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83/156)

* * *

황후에게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드디어 황태자비의 포기 선언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신이시여. 제가 그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지 않게 하여 주시오며……, 이성을 잃고 검을 뽑지 않게 해 주시오며…….”

“헬레나. 기도가 너무 무서운데.”

초대장을 우그러뜨리고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내 곁에 레너드가 다가왔다.

“신에게라도 의탁해야지. 내 의지를 믿을 자신이 없어.”

“하하하. 혹시라도 결국 이성을 지키지 못하면 바로 나한테 달려와. 목숨 걸고 도망시켜 줄게.”

“아으, 역시 사랑해, 오라버니.”

나는 레너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런 착한 오라버니를 모함하다니, 나쁜 놈들.

“그리고, 헬레나. 전하께서 네게 안부 전해 달랬어.”

“응? 오라버니, 카이사르랑 만났어?”

“응. 나는 전하를 만나지 말라고 협박받은 게 아니니까.”

레너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내가 전령이 되어 줄게.”

“아하하, 전령이라니 그게 뭐야.”

가볍게 넘기고 싶어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는데, 이상하게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새삼 카이사르와 멀리 있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여름 한나절만 만나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직 한 계절이 다 가지도 않은 이별이 왜 이리 가슴 아픈지.

“참고로 전하께서 ‘배 내놓고 자다가 감기 걸리지 마.’라고 전해 달랬어.”

“와아……. 감상에 빠질 틈을 안 주네, 진짜.”

하여튼 성격 나쁜 자식.

보통 이럴 땐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립다 보고 싶다 이런 전언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난, 나 없다고 검 훈련 쉬면 가만 안 둔다고 전해 줘.”

“그거라면 걱정 마. 요즘 살벌한 기세로 기사들 불러 놓고 전승 기록 갈아치우고 계시거든.”

“헉.”

“그야말로 건드리면 죽이겠다는 분위기이셔서, 아주 살벌해. 잿빛 늑대가 각성했다고 다들 난리야.”

“푸하하, 그게 뭐야.”

살기등등한 카이사르라. 그건 좀 보고 싶네.

“아, 그리고 하나 더.”

“……?”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고 전해 달랬어.”

……아.

‘카이사르의 잘못이 아닌데.’

카이사르를 선택한 건 내 의지였다. 몇 번을 말해도 모르는 건가.

아니, 알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혔다는 사실이 괴로운 것뿐일까. 나와 마찬가지로.

“……사과는 나중에 디저트로 이자 쳐서 갚으라고 해 줘.”

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참고 참았는데,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나는 고인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고갤 조금 들었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레너드가 날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나는 레너드의 어깨에 고갤 묻고 어떻게든 눈물을 삼켰다.

* * *

황후의 다과회에는 귀족들뿐 아니라 대형 상단의 상단주나 사업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황태자비를 포기한단 얘기를 어지간히 널리 퍼뜨리고 싶은가 보네.’

그동안 숨죽인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양 보였던 시간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추진력이다.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답네요, 공녀.”

내가 다과회장에 들어서니, 황후가 먼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근심 하나 없이 웃는 그 표정을 보니 역시 짜증이 나긴 하네.

“초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따지고 보면 공녀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걸요.”

“무슨 중대 발표라고 자리까지 마련해 주시고, 배려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올 것 같네요.”

“이 정도 수고는 수고도 아니죠.”

황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웃는다.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어진 눈동자만 부채 너머로 보였다.

“거래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던 공녀의 말에, 소소한 거래의 자리를 마련했던 것뿐인 것을.”

……아.

화살 쏘던 그날 얘기인가, 설마.

‘뭐야, 은근히 뒤끝이 기네.’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공녀. 저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아직 유효하답니다.”

“……네?”

“이제 깨닫지 않았나요? 누구의 비호 아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지.”

세상에. 집념이 장난 아니다. 이 정도면 무서울 정도인데.

“공녀와 저는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전 적어도 옳고 그름은 구분할 줄 알거든요.”

내 침착한 반박에, 부채 너머로 황후의 눈썹 한쪽이 으쓱 올라갔다.

“……그래요. 아쉽군요.”

탁, 황후가 부채를 접더니 내게 등을 돌리고 사람들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짝, 하고 손뼉을 쳐 사람들의 이목을 잡았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 주시겠어요? 공녀께서 여러분들의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수군거리던 공간이 일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모두 생경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들 중에는 율리카 브란테도 있었다.

“자, 공녀. 말씀하세요.”

황후가 여우처럼 웃으며 재촉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남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이야기에나 관심 있을 사람들의 눈빛이, 일제히 날 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러분들이 짐작하고 계신 것과 달리, 카이사르 전하와 저는 혼사를 논할 관계가 전혀 아닙니다.”

술렁―. 공기가 너울거렸다.

“제가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 * *

모임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물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나는 황후 측에 패배한 꼬리 내린 개에 불과할 테니까.

‘그래도 배웅할 시종 하나 붙여 주지 않는 건 치사하네.’

복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대접받고 사는 데 너무 익숙해진 건가. 이 기회에 초심으로 돌아가야겠군.

“앗, 공녀.”

복도 바닥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쫓으며 걷고 있는데, 정면에서 해밀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어 보니, 해밀턴과 카이사르가 보였다.

