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의 행방
포츠 광장은 제국 수도의 동쪽, 슬럼에 위치한 원형 광장이다.
좁은 골목을 어지럽게 걷다 보면 뜬금없이 이 광장이 툭 튀어나온다. 당연히 마차로는 들어올 수 없다. 대광장의 3분의 1 규모로, 분수대 같은 것도 하나 없다.
귀족들은 저지대까지 올 일이 없기 때문에, 광장까지의 불편한 진입로를 개편하는 일은 소원하다.
“서민 종교라는 걸 생각하면, 딱 걸맞은 장소이긴 하네.”
골목 입구에 서서 광장 쪽을 바라보며 나는 자조했다.
“광장이라기보다는 그냥 공터 같은데.”
“슬럼의 대부분 길이 포츠 광장에서 시작된다나 봐요.”
내 혼잣말에 곁에 선 아고트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흘끗 옆을 쳐다봤다.
나와 같이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아고트가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렸다.
“혼자 와도 됐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아가씨라도 슬럼가는 위험하다고요!”
내 말에 아고트가 단박에 반박을 해 왔다.
“저만 믿으세요. 이래 보여도 부랑아들과 굴렀던 전적이 있는 몸이니까요.”
그거, 언제 적 얘기야.
더구나 햇수로 치자면, 내 쪽이 슬럼가에서 구른 기간이 더 오래되었을 것 같은데.
‘으음. 의욕이 넘쳐 보이니 굳이 지적하지는 말까.’
사실 나를 ‘아가씨’라며 존대하는 아고트가 곁에 있는 게 더 위험해 보인다만……, 뭐, 그 점도 굳이 지적하진 말아야겠다.
“아직 한산한 걸 보니, 집회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지?”
“아직 낮이어서 그럴까요?”
“응, 좀 더 기다려 봐야겠네.”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고트가 빈 나무 상자를 들고 와 탁탁 먼지를 털며 내게 권했다.
누가 봐도 아가씨와 그 몸종이잖아. 아고트 때문에 들키면 어쩌지.
그치만 도움이 됐다는 이 뿌듯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거절도 못 하겠다. 크으.
“고마워.”
결국 나는 아고트가 권한 자리에 순순히 걸터앉았다.
‘빈민가라고 해도, 수도라 그런지 분위기가 험악하진 않네.’
나는 상자에 걸터앉아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광장 바닥에는 모자이크 타일이 깔렸고, 건물도 허름하긴 하나 제법 반듯했다.
오가는 이들도 표정이 밝고 옷차림이 깨끗했다. 심지어 몰려다니는 부랑아들도 모두 구멍 나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시골 빈민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
“네, 그러게요.”
“용 같은 허무맹랑한 걸 숭상하지 않아도 다들 먹고 살 만해 보이는데.”
“글쎄요. 설령 황제 폐하라 해도, 더 갖고 싶은 게 있지 않으실까요?”
전생의 나는 굶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장땡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을 목표로 삼아 살아왔다. 학대를 견디며 검을 배웠던 것도, 용병단을 따라다니며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악룡과 싸워 봉인한 것도, 황가에 들어갔던 것도.
“아가씨는 그런 거 없으세요?”
“나는…….”
얼마 전까지는, 없었다.
그저 다 귀찮고, 부질없고, 무료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하는 게 생겼다.
뺏기고 싶지 않은 게 있다.
되찾아와야 할 것이 있었다.
“나도 있어.”
나는 아고트를 향해 작게 웃었다.
욕망이 생겼을 뿐인데,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내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겨울이라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니, 광장에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평범하네.’
교단 사람들을 특징지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 모이는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렇다 할 특징은 없었다.
정말 거리에서 흔하게 마주칠 법한 서민들이었을 뿐이다.
“좀 맹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반대쪽 골목에서 나온 한 사람을 보고 쓰게 웃었다.
잿빛 후드에 목도리를 둘둘 싸맨 사람이, 후드 구멍으로 두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집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인가 봐요.”
