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슬럼가 사람 대부분이 광장에만 모여 있어 다행이었다. 광장을 벗어나 골목에 들어선 후에는 도망치는 게 좀 쉬웠으니까.
대로로 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고 나서야 우리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던지라, 날이 추운데도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으허어……, 주, 죽는 줄 알았습니다아……!”
해밀턴이 망토를 벗으며 말했다. 망토 안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 인간, 변장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괜찮으세요, 아가씨?”
“난 괜찮아. 그러는 아고트는? 다친 거 아냐?”
앞장서서 길을 뚫느라 사람들과 충돌도 몇 차례 있던 아고트였다. 아니나 다를까, 꼼꼼히 살펴보니 뺨이며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뭐야, 다쳤잖아?”
“에이,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에요.”
아고트가 뺨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히죽 웃었다.
“집에 가면 약 바르자. 하아, 속상하게.”
“마수 토벌 때 갈비뼈가 부러지고 독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 되셨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되게 이상하군요.”
내가 아고트의 상처를 살피고 있자니, 화단에 걸터앉아 있던 해밀턴이 핀잔하듯 말했다.
흘끗 쳐다보니, 그는 10년쯤 늙어 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자작님은 무기도 안 챙겨 오셨어요?”
“잠입인데 무기를 어떻게 챙깁니까?”
음, 그런 고급진 정장을 망토 아래 입고 있던 인간이…….
“하아. 설마 제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보복을 하러 온다거나 하진 않겠죠.”
“무서우신가요?”
“무섭죠. 서민들은 가끔 머리가 휙 돌면 성난 들소처럼 떼로 달려드는데, 감당이 안 된다고요.”
“어두워서 못 봤을 거예요. 하여튼, 겁도 많으셔라.”
서민들이 떼로 몰려들 땐 이미 그들이 극한의 상황에 몰렸다는 의미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목숨 걸지 않고서는 귀족들에게 달려들 일이 없을 텐데.
“그나저나 자작님은 거긴 왜 계셨던 거예요?”
“제가 묻고 싶군요. 공녀께서도 설마 드라코교를 믿으십니까?”
“제가 그 교단 사람이면 이렇게 도망쳤겠어요?”
“음, 그건 그렇지만…….”
해밀턴이 목을 긁적거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교주로 보이는 사람이 공녀를 보고 뭐라고 하는 게, 꼭 아는 사이인 것 같아서요.”
“아……, 그건 좀 복잡한 사연이.”
궁지에 몰린 기분에, 나는 해밀턴에게서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해 줘야 하나, 머릿속에서 이야기의 편집이 분주하게 진행됐다.
“역시 뭔가 있긴 있군요?”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자작님, 도대체 왜 거기 계셨는지요.”
“그냥, 정탐입니다.”
“왜요?”
“이유를 어떻게 함부로 발설합니까?”
“아, 그런가요? 드라코교 사람들에게 자작님의 정보를 넘겨도 된다는 뜻이죠?”
“공녀! 잔인하십니다!”
“자아, 저희 덕분에 목숨 건지신 거잖아요. 어차피 실토하게 되실 거, 순순히 부세요.”
“그렇게 따지자면 공녀가 아니었으면 들통날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아닐걸요? 들통났을걸요? 자작님, 되게 어리바리하셔서 굉장히 티 났다고요.”
“아니, 그런 심한 말을……!”
“어차피 피차 궁금한 게 있어서 거기 간 거 아닌가요? 정보 교환도 할 겸, 솔직히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공녀 먼저 말씀하시면 저도 말을……, 으에취!”
해밀턴이 거하게 재채기를 했다.
쌀쌀한 날씨에 땀을 흠뻑 흘렸으니, 땀이 식으며 체온이 떨어진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슬슬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옆에 선 아고트도 코를 훌쩍였다.
“으으……, 이, 일단 장소를 바꾸죠. 길바닥에서 할 얘기도 아닌 것 같고.”
“그렇긴 하네요.”
“늘 가던 레스토랑으로 가시죠.”
해밀턴이 제안했지만, 난 좀 망설여졌다.
그 레스토랑은 귀족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내가 카이사르의 보좌인 해밀턴과 따로 만나는 게 황후의 귀에 들어가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차림으로 레스토랑 출입이 가능할까요?”
나는 망토의 끈을 풀어 벗었다.
안에 입고 있는 옷은 여염집 규수들이나 입는 허름한 원피스였다.
해밀턴이 그 의상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으아니, 왜 그런 옷을.”
