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가 드라코교의 뒤를 캐고 있었음을 카이사르가 알게 된 마당에, 레너드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다.
나에게는 화 한 번 안 내고 언제나 천사처럼 좋은 말만 해 주는 레너드라고 해도,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하여 며칠 후, 나는 드라코교와 관련된 이야기 전부를 레너드에게 털어놓았다.
“미리 얘기 안 해서 미안해. 확신 없이 추측만 있는 상황이라 말하기 어려웠어.”
“으음, 그랬던 거구나.”
역시나 레너드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고갤 끄덕이며 내 말을 들어 주었다.
아니, 들어 주었다고 해야 할지.
“실은 언제쯤 얘기해 주나 생각했었어.”
으응?
나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레너드를 쳐다보았다.
“뭐?”
“알고 있었거든. 네가 아고트를 시켜서 드라코교 뒷조사하는 거.”
“헉……, 언제부터?”
“아마도 처음부터.”
레너드가 당황한 나를 보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인걸. 뭐든 내 귀에 들어온다고.”
“크으……,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네요, 소공작님.”
“별말씀을요.”
내가 얼굴을 감싸 쥐고 절망했더니, 레너드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 레너드도 이 저택의 주인이나 마찬가지니까.
아고트가 에버렛과 나눈 대화며, 내가 에버렛을 만나러 나가는 거며, 모두 레너드에게 보고됐겠지.
“그러고 보니 왜 알면서도 나한테 왜 안 물어봤어?”
“먼저 얘기 안 하길래.”
“그런……!”
“비밀로 하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지. 아니었어?”
레너드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으으, 그렇게 천사처럼 웃지 말아 줘, 오라버니. 내 양심이 아프니까.
“그래도 기뻐. 결국 나한테 얘기해줘서 말이야. 헬레나는 뭐든 주변과 상담 없이 혼자 일을 해치워 버리는 편이잖아.”
“으……, 내 이미지, 정말 안 좋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늘 그랬지.
카이사르가 납치됐을 때에도 내가 결정하고 판단해서 행동했고.
아고트를 데려온 것도 내 독단이었고.
처음 황후와 만났던 일도 아버지나 레너드에겐 얘기하지 않았고. 황태자비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내가 먼저 말한 적 없고.
‘정말 독단전행이었구나……!’
“어쨌든, 그래. 대성전의 지하에 가서 단테 레나투스의 시신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거잖아?”
“응. 맞아.”
딱히 도움을 구할 생각으로 레너드에게 말한 건 아니었는데, 레너드는 얼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자작님을 통해 이 소식을 들으시면, 아마 내년 신년 예식을 대성전에서 드릴 수 있도록 조치하실지도 몰라.”
“신년 예식?”
해마다 신년 첫째 날에는 황성 내의 예배당에서 성하를 모셔 놓고 예식을 드린다. 황가는 물론 귀족들도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그런 권한이 있어?”
“음, 요즘 폐하의 건강이 많이 쇠하셔서 말이야. 전하께서 거의 대행하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야.”
“몰랐어.”
“당연하지. 이런 얘기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레너드는 비밀을 지켜 달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황후가 그런 작당 모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폐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카이사르……, 지금 많이 힘들겠구나.”
“아무래도.”
안타깝다.
이럴 때 내가 곁에서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게.
“신년 예식을 대성전에서 드린다고 해도, 지하에 들키지 않고 내려갈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기사단 전부가 호위 업무에 투입될 거니까. 적기사단이 지하 입구 쪽을 순찰할 때 들여보내 줄게.”
“헉. 달튼 경이 허락할까?”
“전하께서 나서시면 허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카이사르……. 대체 달튼에게 무슨 짓을 하길래, 그 성격 있어 보이는 사람이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걸까.
“다들 내 말만 믿고 이렇게 움직여 주는 게 이상하네.”
내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나 혼자 어떻게든 해내겠다며 발버둥 쳤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내 주변엔 붙잡을 손이 많이 있었다.
왜 몰랐던 걸까. 전생의 나는.
