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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리라 선언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황가에서는 율리카와 카이사르의 약혼을 발표했다.
약혼 파티 초대장은 당연하게도 페레스카에도 날아왔다.
‘가고 싶지 않다, 진짜.’
이전에는 귀찮아서 가기 싫었던 거라면, 이번엔 꼴 보기 싫어서 가기 싫다.
잘난 듯이 미소 짓고 있을 황후도, 순진한 척 수줍어하며 카이사르의 곁에 있을 율리카도, 다 꼴 보기 싫었다.
“사람을 이렇게 열렬히 미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날 죽이려 들던 전생의 형제들조차 그러려니 하던 나였는데.
티테이블을 정리하려 방에 들어온 아고트가 그런 내게 말했다.
“뭔가 목표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닐까요?”
“부정적인 목표는 사람을 찌들게 만드는 것 같아.”
“많이 피곤해 보이시긴 하네요.”
음, 그럴 수밖에.
잡생각 하지 않으려고 훈련량 늘렸지, 그런데도 매일 밤 잠을 설치고 있지, 식욕도 없어서 식사량도 줄었지…….
‘이러다가 내가 소멸하겠다.’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뭐람. 얼른 정신 차려야지.
“괜찮으시면 기분전환 할 겸, 내일 저랑 나가지 않으실래요?”
“나가? 어디로?”
“실은 전에 말씀드렸던 에버렛 씨가 내일 하루 가게를 쉰다고 해서요.”
“드라코교 집회에 참여한 적 있다는 그 사람?”
“네.”
아, 맞다.
황후와의 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 정신 나간 종교 단체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좋아. 내일 약속 잡아 줘.”
“네, 그럴게요.”
“고마워, 아고트. 너도 신경 쓸 것 많았을 텐데.”
나는 아직도 교관의 자격으로 황성을 오가고 있다.
요즘 궁정 귀족들과 마주칠 때마다 기묘한 시선을 느낀다. 그래도 공작가의 영애이니, 직접 비아냥거리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아고트는 사정이 다르다. 날 기다리는 동안 어떤 일을 겪었을지…….
날 기다리지 말고 되돌아가라는 말도 해 봤지만, 아고트가 한사코 거절했다. 날 보필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면서.
“아가씨에게 필요한 종이 되겠노라고 맹세한걸요. 아가씨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전 무적이에요.”
아고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내 안달하고 초조해하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응. 그럼 나도 아고트를 위해 무적이 되어야겠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이전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어.
그것을, 아고트를 보며 배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껄끄러운 감정 하나 남지 않은 후련한 기분으로 활짝 웃었다.
* * *
에버렛과 만난 건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에버렛은 옅은 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여성이었다. 양 뺨에 주근깨가 가득해 귀여운 인상이었다.
얼른 보기에는 아고트와 비슷한 나이 대였으나, 아마 그것보다는 더 먹었을 것이다.
“선뜻 나와 줘서 고마워요, 에버렛 양.”
내 인사에,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버렛이 화들짝 놀라며 연거푸 고갤 숙였다.
“네? 앗, 아니요, 아닙니다! 어휴, 그, 언제나 공작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앗, 저……,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네! 긴장, 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촌스러워서……, 으으, 이, 이런 비싸 보이는 식당에 오게 될 줄은…….”
제법 대중적인 곳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건가. 낭패로군.
다행히 에버렛의 곁에 앉은 아고트가 긴장한 에버렛을 다정하게 달래 주었다.
“괜찮아요, 에버렛 씨. 우리 아가씨 되게 착해요. 우리 도련님 다음으로 착한 분이에요.”
아고트가 날 아무리 사랑해도, 착한 순위는 레너드 다음인 거구나. 뭐, 나도 인정하지만.
“실은 내가 드라코교에 관심이 생겼는데, 귀족인 내가 참여할 만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에버렛 양을 보자고 한 거예요.”
“아, 네……. 아고트에게 듣긴 했는데……, 사실 저도 신도라 하기에는 몇 번밖에 참여를 안 해 봐서…….”
