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79/156)

* * *

여느 때처럼 카이사르와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황성 복도에서 백기사단장인 호리오와 마주쳤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단장님.”

꾸벅 인사하는 호리오를 향해 나 역시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가 펴며 인사했다.

말투도 행동도 거친 달튼에 비해, 호리오는 상당히 멀끔한 인상이었다. 귀족 출신이라 그런 건가.

“올해 여름 합숙 때 적기사단과 동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청해주시기에.”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저희 쪽에서 공녀께 먼저 청할 걸 그랬군요.”

나를 ‘교관’이라고 부르는 달튼과 달리, 호리오는 꼬박꼬박 ‘공녀’라는 호칭을 썼다.

이 차이도 그가 귀족 출신이기 때문인 걸까?

“적기사단과는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소공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네요.”

“그러면 제가 공녀께 티타임을 권하려면, 소공작을 모셔 오면 되는 것입니까?”

호리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농담인 건가? 나는 대답하기 애매해져서 그저 마주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방에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아, 물론 소공작도 함께.”

‘농담이 아니었어?!’

백기사단과 적기사단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적기사단의 부단장을 백기사단의 단장실로 초대하겠다고? 고작 나랑 티타임 한 번 가지려고?

“실례지만, 용건이 뭔지 여쭤도 될까요?”

“뭐, 거창할 건 없습니다. 수련병들을 봐 주신 지 꽤 오래 지났는데, 변변히 대접한 적이 없는 듯해서.”

그런 이유라면 거절하기 좀 어렵긴 하다.

“좋아요. 하지만 저 때문에 제 오라버니까지 초대하는 거라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앞으로 공작가를 이끌 수장이 될 사람이니, 좋은 관계가 되어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호리오가 가늘게 웃었다.

“백과 적이 사이가 나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공작은 작위를 물려받으면 기사단을 나갈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

공작위를 가진 이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하자면 지금부터 줄을 서겠다 이건가. 확실히 백기사단은 귀족 출신 사람들이구나.’

나는 고갤 끄덕여 호리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치 문제라면, 명분 없이 거절하여 서로 기분 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네. 그러면 단장님의 초대를 기쁘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잘됐네요. 당장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호리오가 가늘게 웃으며 날 안내하듯 복도 저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백기사단의 단장실은 적기사단과는 비교될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나와 레너드는 단장실 안쪽, 살롱처럼 꾸며진 곳에 앉아서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이건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안 그래, 오라버니?”

“백기사단은 기부금이 많을 테니까.”

레너드는 웃고 있었지만 말투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호리오 단장의 가문이 상업 쪽으로 성공한 집안이거든.”

“자산가였구나.”

“특히 이번 대에 축적한 자산이 꽤 커. 황가의 요청으로 자금을 대 줄 정도로.”

“으음, 설마 단장직을 맡고 있는 이유가…….”

“뭐……,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백기사단의 단원들은 돈과 권력으로 기사직을 사들인다……, 라는 소문이 괜한 게 아니구나.

어쩐지 적진 한가운데에서 험담 아닌 험담을 하게 된 듯하다.

“아, 그나저나 호리오 경은 어딜 가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나는 괜히 투덜거리며 호리오를 향한 미안함을 희석하려 했다.

“글쎄. 아까 황가의 시종에게 뭔가 얘길 듣고 있던데.”

“그래? 일이 바쁜가? 그럼 그냥 돌아가고 싶은데.”

“으음……, 사실 나도.”

내 불만에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동감했다. 적기사단 소속인 그도 여기 앉아 있는 게 꽤나 가시방석 같을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호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초대해 놓고 기다리게 해서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보고해야 할 일이 생겨서.”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걸요.”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화답했다.

이젠 내 가식의 레벨도 꽤 높아진 모양이다. 레너드가 뜨악한 표정으로 날 곁눈질하는 걸 보면 말이다.

호리오와 함께 메이드들도 들어왔다. 그들은 빠르게 테이블 위에 각종 다과와 차를 늘어놓았다.

‘단장실에서의 티타임에 3단 트레이라니…….’

나는 각종 디저트가 종류별로 마련되어 있는 3단 트레이를 보고 속으로 살짝 기함했다.

적기사단의 단장실에서는 기껏해야 우유 넣은 홍차가 전부였는데.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호리오가 변명하듯 말했다.

“두 분께서 계시니 특별히 준비한 거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소공작께서도 마음 편히 드십시오. 오늘은 적기사단의 부단장이 아니라 소공작으로 여기 왔다고 생각해 주시죠.”

“충고 감사합니다.”

레너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천사 같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묘하게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이제 그도 적기사단 사람 다 됐구나.

다 성장하여 출가한 자식 보는 기분이다. 나는 흐뭇함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공녀, 수련병들을 가르치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니, 기쁘네요.”

“저희 애들이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니까요. 가르치는 분께서 불편한 게 있으면 말이 안 되지요.”

호리오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달튼의 ‘허허허’ 하는 투박한 웃음과 정말 대조된다.

두 앙숙은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겹치는 게 없구나 싶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저희 수련병들 실력은 어떻습니까?”

으음.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솔직히 백기사단의 수련병들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다들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고선, 그 이상의 실력은 아예 포기하는 느낌이랄까.

나와 마수 토벌을 함께한지라 독이 반짝 오른 적기사단의 수련병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 할 텐데.’