“잠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망토만 안 벗으면 됐지, 뭘……, 아니. 이런 얘긴 그만하죠. 이러다가 진짜 감기 걸리겠습니다.”
해밀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춥기는 추운지, 양팔을 감싸 안더니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현명한 결정.
나는 긍정의 의미로 빙긋 웃어 주었다.
* * *
해밀턴과 알고 지낸 지는 오래였지만, 그의 저택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저택은 굉장히 아담한 2층짜리 건물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의 경계선이 보일 정도로 정원의 크기도 작았다.
‘귀여워라.’
물론 엄연히 귀족가의 저택이라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이번 생에서는 하도 대저택만 보며 살다 보니, 내 감각이 조금 뻔뻔해진 것 같다.
“응접실로 가시죠. 아고트 양, 미안하지만 다른 방을 마련해 줘도 될까요.”
“전 옆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해밀턴의 말에 아고트가 반박했다.
“아냐. 아고트도 옷 갈아입고 좀 쉬어. 땀에 젖은 옷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
내가 아고트에게 재차 설득했다. 아고트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내 명령에는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아고트는 저택의 메이드를 따라 다른 방으로 향했고, 나와 해밀턴은 응접실로 향했다.
벽난로 덕분에 응접실 안은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곧 따뜻한 차가 나와 한 모금 마시니, 온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큰일이다.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자, 이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나와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고 몸이 노곤해진 해밀턴이,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아, 좋아요.”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뭐, 전생에 대한 얘기만 안 하면 되겠지.
“저부터 얘기할게요. 실은 얼마 전, 마수의 몸에서 발견된 문양을 해석했어요.”
“마수 토벌 때 발견됐던 문양 말이군요.”
“네.”
“하지만 분명 학자들도 룬어가 아니라 해석이 불가능하다 했는데, 무슨 수로 말입니까?”
“룬어는 아닌데, 룬어 이전에 사용하던 문자래요. 마족의 문자랑 비슷하다고……, 뭐, 사실 이 부분은 저도 전공자가 아니라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누구에게 들으신 말입니까?”
“율리카 브란테요.”
“아……, 으음. 최근 일어난 많은 사태의 원흉 말씀이시군요. 그들이 어떻게 그 문양에 대해 아는가 했더니, 그 발단이 여기 계셨을 줄이야.”
해밀턴이 다소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가 그 문장을 가지고 나뿐 아니라 카이사르도 협박했을 테니, 해밀턴도 대강의 상황은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손으로 넘겨준 게 저입니다. 크흠.
나는 머쓱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문장 내용이, 왕이 어쩌고저쩌고였는데……, 율리카 브란테의 말로는 ‘왕’을 마족의 언어 그대로 발음하면 ‘크루세흐’라고 한다더라고요.”
“악룡 크루세흐 말입니까?”
“네.”
“그래서 용을 섬기는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조사를 하시려 한 거군요.”
“정확히 어떤 관련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그러면 아까 그 교주가 공녀에게 말을…….”
“앗, 그만.”
나는 해밀턴에게 손바닥을 보여 질문을 막으며 물었다.
“이번엔 자작님께서도 말씀해 주셔야죠?”
내 정보만 다 캐내 가려 하면 곤란하지.
해밀턴이 미간을 찡그리며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 자기만 말을 안 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뭐, 저도 공녀와 비슷합니다. 마수가 급증한 것이 그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 사실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카이사르가 그 일을 따로 조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그리고 또…….”
응? 또?
“최근 그 종교와 관련하여 행방불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서.”
행방불명.
아고트에게 이미 들은 이야기다.
“그걸 왜 치안대가 아닌 자작님께서?”
“치안대에서는 행방불명이라 판단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종교 활동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사라졌다고요.”
“자발적으로 사라져요?”
“아마도 아까처럼 그 교주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어디론가 끌고 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만.”
해밀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추측입니다만, 크루세흐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악룡 크루세흐의 힘은 막강했고, 인간들은 용을 죽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단테 레나투스는 용을 봉인하기로 했다. 전투에 함께했던 마법사가, 단테가 용을 조각 낸 틈을 타 용을 영원히 봉인했다.
단테가 원하는 방식으로.
단테가 허락한 장소에.
그리고 그 봉인된 장소는 그 마법사와 자신밖에는 모른다.
그때도. 지금도.
에레즈에게조차 말한 적 없으니까.
“그건……, 아닐 거예요.”
헬레나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해밀턴의 추측을 부정했다.