아고트도 내 시선을 따라 고갤 돌렸다가 문제의 사람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쳐도 되게 어설퍼 보인다.”
“그러게요.”
그 사람은 우물쭈물 광장 중앙 쪽으로 나오다가,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기도 했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모양새가 꽤 안쓰럽다.
“우리도 슬슬 자리를 잡으러 이동할까?”
“네!”
사람들이 몰리면 앞쪽으로 나갈 수 없다.
맨 앞자리는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중간 자리 정도는 되어야 교주 얼굴을 분간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용 때려잡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불쑥 불순한 생각이 올라왔다.
마녀라며 화형대에 달 기세로 달려들까?
상상을 해 보니, 입맛만 써졌다.
‘뭐, 나라고 딱히 세계를 구할 목적으로 악룡과 싸웠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크루세흐와 싸운 건, 현상금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크루세흐는 당시 대륙이 망하느니 어쩌느니 할 정도의 큰 위협이었다.
오죽하면 그 한 마리를 잡은 직후 대륙에서의 내 명성이 급상승했겠는가.
‘그런 용을 숭상하다니, 대체 교주라는 인간은 무슨 생각인 거지?’
생각할수록 의문만 든다.
“앗, 시작하려나 봐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아고트가 불렀다.
그 말에 고갤 들어 보니, 광장 중앙에 커다란 나무통 몇 개를 놓아 순식간에 간이 무대가 만들어졌다.
불과 몇 분 사이 광장에는 어깨를 부대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나는 벗겨지려는 후드를 조금 더 당겨 얼굴을 가렸다.
“아니, 무슨 사람이 이렇게…….”
“그러게요. 대광장에서 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야, 이 종교.
생각보다 규모가 큰 거 아니야?
“어이, 발 밟지 마!”
“흐익, 죄송합니다!”
으응?
나는 내 옆자리에서 일어난 소란에 무심코 고갤 돌렸다.
조금 전 건너편 골목에서 보았던 예의 맹해 보이던 사람이, 어느새 사람의 파도에 떠밀려 내 옆자리까지 온 것이다.
‘목소리가 남자네.’
흐음.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같기는 한데……, 착각인가?
“여러분.”
그때, 무대 쪽에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말 그대로 ‘퍼져’ 나왔다. 크게 소리를 친 것도 아니고, 마치 옆 사람에게 말하듯 말한 것임에도, 목소리는 엄청난 크기로 광장 전체에 닿았다.
“엇, 뭐야?”
그 생소한 감각에 나도, 아고트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모인 이들은 이미 익숙한 상황인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헉,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예의 맹해 보이는 사람은 빼고.
“저 사람이 ‘용주’라는 사람일까?”
“그래 보이죠? 이상한 술수를 쓰는 거 보면.”
나와 아고트가 무대에 선 사람을 보며 속닥거렸다.
무대에 올라온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였다. 솔직히 듬직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후드 달린 긴 로브를 입었다. 어두운 데다 쓰고 있는 후드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져, 생김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용께서 돌아오셨을 때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되실 분들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물 흐르는 듯 부드러웠다. 카리스마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쩜 목소리마저 저리 유약할까.’
놀랄 정도로 교주라는 자리에 안 어울리는 남자다.
더구나 유약한 남자는 싫어도 ‘노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상당히 젊어. 에버렛의 말대로 20대 정도일 거야.’
노에는 처음 만났을 때 이미 20대 중반쯤이었다. 역시, 그가 아닌가.
내가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중에도, 교주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육신은 조건을 갖춰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혼만 준비되면 용은 우리의 곁으로 귀환하실 겁니다.”
“오오, 용이시여!”
“용이 오신다!”
교주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입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무대 앞에 놓여 있던 누군가의 짐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짐은 사람들 머리 위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무대 위로 돌아가 툭 떨어졌다.
“헉, 저게 뭐람.”
그 기이한 일에 아고트가 깜짝 놀라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남자가 이어 말했다.
“자, 보셨습니까?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이 용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선택받을 수 있도록 더 강하게 기도하셔야 할 때입니다.”
