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82/156)

* * *

한시라도 빨리 황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럽고 끈적대는 기분 나쁜 공기가 날 붙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영애의 우아함’ 따윈 버린 엄청난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공녀.”

그런 날 붙잡은 건 등 뒤에서 들린 율리카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내 살기 어린 시선에 율리카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내 분노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녀가 가엾지 않다.

그녀를 동정했던 대가가 이렇게 클 줄 몰랐으니까.

“뭔가요.”

씹어뱉는 듯한 내 말투에 율리카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나 곧 결심이 선 듯, 노려보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다.

“억울해할 것 없잖아요? 어차피 공녀는 다 가졌는데.”

“……뭐라고요?”

“난 태어났을 때부터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교육받아 온 사람이에요. 이것 말고는 가진 게 없어요.”

율리카가 떨리는 음성으로 같잖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녀는 다 가졌잖아요? 굳이 전하의 비가 되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의 명예를 높일 줄 알잖아요.”

“그래서, 억울할 것 없다?”

“나도 이런 결정 내리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영애.”

성큼, 나는 율리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율리카가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내 보폭보다 작은지라, 나는 율리카의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됐다.

“지금 당신들 때문에 피해를 당한 내게 이해를 구하는 건가요?”

굳이 살기를 숨기지 않은 탓에, 율리카는 그야말로 맹수 앞의 토끼처럼 얼어붙었다.

“자신의 비겁함과 불의를 어쩔 수 없었다고 포장하지 마세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당신들이 저지른 쓰레기 같은 짓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끝까지 허세를 부리는 건가요?”

내 독설에 율리카가 발끈하여 내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졌어요. 그게 전부예요. 전하의 곁을 차지하게 되는 건 저라고요.”

“그래서, 기쁜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왜 나에게 변명을 하러 뛰어나왔죠?”

“그건…….”

율리카는 끝내 내 시선을 피했다. 어물쩍 흐린 말은, 결국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율리카 브란테.”

나는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카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고갤 들었다. 날 바라보는 율리카의 눈동자는 기름이 낀 것처럼 번들거렸다.

“난 내 허락 없이 내 것에 손대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아.”

“윽, 그게 무슨…….”

나는 율리카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말했다.

“내 남자, 잘 지키고 있어. 어차피 내가 다시 빼앗아 올 테니까.”

율리카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겁에 질린 듯 얼굴이 희었다.

나는 결코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분노하게 했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얼어붙은 율리카를 내버려 둔 채 나는 몸을 돌려 복도를 떠났다.

* * *

레너드가 다시 저택에 되돌아온 건 사흘이 지나서였다.

소통의 문제로 오해가 있었을 뿐 훔친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는 모양이다. 누구의 입김이 있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레너드가 귀가하기로 한 날.

나는 테라스에 끌어다 놓은 의자 위에 무릎을 모아 앉아, 저택 입구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얇은 네글리제가 겨울 초입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에 내내 펄럭였다.

“아가씨. 그러다 감기 걸리시겠어요.”

“괜찮아. 춥지 않아.”

아고트와 베시가 번갈아 가며 몇 번이나 날 설득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솔직히 찬바람이라도 맞아야 냉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네 번째 날 찾아온 아고트는 테라스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곁에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다리에 기대었을 뿐.

“왜 그래?”

“그냥요. 아가씨가 추워 보여서.”

아고트가 빙긋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나도 쓰게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이제 황성엔 안 가시나요?”

“기사단 수련병의 훈련을 봐 주기로 한 건 계속할 거니까, 본저로 돌아가진 않아.”

“전하와는요?”

카이사르는…….

언젠가, 날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질 테니, 부디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나를, 레너드를 지키지 못했던 일에 탄식하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너무 많이 생각하면 마음의 술렁임이 거세져서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앗, 아가씨. 보세요. 도련님이에요.”

아고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나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테라스 난간으로 걸어갔다.

레너드가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집사인 케고르가 그런 레너드를 부축하듯 붙잡았다.

“많이 야위셨……, 앗, 아가씨!”

나는 곧장 방을 뛰쳐나가 1층 홀을 향해 달렸다.

맨발에 네글리제 차림인, 품위도 체면도 없는 꼴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깨에 걸친 담요도, 복도 어딘가에 떨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가 1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 레너드는 이미 홀에 들어서 있었다.

“오라버니!”

내 외침에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레너드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갈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선량한 눈매와 부드러운 입매를 갖고 있다. 다만, 조금 야윈 것 같았다.

“헬레나.”

나는 그대로 달려가 레너드에게 뛰어들 듯 안겼다.

“저런, 헬레나. 이런 차림이면 감기 걸리잖아?”

레너드는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나를 안았다. 그 점이 어쩐지 더 울컥하게 만든다.