“네?”
“크루세흐는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록에는 용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여 어딘가에 봉인했다고…….”
“그러니까, 그 봉인 장소가 사라졌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라져요? 무슨 의미입니까, 그게? 공녀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해밀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마치 날 의심하듯이.
“그러고 보니 교주라는 자도 공녀에 대해 아는 듯 얘기했었죠?”
“카이사르가 납치됐던 축제 때, 혹시 기억하세요?”
나는 고갤 들어 해밀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 마을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때도 저에게 똑같은 말을 했어요. 구원자니, 신이니, 왕이니.”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몰라요. 그때 처음 만났고, 그 후로 만난 적 없었으니까. 그동안은 그냥 미친 사람이구나 싶어서 잊고 살아왔었어요.”
“하긴……, 저라도 그런 헛소리를 들으면 미친놈이구나 생각하긴 할 것 같군요.”
“그렇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거의 10년이 흐르도록 늙지 않고 그대로인 남자. 이제는 퇴화한 마법을 ‘용의 힘’이라며 사용하는 사람.
나를 왕이라고 부르는 사람.
‘왕. 크루세흐.’
어쩌면 그가 부른 ‘왕’이라는 말은, 한때 황제로 호령하던 날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윤곽이 드러날 듯하다.
크루세흐의 부활.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 교주라는 작자는 그렇다 치고. 지금은 사라졌다는 그 봉인 장소란 대관절 어딥니까?”
해밀턴이 재차 물었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더 숨기는 것도 곤란하긴 하겠지. 안다고 해도 이미 사라져버렸을 테니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긴 한숨을 내쉰 후 해밀턴에게 조건을 달았다.
“대신 어떻게 아느냐고 추궁하지 말아 주세요.”
“좋습니다. 맹세하죠.”
“용은 단테 레나투스의 심장에 봉인됐어요. 용의 힘을 억누를 만큼 강한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네?!”
해밀턴의 눈이 커다래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안에 봉인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벌써 500년도 지났는걸요. 단테의 시체는 썩어 사라졌을 거고, 봉인된 용도 함께 사라졌겠죠.”
하지만 해밀턴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경직된 표정에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시죠?”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공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았어요.”
이젠 내가 놀랄 차례다.
“네?!”
해밀턴이 어두워진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은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이 그렇듯 방부 처리 되어, 성회 대성전의 지하에 말이죠.”
이런…….
나의 친우 에레즈여.
대체 왜 날 땅에 묻어 주지 않은 것이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는 공동묘지에 묻고, 돈이 없는 서민들은 야산에 파묻기도 한다. 귀족들은 가문 묘지가 따로 있어, 그곳에 대대손손 묻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 묻히지 않는 이들도 가끔 있다.
대단한 업적을 쌓은 위인이나, 신앙심 넘치는 인생을 산 성자들. 대대로 이어질 작품을 남긴 문호들.
이들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으리 번쩍한 돌관에 뉘여, 성회 지하에 보관된다.
“500년이나 그런 수치를 당하고 있었을 줄이야……!”
해밀턴이 들려준 소식에 나는 뜨악했다.
내 시신이 지난 500년간 성회 지하에서 파릇파릇하게 버티고 있었을 줄이야!
“아니, 그것이 왜 수치입니까? 영광이죠!”
“그런 거 내버려 두면 나중엔 내 관, 이 아니라, 단테 레나투스의 관이 관광 코스로 활용될걸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구경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해밀턴이 쓰게 웃으며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그럴 일 없다는 표정이었다.
“거기 보관된다는 건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웠다는 증거입니다. 영광된 일이라고요.”
“아, 네. 나중에 자작님 돌아가시면 자작님 시신은 꼭 거기 보관해 달라고 제가 전하께 간청드릴게요.”
“네? 그건 좀…….”
“그것 봐요.”
“아니, 그런데 왜 공녀께서 그리 수치스러워 하십니까? 단테 레나투스 본인은 영광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과거에 돌아가 에레즈 어깨를 잡고 흔들며 ‘대체 왜 날 묻어 주지 않은 건가, 나의 친우여!’ 하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라고.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해밀턴이 큼큼 헛기침을 한 후,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했다.
“드라코교의 교주가 봉인의 위치를 과연 알고 있을까요?”
해밀턴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말을 믿으시나요?”
“반쯤은요.”
반은 안 믿는다는 의미인가.
