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늦은 저녁부터 비가 쏟아졌다.
본저에 있던 아버지는, 비가 쏟아지는 밤을 달려 수도의 별저에 당도했다.
저택 안은 어디든 어두웠고, 끔찍할 만큼 고요했다. 다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응접실에는 나와 해밀턴, 카이사르가 앉아 있었다. 초조하게 앉아 있을 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전하.”
이윽고 응접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등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세 사람은 말문이 트였다.
“아버지.”
“헬레나. 그래, 넌 괜찮은 거냐?”
“저는…….”
괜찮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아, 난 고갤 떨궜다.
분노와 죄책감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울분이 가시질 않는다.
그런 나를, 아버지께서 다정하게 끌어안아 주셨다.
“너라도 무사하니 다행이다. 한시름 덜었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날 향한 원망이 서려 있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 때문에 적장자가 피해를 입었는데, 어째서 나를 책망하지 않는 것일까.
“공작님.”
“전하, 늦은 시간에 와 계셔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카이사르를 향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나 평온하여, 나는 그가 소식을 채 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면목 없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카이사르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그런 카이사르를 나무라는 대신, 나에게 했듯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
레너드는 현재 백기사단에게 연금당한 상태다.
고위 귀족이니만큼 험한 꼴이야 안 당하겠지만, 이 일이 얼마큼의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예측이 불가능했다.
“자, 앉읍시다. 앉아서 얘기합시다.”
아버지의 제안에 세 사람은 죄인 된 심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까득. 아직 가라앉지 않은 분노에, 나는 절로 이가 갈렸다.
아직도 황후의 싱글대는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그 곁에 서 있던, 멍청한 얼굴의 율리카도.
‘어째서 이런 비겁한 수를.’
분노가, 가시질 않는다.
“호리오 경이 황후 측과 손잡은 게 확실하긴 한 겁니까?”
아버지의 그 질문에 대답한 건 해밀턴이었다.
“그것이 저희도 의문입니다.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는데.”
“편이어서가 아니라, 약점을 잡힌 것일 수도 있지.”
카이사르가 침통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회색 지대의 귀족들은 대부분 우리 측으로 기울어 있었다. 굳이 이런 비열한 수를 쓰면서 황후의 편에 붙었다는 건 말이 안 돼.”
카이사르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들은 레너드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법으로 페레스카를 공격했다.
그 말은 즉, 레너드의 결백이 밝혀지면 도리어 호리오가에서 받을 타격이 더 크다는 말이다.
‘그렇게 큰 불안 요소를 안으면서까지 득도 없이 황후를 위에 움직일 이유가 없어.’
득이 없다면, 해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게 무엇일까.
“역시 죄송해요. 호리오 경의 초대를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탄식했다.
“헬레나 잘못이 아냐. 호리오가 황후 측에 붙었다는 건 우리에게도 없던 정보였으니까.”
“그래요, 공녀.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책하지 마십시오.”
카이사르와 해밀턴이 위로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으음’ 하고 낮은 신음을 뱉은 후 잠시 고뇌했다. 그리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황후 쪽에서 노리는 게 페레스카인 게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드는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카이사르가 동의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적기사단이 백기사단을 경계한 나머지 서류를 훔쳤다……, 정도로 무마 가능한 작은 일이야. 이 정도로는 페레스카에게도 카이사르에게도 큰 타격은 못 줘.’
레너드의 명예에 훼손은 가할 수 있을지언정, 페레스카 전체를 공격하기엔 사건이 약하다.
“황후가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사건이 뭐였습니까.”
아버지가 질문했다.
사실은 아버지 본인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멍하니 대답했다.
“마수 토벌…….”
바로, 나다.
혜성처럼 등장한 황태자비 후보. 변경 마수 사건을 해치운 실력자. 황제의 총애를 입어 황가 주최의 파티 주인공까지 되었던.
“하지만 공녀를 노린 것이었다면, 공녀가 서류를 훔쳤다고 꾸몄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공녀도 그 방에 함께 있었으니까요.”
해밀턴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고갤 저었다.
“헬레나는 백기사단의 서류를 노릴 명분이 없어. 뒤집어씌우자면, 소공작이 더 개연성 있었겠지.”
“하면, 곧 거래를 청해 오겠군.”
아버지가 카이사르의 말을 받아 결론을 내렸다.
“헬레나.”
“네, 아버지.”
“응하지 마라.”
“……네?!”
나도, 카이사르도, 해밀턴도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말실수를 하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단호했다.
“비겁한 수단에 한 번 응하게 되면, 이후에도 저쪽은 이런 식의 공격을 해 올 거다.”
“하지만 그러면 오라버니는……!”
“억울하긴 하겠지만, 큰일은 아니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결백을 밝힐 기회도 얼마든지 올 거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이 폭우 속을 달려왔을 땐, 그만큼의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을 것이다. 왜 없었겠는가.
“서류를 소공작의 외투에 넣은 건 시종 중 하나일 겁니다. 이 잡듯 뒤지면 자백할 자가 나오겠죠.”
카이사르가 읊조리듯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찰랑거렸지만, 분노가 꾹꾹 눌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서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전하.”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연히 제가 나서야죠.”
“잘 해결될 겁니다. 레너드는 그리 약한 녀석이 아니까요.”
아버지가 말했다.
애써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조차 납덩이처럼 금세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 *
“헬레나.”
자리가 파한 후, 방에 돌아가려는 날 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넋이 빠진 얼굴이구나.”
“죄송합니다.”
다시금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다.
아버지가 그런 내 어깨를 감싸 쥐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라.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일이 끝날 때까지 몸을 사리고 있거라.”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다시 고갤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라고, 말해 주고 싶다만.”
나의 그 표정에, 아버지가 쓰게 웃었다.
“너는 그럴 아이가 아니지. 내 말이 맞지?”
“아버지…….”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게냐. 언제까지 네 잘못이라고 곱씹기만 할 것이냐.”
아버지가 질책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투는, 다정하게 나를 감쌀 때보다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전하의 편에 서기로 한 이상,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이 바닥이 낭만적이지만은 않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잊었느냐?”
“아뇨, 기억합니다.”
“그래. 내 자녀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그렇지?”
“네, 아버지.”
“말해 봐라. 어떻게 할 것인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진다.
울렁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감히 내 오라버니를 괴롭힌 녀석들, 전부 다 족쳐 버리겠어요.”
정제되지 않은 상스러운 말에 아버지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크게 웃었을 뿐이다.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그저, 크게 웃으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