그러잖아도 적기사단과 각별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차별한다는 오해를 받아도 곤란하다.

“실력이……, 아주 정갈하고,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더군요.”

그렇지. 정갈한 나머지 다치는 걸 두려워하고. 정도를 잘 지켜서 실력이 더 나아지려는 욕심도 없고. 좋은 건 아니니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다행히 호리오는 내 말을 칭찬으로 들었는지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습니까?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큽.”

옆에 앉은 레너드만이, 내 말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는 웃음 참는 헛기침을 했다.

나는 웃지 말라는 의미로 옆자리에 앉은 레너드의 옆구리를 쿡 찔러 주었다.

“언제 전하께서도 저희 기사단에 오셔서, 기사들과 대련을 해 주시면 기쁠 텐데요.”

“말씀은 전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 전하와의 대련 기회만큼은 적기사단에게 뺏길 수 없죠.”

저런.

나는 슬쩍 시선을 허공으로 보내며, 올해 여름 합숙을 떠올렸다.

이미 적기사단은 카이사르와 대련하여 모조리 참패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했다.

‘이 얘기도 비밀로 하자.’

본의 아니게 호리오 단장에게 차마 말 못 할 이야기가 늘어 간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방이 건조해서겠지. 크흡.

“모쪼록 부담 없이 자주 들러 주십시오. 좋은 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단장님의 배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네, 기왕이면 전하께도 좀 쿡 찔러 주시고요. 앗하하하!”

호리오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남자는 진짜 출세밖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와 레너드 역시 기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 * *

호리오와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와 나눈 대화는 의외로 피상적인 것들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자리 차지하고 싶다’는 속내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호리오 경이 신분 상승에 저 정도로 야망이 큰 사람이었을 줄이야.”

레너드와 복도를 걸으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틈만 나면 나한테 ‘전하께 꼭 제 이야기를’, 그리고 레너드에게는 ‘공작께 꼭 제 이야기를’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뭐,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거지.”

“뭐야, 그게. 오라버니는 너무 너그러워.”

“하하, 그런가?”

“돌아가면 달튼 경에게 혼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보고하고 나왔으니까. 가서 혼쭐을 내주고 돌아오라는 명령은 못 지킨 것 같지만.”

펄펄 뛰며 호리오의 욕을 해 댔을 달튼이 상상이 간다.

“……엇?”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갑작스럽게 멈추니, 레너드가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왜 그래?”

“응? 아니, 뭔가…….”

인기척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황성이다. 인기척이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뭐랄까, 뭔가 결이 다른.

‘살기도 아니고, 투기도 아닌데……, 뭐지?’

“이런, 페레스카의 두 남매분께서 함께 계시다니, 드문 일이군요.”

내가 고갤 갸우뚱하고 있는 그때, 황후가 나타났다.

심지어 단신도 아니다. 수행원은 물론이요, 율리카를 비롯한 귀족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뭐야. 집회라도 하나?’

집회를 한다 해도, 이렇게 티 나게 할 리가 없을 텐데.

나와 레너드는 동시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후가 그 특유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우릴 쳐다보았다.

“남매가 사이좋게 함께하니,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마마.”

“우리 프란 황자와 황태자께서도 좀 본받으면 좋으련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요. 두 분도 서로를 많이 아끼실 겁니다.”

레너드가 능숙한 말로 받아쳤다. 표정마저도 선량해서, 그 말이 거짓이라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럴까요? 하긴, 형제와 남매는 좀 다르긴 하겠어요. 그렇죠, 여러분?”

황후가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향해 물었다. 귀족들이 서로 앞다퉈 ‘맞습니다.’ ‘옳습니다.’ 하며 황후의 말을 옹호했다.

“실은 제가 오늘 정사로 애쓰시는 분들을 초대하여 작은 다과회를 열었답니다. 두 분, 괜찮으시면 함께 하시겠어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업무 중이어서요.”

“다음에 꼭 초대해 주세요, 마마.”

레너드와 내가 정중히 거절했다. 어차피 황후도 예의상 한 말이었을 거고.

“그렇군요. 그러면 다음 기회에.”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딱히 비아냥도 신경전도 없었다. 아마 다른 귀족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냥 헤어져,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으면 좋았겠지만…….

“실례합니다.”

저벅,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백기사단 소속의 기사 몇 명이 무장을 한 채 나와 레너드를 감싸고 섰다.

나는 불쾌함을 드러내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실은 방금 단장실에서 주요 자료가 사라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두 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절차이니 잠시 몸수색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야.

자기가 초대해 놓고, 우리를 의심한다고?

“어머, 곤란한 일이네요. 이럴 땐 얼른 수색을 받고 혐의에서 벗어나는 게 속 편하죠.”

황후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보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결백할 테니,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젠장.’

설마 둘이 뭔가 짠 건가?

하지만, 왜?

호리오는 황후 측 사람이 아니다. 황후 측에 휘둘릴 정도로 가문의 위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카이사르의 세력도 커져 가는 이때, 카이사르의 측근인 페레스카를 건드린다고?

호리오가 대체 왜?

“나왔습니다.”

내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그때, 내 곁에 선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의 손엔 작게 접혀 있는 몇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레너드의 외투 주머니에서 꺼낸, 백기사단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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