“용님, 저를 선택해 주세요!”
“다 바치겠소! 돈도 자식도 다 바칠 테니, 나에게도 그 힘을 좀 줘!”
사람들이 광란이라도 일으킬 듯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저거로구나. 사람들을 선동한 힘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특히 서민들에게는 그저 생소할 뿐인 기이한 능력.
직접 눈앞에서 보여 주는데 의심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뭐, 뭐, 뭐였을까요, 방금?”
봐, 아고트도 금방 현혹됐잖아.
아고트가 눈빛이 초롱초롱하여 무대에 선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남자가 톤을 높여 말했다.
“믿음 있는 자는 저를 따르십시오. 제가 용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 용을 직접 보고 싶으신 분들, 계십니까?”
용을……, 직접 본다고?
그 수상쩍은 말에도 사람들은 서로 자신을 데려가라며 손을 들고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은 ‘그래도 뭘 믿고 따라가기까지 해?’ 하며 주춤했지만, 극히 일부였다.
‘따라가 봐야 하나.’
용이 없다면, 이 종교는 그야말로 사이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 용이 있다면.
그리고 그 용이 크루세흐와 관련이 있다면, 나는…….
“으아악, 밀지 마세요!”
“앗.”
아,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 중인데 왜 이렇게 밀고 난리야.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 밀려, 나는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쳤다.
“앗,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나와 부딪친 사람이 예의 맹한 사람이었다는 걸 확인한 후 용서하기로 했다. 불쌍하잖아.
그러나 상대방은 정말 미안했는지,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하며 내게 계속 사과를 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숙녀분을 치다니, 아무리 실수지만……, 헉?”
“음?”
연신 꾸벅대던 상대방과 눈이 딱 마주쳤다.
몰라볼 수도 없을 만큼 가깝게 밀착한 상태로, 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물론 상대방도 날 확인했을 거고.
“녹트 자작님?!”
“페레스카 공녀?!”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도대체 왜 여기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외치다니, 쓸데없이 합이 좋다. 해밀턴과 합이 좋아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자작’이라든지 ‘공녀’라든지 하는 호칭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우리 주변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사람들이 우릴 중심으로 둥그렇게 멈춰 섰다.
“뭐야, 귀족이야?”
“귀족이 왜 여기에?”
젠장.
망했다.
“앗, 그, 귀족 아닙니다! 이름이 자작입니다, 이름이!”
해밀턴이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지껄였다. 차라리 닥치고 있지.
곁에 선 아고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참담했으면.
그때.
무대에 서 있던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런……!”
응?
무대 쪽을 돌아보니, 교주가 무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파들파들 떠는 게 보였다. 마치 신의 재림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기다렸습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왕.”
그리고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노에……!”
거기에는 10여 년 전 축제 때 보았던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그때로부터 조금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변함없는 얼굴로.
노에.
대체 넌……, 누구야?
“우리 모임을 방해하러 왔지! 더러운 귀족 놈들!”
“성회에서 보낸 걸지도 몰라!”
“죽여버려! 죽여서 강에 내던지자!”
그사이 사람들은 우리를 향한 태도를 확정했다. 귀족은 문답 무용으로 없애는 게 이 동네 규칙인가 보다. 물론 해밀턴의 변명이 씨알도 안 먹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아고트!”
“네, 아가씨!”
사람들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아고트가 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후드 아래 감추고 있던 검을 검집째 꺼내 크게 휘둘렀다.
“길을 뚫을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고트가 화살 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튕겨 나갔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나 길을 텄다. 일부는 용감하게 덤벼들려 했지만, 아고트의 공격에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해밀턴의 손을 덥석 잡고 소리쳤다.
“가요.”
“이, 예?”
“여기서 맞아 죽을 거예요?”
내 말에 해밀턴이 하얗게 질렸다. 다행히 금방 상황 판단이 됐는지, 그는 오히려 나보다 앞서 아고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광장을 벗어나기 전,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무대에는 여전히 후드를 벗은 노에가 서 있었다.
날 향하여 인자하고도 무해한 미소를 지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