“세상 모두가 헬레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믿어 줘야지. 헬레나의 오라버니잖아.”
레너드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부터 변하지 않는 나의 편.
서로 죽이고 탐하고 시기하지 않는, 이런 형제도 존재할 수 있다고 내게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
“오라버니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네.”
나는 레너드에게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다지 표현하지 않던 내 반응에 레너드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그도 나를 꽉 끌어안았다.
‘가족이라는 건 좋은 거구나.’
어린애나 할 법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 * *
새해가 밝았다.
스물한 살의 첫날이다.
‘전생에서 스물한 살 때의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새해 첫날의 이른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손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크루세흐를 잡으러 갔던 게 스물한 살 때였던가, 스물두 살 때였던가.’
으음, 가물가물하군. 500년도 더 된 일이니 말이다.
“다 되었어요, 아가씨.”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베시가 옷 정리를 끝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매무새를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이 옷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베시가 곁에 서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응? 왜?”
“신년 첫 행사잖아요. 좀 더 예쁘고 화려한 옷도 많이 있는데.”
내가 오늘 선택한 옷은, 장식이 많이 달려 있지 않고 품도 크지 않은 얌전한 스타일의 원피스였다.
치맛단도 짧아서 발목이 살짝 드러났다.
“난 괜찮은데.”
“그래도…….”
베시가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패션 감각이 뛰어난 편도 아니고, 걸치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다는 주의이긴 했다.
다만 오늘은 민첩하게 행동해야 하니, 수수하고 덜 걸리적거리는 옷을 골랐을 뿐이다.
‘……라는 얘길 베시에게 할 수는 없지.’
시신 찾으러 대성전 지하에 잠입할 거야 같은 얘기를 했다가는, 베시는 기절할지도.
“아가씨가 더 예뻐 보이셨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충분히 예쁘지 않니?”
“그래도요. 특히 오늘은 브란테 아가씨도 올 텐데…….”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군.
율리카는 약혼 발표 이후 본격적으로 황성에 들어가 신부 수업을 받는 모양이었다.
기사단을 오가며 몇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잘난 듯 턱을 들고 날 내려다보곤 했지만 항상 시선은 피하곤 했다.
그 미묘한 간극이 우습기도 하고 하찮기도 해서 할 말이 없어진다.
“대성전에서 하는 거룩한 예식인데, 너무 화려하게 입고 가면 눈총을 사게 될지도 몰라.”
결국 나는 베시를 설득할 변명을 적당히 둘러댔다.
다행히 베시는 내 말에 넘어간 듯 고갤 끄덕거렸다.
“어쨌든 이 베시는 감격했어요. 아가씨께서 먼저 신년 예식에 참여하겠다는 말을 다 하시다니.”
베시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작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잖아. 저택 분위기도 아직 무겁고. 내가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올게.”
“네. 분명 올해는 좋은 일만 가득 있을 거예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힘내세요!’를 외치며 주먹을 쥐어 보이는 베시를 따라, 양손 주먹을 힘껏 쥐어 보였다.
* * *
대성전에 들어서니, 이미 자리가 절반쯤 채워져 있었다.
으레 신년 예식은 귀족 참여율이 저조했다. 황제도 자리만 지킬 뿐 예식 내내 꾸벅꾸벅 졸 정도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이번 예식엔 참여율이 꽤 높은 편이다.
‘아마 장소가 대성전이라 하니 다들 혹해서 참여한 거겠지. 평소엔 출입이 까다로운 곳이니까.’
입구에 서서 대성전 안을 휘둘러보며 생각했다.
‘뭐, 나한텐 잘됐어. 사람이 많아야 슬쩍 빠져나가도 티가 안 나겠지.’
자, 그러면 어디에 앉아야 중간에 빠져나오기 편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위치를 가늠해 보고 있는 그때.
“오셨군, 교관.”
등 뒤에서 달튼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평소와 달리 깔끔한 제복 차림을 한 달튼이 날 향해 히죽 웃고 있었다.
턱수염은 여전했지만, 목 끝까지 잠근 단추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와아, 경께서 이렇게 정갈한 차림을 하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일할 땐 한다는 의미요.”
