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81/156)

* * *

황후가 날 치워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기울어진 분위기를 자신들 쪽으로 다시 끌어오기 위해 내게 요구할 만한 일은, 하나뿐이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율리카 브란테에게 양보할 것.

이른 아침부터 황후의 초대장을 받은 나는, 그 사실을 재차 되새겼다.

“아가씨. 안 가시면 안 돼요?”

내 방에 찾아온 베시가 불안한 눈빛과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도련님도 안 계신데, 아가씨까지 잘못될까 봐 너무 불안해요.”

“괜찮아. 오라버니를 데리러 가는 거야. 잘못될 거 하나 없어.”

“착한 주인님 가문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베시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베시, 이리 와. 나 좀 안아 줘.”

“아가씨……!”

베시가 냉큼 내게 다가와, 날 끌어안았다. 나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는 베시를 토닥여 줬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감히 페레스카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들은 없어.”

그래, 아무도 내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해.

내가, 지켜 낼 거니까.

곧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 케고르가 들어왔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이 상황에도 의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고마워요. 내려갈게요.”

나는 베시를 달랜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고트가 결연한 눈빛으로 날 맞이했다.

마차에 오르며, 나는 아고트에게 말했다.

“도착하면 황성에 들어오지 말고 마차에서 대기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주의해야 해.”

“네, 아가씨.”

“혹여 누가 도와준다고 접근하거나, 이상한 낌새를 보인다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마. 지금은 아무도 못 믿어.”

“명심할게요.”

아고트가 비장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 비장함이 지나쳐, 나는 너털웃음이 터졌다.

“베시는 울던데.”

“정말요?”

“아고트는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만.”

아고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시선을 허공에 보냈다. ‘나도 울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저는, 음……, 도련님이 저택에 다시 돌아오시면, 그때 울게요.”

아고트의 눈물은 예고제구나.

어쩐지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긴장도 탁 풀리는 기분이다.

‘용 때려잡으러 갈 때도 이것보다는 유쾌했는데.’

그때는 죽으면 죽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죽거나 잘못되는 건 사실 그리 무서운 일이 아니다. 용기도 아니었다.

‘내 사람들이 잘못되는 게……, 더 무서워.’

마차는 평소보다도 빨리 황성에 당도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황후의 처소를 찾았다. 처소 입구에는 종인들이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 황후가 있는 방으로 안내됐다. 몇 년 전에 찾아온 적 있던 그 방이다.

“어서 오세요, 공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율리카 브란테가 황후의 우편에 앉아 있었다.

그때는 나도 율리카 브란테도 어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리지도 않고, 어려서도 안 된다. 그녀도, 나도.

“페레스카의 헬레나가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그렇게까지 격식 갖추지 않아도 돼요. 우리, 이제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자, 어서 공녀께 자리를 내어 드리렴.”

황후의 명령에 시종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공녀를 왜 불렀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겠죠?”

“어제의 일 때문인가요?”

“그래요. 과연, 똑똑하네요.”

황후가 빙긋 미소 지었다. 굉장히 선량한 미소다. 저 여자는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짓는 게 가능한 걸까.

“서류의 내용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만, 백기사단의 훈련 일정으로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요한 문제인지 아닌지는 호리오 경이 판단하겠죠. 참고로 전 굉장히 주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답니다.”

“절도가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절도일까요,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실은 반란을 위하여 주요 군사 정보를 빼돌리려 했다든가…….”

어디까지 엮을 생각이야, 이 여자.

며칠만 지나면 전 기사단에 공개가 될 훈련 일정이 반란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나는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말이 지나치십니다, 마마.”

“그런가요?”

“그런 모함을 하시다니요. 사람들도 코웃음을 칠 일입니다.”

“하긴, 그렇죠. 이것만으로는.”

‘이것만으로는?’

뭔가……, 더 있다는 건가?

황후가 나에게서 율리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 영애. 이리 가져오세요.”

대체, 뭘?

한참을 머뭇거리던 율리카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품에서 두 번 접은 종이를 꺼내 황후에게 건넸다.

‘……설마.’

두 번 접은 종이.

등골이 오싹해진다.

“자, 공녀. 이게 뭔지 기억하고 있나요?”

황후가 종이를 펼쳐, 내가 잘 볼 수 있게끔 들어 보였다.

그것은 내가 율리카에게 맡겼던 종이였다.

‘다시 오실 왕을 맞이하라’는, 잊혀진 언어로 된 문장이 적혀 있는.

절도 누명을 씌우는 정도로는 협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황후가 몰랐을 리 없다.

나와 거래하려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죄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 공녀. 이게 뭔지 기억하고 있나요?”

황후가 마수의 몸에서 발견했던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팔락팔락 흔들며 웃었다.

“여기 아주 불온한 문장이 적혀 있더군요. 알고 계셨나요?”