용건을 듣고 나니 조금 긴장이 풀린 건지, 에버렛이 다소 진정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왜 몇 번밖에 안 갔어요? 에버렛 양은 그 종교가 별로였나 봐요?”
“어쩐지 좀 무서워서요.”
“무섭다고요?”
내가 미간을 슬쩍 구기며 물었다. 에버렛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교주라는 사람이 용의 힘이라면서 막 요술을 부려요. 물건을 공중에 띄운다든가, 순간 이동을 한다든가.”
……분명, 마법이다.
서민들 눈에는 그런 잔재주가 요술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걸 용의 힘이라고 떠들어 댄 건가. 그러니 사람들이 쉽게 홀릴 수밖에.’
왜 그 종교가 서민들 대상으로만 전파가 됐는지 알겠다. 귀족들이라면 그것이 마법이라고 단숨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냥 평범한 사이비 종교였던 건가.’
음, 아니 잠깐.
지금 시대에도……, 그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마법사가 남아 있나?
“혹시 거기서 마수와 관련한 일을 꾸미진 않던가요?”
“네? 마수요? 아니, 그렇게 거창한 종교는 아닌 것 같던데요.”
에버렛이 질린 얼굴로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용을 섬기는 종교에서 고작 마수 따위로 거창함을 논하는 건가. 으음.
‘에버렛은 몇 번 간 게 전부였다고 하니, 모를 수도.’
마수를 불러들인다든지, 조종한다든지 할 정도의 레벨이라면 교단 내에서도 계급이 높겠지.
‘아예 내가 잠입해서 알아보는 게 속 시원하겠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고트가 에버렛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교주가 요술 부리는 거, 에버렛 씨도 직접 봤어요?”
“응. 멀리서 본 거지만. 역시 뭔가 장치 같은 걸 이용한 거라고 생각해.”
“피아노 줄이라든가?”
“그래, 그런 거.”
“교주는 나이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 단체의 교주라는 사람들은 다들 호호 할아버지던데.”
아고트가 고갤 갸웃하며 묻자, 에버렛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아냐, 되게 젊더라고.”
……응? 젊어?
이번엔 내가 물었다.
“몇 살 정도 되어 보였어요?”
“네? 그, 글쎄요……. 멀리서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많아도 서른 살은 안 되어 보이던데요.”
그럼, 이십 대란 말인가?
이십 대에 이렇게 큰 교단을 일으키는 게 가능하다고?
‘아니, 잠깐만. 그 종교, 꽤 오래전부터 있지 않았던가?’
내가 해밀턴에게 그 종교에 대해 들은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럼 그 교주라는 인간은 이 종교를 대체 몇 살 때부터 이끌었다는 얘기지?
“그……, 교주라는 사람, 어떻게 생겼나요?”
“외모는 가까이에서 안 봐서 모르겠고……, 금발이었어요.”
금발.
노에도 분명, 금발이었다.
“이름은? 교주 이름은 알아요?”
“아뇨. 그냥 다들 ‘용주님’이라고 불러서.”
여기에서 노에르 떠올리는 건 너무 비약인 걸까.
사실 이렇다 할 연결 고리는 없다.
신, 구원자, 왕.
이 종교에서 외치는 그 기묘한 단어의 나열이, 우연히 그가 내게 했던 말과 겹쳤을 뿐.
‘하지만 드라코교와 나는……, 분명히 연관이 있을 거야.’
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확신했다.
나는 500년 전 용을 봉인했던 장본인이었다. 용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또―
용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에버렛 양. 그 종교 집회, 또 언제 하는지 알고 있나요?”
“듣기로는 이번 달 말에 포츠 광장에서 모일 거라고…….”
“포츠 광장이라면, 저지대에 있는 거잖아요? 아가씨. 설마……, 직접 가시려는 건 아니죠?”
아고트가 불길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아니라는 말 대신 작게 웃어 줬다.
물론, 직접 가 볼 작정이다.
그 괴상망측한 종교의 중심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