레너드가 날 품에서 떼어 내더니,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걱정 많이 한 모양이네.”

“당연하지. 말이라고 해?”

“괜찮아. 잘 해결됐어. 당장 내일부터 기사단 복귀도 할 거고.”

“그렇게 빨리?”

“으음. 적기사단과 백기사단이 전보다 더욱 사이가 나빠진 것만 빼면 다 좋아.”

레너드가 웃으며 말했다. 웃으라고 한 말인 것 같아서, 나도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다행이야.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리고 더욱 결심이 굳게 섰다.

‘내가 지켜야 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소중한 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를 되찾아올 수 있도록.

* * *

스무 살의 겨울은 유독 춥고 혹독했다.

레너드가 무사히 돌아왔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공작저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레너드의 결백이 밝혀진 후에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페레스카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레너드의 결백을 믿지 못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저, 눈치를 챈 것뿐이겠지. 힘의 균형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권력의 깃발은 다시 발레르와 브란테의 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페레스카를 흉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 시간, 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마라. 우리의 할 일은 전하를 보위하는 것이니까.”

기껏 카이사르를 위해 정사에 뛰어들어 놓고선 참으로 정론만 이야기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은 온갖 비겁한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데, 아버지는 답답할 만큼 고지식하고 정직한 방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긴, 해밀턴도 좀 그랬지. 이쪽 편의 인간들이 다 좀 그런가.’

희한하군.

카이사르처럼 성격 나쁜 녀석 밑에 모이는 사람들이 이토록 정직한 인간들뿐이라니.

“호리오가와는 어떻게 됐는지 여쭤도 될까요?”

나는 불편한 얘기인 줄 알면서 기어코 그 화제를 꺼냈다.

레너드와 아버지가 동시에 날 쳐다보았다가 다시 접시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약간의 간격 후, 아버지는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 주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다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구나.

“황후 쪽과 손을 잡은 건 확실해요.”

“그래, 그러니 레너드를 빌미로 네게 협박을 했겠지.”

황후가 그 일로 날 협박할 수 있었다는 건, 황후가 그 사건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포크로 잘 찍히지 않는 깍지 콩을 접시 위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호리오가는 자산가랬지. 그렇다면 명예보다는 돈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일 테고.’

즉, 약점이 ‘돈’이라는 얘기다.

“호리오가에서 하는 사업은 구체적으로 뭔가요?”

대답은 레너드에게서 돌아왔다.

“선상 무역이야.”

“엇,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그렇지. 대형 상선만 두 척이나 가지고 있다니까.”

“흐음.”

그러면 그 사업과 관련하여 뭔가 뒷거래가 오간 걸까?

황후가 무역에 손해를 끼칠 법안을 없애 주겠다고 했다든가.

‘분명 재상이 황후 쪽 사람이었지.’

하지만 호리오가는 황가가 기대고 있는 대금처이기도 하다. 도리어 호리오가에서 배짱을 부릴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호리오가에서 배짱을 부릴 수 없을 정도의 약점.

‘불법적인 일로 꼬투리를 잡혔다든가.’

가능성 있다.

약점이라면 역시 그런 쪽이겠지.

“호리오가의 배에 타는 일꾼들에게서 정보를 캐 보는 게 좋겠어요.”

생각을 정리한 내가 의견을 냈다.

“무역업자 말이냐?”

“막일꾼들이요. 그런 사람들이야 호리오가에 의리를 지킬 일이 없으니, 좀 더 쉽게 뭐라도 털어놓겠죠.”

배를 운영하는 데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분명 단기적으로 고용해 쓰는 일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본인에게 더 큰 이득이 돌아온다면 굳이 호리오와의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일꾼들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레너드가 의문을 제기했다.

“배는 좁고 고립된 장소니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계급이 가장 낮은 일꾼이라 해도 알 수밖에 없을 거야.”

“흐음. 헬레나의 말도 일리가 있다. 지금은 사소한 것이라도 매달려 봐야 할 때니까.”

“가문 사람을 보내면 호리오 쪽에서 눈치를 챌 수 있으니, 기사단원 중 하나를 보내겠습니다.”

“괜찮은 생각이다만, 달튼 경이 허락하겠느냐.”

“이번 일로 단원들 모두 독기가 잔뜩 올라 있으니, 분명 허락할 겁니다.”

나도 고갤 끄덕여 긍정했다. 달튼 성격이라면, 호리오 뒤통수를 후리기 위해서 양잿물을 마시라 해도 흔쾌히 마실 거다.

“둘 다 기억해 두거라. 페레스카는 결코 분노하지 않아. 다만 갚을 뿐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 말에 걸맞게도 분노가 일절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가문이 겪은 모욕을 갚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끈기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역시 나는 이 가족이 좋다.

깍지 콩을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으며, 나는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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