카이사르를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처럼 웃음도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그런 내게 해밀턴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황후마마의 다과회에 다녀가시는 겁니까?”

“네? 아……, 네에.”

“그렇군요. 그러면……, 음, 저희는 이만.”

해밀턴이 눈치를 살피더니, 내게 꾸벅 인사했다.

‘눈치 없는 해밀턴. 없는 말이라도 만들어서 시간 좀 끌어 주지.’

나는 속으로 해밀턴을 원망하며 살짝 고갤 숙여 인사했다. 카이사르에게도 고갤 숙였더니, 카이사르 역시 내게 가볍게 묵례한 후 날 지나쳐 갔다.

‘어쩜 이리 데면데면할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카이사르.’

그는 마음에 겨울이 찾아온 어느 동화 속의 소년과 같이,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손으로 만지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았다.

혹시, 나도 그럴까.

카이사르가 보기에 나도 그렇게 보일까.

‘웃어 줄걸.’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면, 창이 없는 좁은 복도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복도의 양옆으로는 방이나 다른 복도로 이어진 문이 엇갈려 배치되어 있었다.

“조용하구나.”

평소에도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 아니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씁쓸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검이나 휘두르자. 몸이 고단하면, 잠들기 전에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카이사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잠들 수 있겠…….

“……?”

생각이 갑자기 포물선을 그리며 옆으로 끌려 들어갔다.

갑자기 복도 한쪽 문이 열리고, 뻗어 나온 팔이 날 붙잡고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내 몸은 목격자도 없이,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탁.

어둠 속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나를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은 상대를 금방 인지하지 못했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은 두렵다기보다는 어딘가 애달팠다.

“무슨……!”

나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팔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큰일이다. 지금은 검도 없는데.’

팔꿈치로 상대의 명치를 치고 빠져나오려는데, 귓가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쉬잇.”

그건 말조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게 누구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

그제야 알아챘다.

내 온몸에 스며드는 이 향기는 분명 그의 것이다.

‘엇, 그렇지만 아까 분명 나와 반대편으로 갔잖아?’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방의 구석, 다른 방과 연결되어 있는 문이 한 뼘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보통은 시종들이 들락거리는 방과 방 사이의 연결문이었다. 그 문을 통해 날 앞질러 온 것인 모양이다.

‘목격자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네.’

날 끌어안은 카이사르의 팔을 쓰다듬어 주며 멍하니 생각했다.

황성엔 황후 측 사람들의 눈도 많을 텐데, 대담하기 짝이 없다.

‘하긴, 나 역시……, 이런 식으로라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참 대책 없는 인간들이구나, 우리.

그런 생각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얼굴 보여 줘.”

내 요구에, 그제야 카이사르가 내 몸을 돌려 나와 마주 섰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이제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와 시무룩한 붉은 눈동자.

나는 그의 오른손을 들어, 내 뺨에 댔다. 내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손끝은 열없이 차가웠다.

카이사르가 내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손짓이, 눈빛이, 떨리는 입술이, 어느 것 하나 애달프지 않은 게 없다. 모든 것이 아득하다.

“잘 지냈어?”

카이사르가 자조하며 내게 물었다.

“응.”

“밥 잘 먹고?”

“응.”

“잠도 잘 자고 있지?”

“그럼.”

거짓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버리면 네가 슬퍼할 테니까, 하지 않아.

“나도 그래.”

이것 봐. 어차피 너도 내게 거짓말하잖아.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을 뿐이다.

“곧 율리카 브란테와 약혼 선언이 있을 거야.”

카이사르가 말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내 남자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 내 남자의 약혼 소식은 가슴이 아팠다.

“그렇지만 난 아무것도 포기 안 했어.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거야.”

카이사르가 말했다.

약혼을 파기하겠다는 의미다.

카이사르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그의 향기가 내 온몸에 잠식한다.

“기다려 줘, 헬레나.”

“응.”

“꼭 기다려야 해.”

“그래.”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걱정 마.”

“다른 남자 만나지도 말고.”

“알았어.”

“포기 안 할 거니까.”

카이사르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숨을 쉬기 힘들어질 정도로 있는 힘껏.

“그러니까 헬레나도, 아무것도 포기해서는 안 돼.”

응.

응, 그래.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던 두 번째 삶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이 시시하고 무료할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간신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생겼다.

“포기 안 해. 단 하나도.”

율리카는 내게 다 가졌다고 했지만, 아니야. 난 너밖에 가진 것 없어. 다 빼앗겨도 좋고 사라져도 좋으니까, 넌 꼭 내게 돌아와야 해.

나에게 다시 돌아와야 해.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닫히는 문 너머로, 어둠 속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이사르가 보였다.

자조하는 그의 표정이 가슴 아프다. 당장이라도 다시 되돌아가 키스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문은 빠르게 닫혀,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

‘5분……, 아니, 50초는 됐을까.’

그와 닿아 있던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짧았다.

그는 내 안에 빠르게 차올랐다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사라진다.

‘꿈도 이보다 허망하진 않겠어.’

남은 것은 공허뿐이다.

카이사르.

너는 내게 참으로 많은 감정을 가르치고 있구나.

문에서 한 걸음 뒷걸음질 치며, 나는 끝없이 자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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