뭐, 사실 아무 증거도 없는 주장을 반이라도 믿어 주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공녀가 드라코교의 꿍꿍이와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하잖습니까? 교주가 공녀에게 접근한 것도 그렇고.”
거기까지 말한 후, 해밀턴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동안 공녀와 알고 지내며 쌓아 온 신뢰감……, 이라 해 두죠.”
음. 멋진 말이구나. 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해밀턴이 나를 믿는다 하였으므로, 나도 해밀턴을 믿고 의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는 그 교주도 분명 알 거라 생각해요.”
나는 해밀턴에게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전했다.
노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내가 전생에 단테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걸 아는 사람이 단테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더욱이 나를 부른 ‘왕’이라는 칭호가 사실 ‘크루세흐’라는 의미였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가장 좋은 방법은 단테의 시신을 태워 없애 버리는 건데.”
“제 머리는 소중합니다, 공녀. 아직 몸에서 분리되고 싶지 않습니다만.”
해밀턴이 ‘그런 짓을 하면 단두대에 올라가게 될 거다.’라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했다.
“공녀의 말씀만 듣고 시신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경비를 세워 더 철저하게 지키는 건 어떻습니까.”
“여기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고 광고하려고요?”
“흐음.”
내 반박에 해밀턴이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성회 몰래 시신을 빼돌리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관 뚜껑 열어 볼 것도 아니고.”
“단테 레나투스 황제에게 저주를 받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 아니니까, 저주 안 할 거예요.”
어차피 저주하는 방법도 모른다.
해밀턴은 내 말을 질 나쁜 농담으로 이해했는지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갤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역시 그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를 훼손하라니…….”
“사람 시체가 문화재가 되어 버렸다는 데 의문은 없으시군요.”
“차라리 성회에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쪽이…….”
“대성전 밑바닥에 마의 권속인 용을 품은 시신을 500년이나 깔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회가 흔쾌히 받아들일까요?”
나의 다소 거친 언동에 해밀턴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내 말을 이해하고는 한숨을 내쉴 뿐이다.
“하긴. 사실 증거랄 것도 없는 얘기고, 이단이라고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요.”
“그렇죠.”
성회는 그 어떤 조직보다 보수적이고 완고하다. 명예나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우리가 용을 정중하게 모신 것도 모자라, 500년이나 눈치를 못 챘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러므로 그런 불온한 발언을 한 너희가 이단임에 틀림없다, 라는 반응일 게 뻔하다.
“어쨌든 단테의 시신을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노에는 분명 용의 육신이 다 준비가 되었노라 말했다.
그 말이 내내 목구멍에 실 걸린 듯 거슬린다. 어쩌면 이미 손쓰기에 늦은 상황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하는 고사하고 대성전에도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
“알아요. 그 부분을 자작님께서 어떻게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고갤 갸우뚱하며 묻자, 해밀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음, 나름대로 미인계를 써 볼까 했는데, 실패했나 보다.
“부탁하시는 겁니까?”
해밀턴이 뜻밖의 부분을 지적해 왔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지? 부탁이냐 명령이냐 묻는 건가? 부탁이면 좀 더 공손하게 조아려라, 따지고 싶은 건가?
나는 눈을 한참 굴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제가 부탁이 서툴러서……, 달리 원하시는 방식이 있으신 건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해밀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든 혼자 해결하려고 하시던 분 아닙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이라니, 공녀답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 그건가.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옆으로 흘깃 보내며 말했다.
“이젠 주변에 도움도 받고, 신경도 좀 쓰고, 그렇게 살아 볼까 생각 중이에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해밀턴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인자한 미소를 짓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 눈으로 날 볼 정도로 나랑 나이 차가 큰 것도 아닌데.
“일단 이 문제는 전하께 보고를 드리고 의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결국 카이사르도 다 알게 되는군요.”
“당연하죠. 전 지금 전하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래, 알아. 알고 있었다고.
그렇지만 카이사르가 ‘나에게 말도 않고 혼자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라며 화낼 것 같아 무섭단 말이야.
“모쪼록……, 아까 집회에서 위험할 뻔했다 같은 이야기는……, 적당히 포장해서 전달해 주세요.”
나는 해밀턴에게 최후의 희망을 걸며 아쉬운 소릴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융통성 없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사람 아니던가.
“네? 포장을 왜 합니까. 뭐든 약간의 곡해도 하시지 않도록 철저한 사실만을 전달해 드릴 겁니다.”
나중에 이 일로 카이사르가 나에게 화내게 된다면, 그건 다 해밀턴 때문인 걸로 하자.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