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뻔했네요.”
“그런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율리카는 가게 앞에서 사라졌다.
언제는 내가 자길 동정하는 게 기분 나쁘다더니 하더니, 이젠 자기가 날 동정한단다.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건지, 원.
‘그나저나……, 크루세흐라.’
나는 무의식중에 한 손을 내 가슴 위에 얹었다. 손바닥으로 쿵쿵 뛰는 심장의 고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다시 오실 왕을 맞이하라.’
내가 이 세계에 돌아왔듯이, 크루세흐도 돌아온다는 의미인가?
500년 전 봉인했던 그 악룡이.
‘아니, 불가능해.’
왜냐하면 그 악룡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봉인된 장소와 함께,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