내 가벼운 놀림을 달튼이 즐겁게 받았다.
“부단장은 성전 앞줄에 있을 텐데, 가서 만나 보겠소?”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군. 음, 앉을 자리는……, 저기 왼쪽 자리를 추천하겠소.”
달튼이 성전 중간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추천한 자리는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 최단 거리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달튼에게 속삭였다.
“경, 제 일을 눈감아 주시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응? 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만.”
달튼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을 떨었다.
“자, 내가 자리까지 에스코트해 드리리다.”
“감사합니다. 기쁘게 받도록 하죠.”
파티은 아니다만, 나는 달튼의 안내를 받아 앞으로 이동했다.
대성전 중앙의 길을 가로질러 걷고 있자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술렁거리며 나를 힐끗거렸다.
‘다들 시선들이 곱지 않으시구만.’
저 사람이 페레스카 공녀로군요. 이런 자리에 굳이 나오다니 철면피가 따로 없네. 수군수군.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다 들린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다. 에휴.
그때, 성전 안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술렁임이 일었다.
“……?”
그 기이한 공기의 변화를 나도 달튼도 느꼈다. 날 힐끗대던 사람들이 내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뭐지?”
나는 무의식중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술렁임의 원인과 마주쳤다.
율리카를 에스코트한 카이사르가 내 바로 뒤까지 걸어와 있었다.
“전하.”
달튼이 재빨리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주변에 앉아 있던 귀족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사르를 향해 인사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놀라서 차마 인사도 못한 채, 카이사르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눈앞에 있다.
“오랜만이군.”
와, 카이사르의 목소리다.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반짝였다. 입가에 살짝 번진 미소가 서글펐다.
어떻게 하지.
당장 끌어안고 싶어 미치겠는데.
“공녀.”
나를 부르는 율리카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재빠르게 허리를 숙여 카이사르에게 예를 갖췄다.
“강건하셨습니까, 전하.”
“덕분에. 걱정해 줘서 고맙군.”
“신년을 축하드립니다, 브란테 영애.”
“축하해요, 공녀. 올해는 공녀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군요.”
율리카에게도 인사를 건네자, 율리카가 새침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올해는 공녀께도 분명 멋진 영식께서 나타나시리라 믿어요.”
율리카가 피식 웃으며 내게 도발했다. 그녀의 시비에 오히려 평정을 찾은 내가 빙긋이 웃으며 받아쳤다.
“네. 영애께서도 부디 사랑받는 한 해 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율리카가 울컥한 듯 표정이 굳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오, 이젠 평정심을 찾는 게 제법 빨라졌는걸.
“공녀의 기도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분발해야겠군요. 뭐,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요. 전하, 그렇지 않습니…….”
“달튼 경. 호위 업무에 차질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철저하게 준비하였으니, 안심하십시오.”
“아, 이런. 브란테 영애.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카이사르가 굳은 표정으로 율리카를 쳐다보며 말했다. 말투마저 국어책 읽는 듯 딱딱해서, 듣는 사람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율리카는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애써 평온을 유지한 채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전하. 별말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됐고.”
카이사르는 두 번 묻지도 않고 냉정하게 율리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공녀, 다음에 또.”
“네. 강건하십시오, 전하.”
“그래. ……그대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여 말을 하고 있음에도, 날 향한 그의 목소리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율리카도 그걸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 정도로 멍청한 애는 아니었으니까.
카이사르와 율리카가 다시 걷기 시작하여, 나와 달튼은 옆으로 비켜섰다.
“……?”
카이사르가 천천히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내 새끼손가락을 스치듯 잡았다.
손가락을 누르는 느낌이 없었다면, 지나가다가 실수로 스쳤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도 가십시다.”
달튼이 다시 날 부를 때까지도,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카이사르가 스쳤던 손을 힘껏 주먹 쥐었다. 온기 한 자락 남지 않는다는 것이 분했다.
“네. 가요, 달튼 경.”
크게 숨을 들이켠 후,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