낭패다.

나는 당황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그건 마수 토벌 때 마수의 몸에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페레스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답니다.”

황후의 가느다란 시선이 나를 꿰뚫어 보듯 전해져 왔다.

가진 밑천을 투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아무 관련도 없는 종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 수는 있겠지요. 레너드 소공작이 반란을 꾀했다든가.”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믿을걸요. 어차피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답니다. 내가 떠들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필요할 뿐.”

황후가 꽤 염세적인 말투로 설명했다.

“겪어 보지 않았나요? 공녀와 브란테 영애, 두 사람은 말이죠. 갑자기 황태자비 후보랍시고, 재채기만 해도 온갖 추측이 붙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잖아요?”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화관 하나 받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온 제국에 율리카와 경쟁하는 신흥 황태자비 후보가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진실은 상관없었다. 떠들어 댈 자극적인 소재만 필요했을 뿐.

“약간의 개연성만 만들어 주면, 반역 공모라는 자극적인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죠.”

“그런 거짓 선동이 얼마나 오래갈까요?”

“오래 안 갈 겁니다. 그러나 소공작의 머리가 떨어진 후까지는 가겠죠. 반역죄는 즉결이니까.”

불안하게 반박하는 나와 달리, 황후의 말투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미 충분히 고심하고 고뇌하여 준비한 시나리오였을 터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너무 늦다. 이건 절도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마마께서는 진실이 밝혀진 후의 반동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으십니까?”

마지막,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떠보았다.

그러나 그런 건 이미 예상했다는 듯, 황후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 정도의 위험 부담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 같습니까?”

끝이다.

더는 반박할 말도, 설득할 패도 없다.

‘이건, 내 잘못인가.’

끔찍한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인간의 악의를 너무나 우습게 생각했다. 율리카의 욕구를 가볍게 생각했다.

문장에 적힌 글이 그런 내용만 아니었다면. 문장의 내용을 끝내 해석하지 못한다 해도, 율리카에게 맡기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마수 토벌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안다. 이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후회가 그치질 않았다.

‘나 자신을 직접 공격해 오리라는 각오는 해 왔었지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내 주변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전생에서의 나는, 약점이 될 만한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선택할 기회를 줄게요, 공녀.”

황후는 그 어느 때보다 기고만장했다.

“내가 소공작의 반역 공모를 공론화하면, 소공작은 죽습니다. 그러나 공녀의 말이 맞아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테고, 그 후에 나는 더 큰 타격을 입게 되겠죠.”

레너드를 죽음에 몰아넣고 황후의 몰락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물러나고 레너드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하시겠어요, 공녀?”

마치 나를 배려한다는 듯, 황후가 살랑살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듯한 태도다.

나는 황후의 우편에 앉아 있는 율리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시종일관 흙빛인 낯을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날 동정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바보 같고, 얼뜨기 같은.

……그건, 나였던 건가.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전하께도……, 같은 협박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황후를 노려보며 내가 물었다.

황후는 턱을 조금 치켜들며 고갤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협박이라니 불편한 단어를 사용하는군요, 공녀. 그저 브란테 영애와의 약혼 일정을 잡기 위해 부를 생각입니다만.”

“그분이 응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응할 겁니다.”

그래, 응하겠지.

“전 공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황태자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요.”

카이사르는 자신의 친우를 희생하면서까지 황제를 탐낼 사람이 아니다.

그가 황제가 되고자 하는 건 오로지 나와의 약속 때문이었으니까.

“늑대라 해도 새끼에 불과하면, 개만도 못한 법이죠.”

나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 정도로 힘껏.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섣불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내가 물었다.

사실 뭘 요구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걱정 마세요. 페레스카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고 떠나라는, 그런 무례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요.”

당연하다.

자고로 거래란 분에 넘치지 않게 해야 옳다. 안 그러면 역풍을 맞게 되니까.

‘페레스카 전체를 향한 시비로 번진다면, 분명 아버지는 페레스카와 혈연으로 이어진 다른 모든 가문까지 일으켜 전쟁을 불사하겠지.’

여자는 그걸 알 만큼은 기민하다. 늑대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노련한 여우다.

“공식으로 황태자비 포기 선언을 하세요.”

고로, 황후의 협박은 나로 한정된다.

“물론 이후로 황태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사적인 만남도 자제하도록 해요. 불미스러운 소문의 빌미는 만들면 안 되니까요. 어떤가요? 이만하면 썩 불합리한 ‘거래’는 아니라고 보는데.”

‘비겁한 방법으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놓고 불합리를 논하는 건가.’

욕이 올라와, 나는 말을 삼키려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쇠의 맛이 돌았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제 오라버니를 돌려주십시오.”

말끝이 조금 흔들려서, 나는 괴로움을 감추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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