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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은 예상대로 지루했다.
성하의 설교는 긴 것도 긴 거지만 톤이 일정해서, 설교가 30분이 지날 무렵부터는 앉은 이들의 절반이 전멸했다.
나는 가을 벼처럼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앞자리 사람들을 보며 실소했다.
‘그동안 한 번도 신년 예식에 참여하지 않은 내가 승리자였군.’
500년 전 신년 예식은 이것보다 간소했었다. 어째 세월이 흐를수록 허례허식만 늘어나는군.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레너드가 지하실 입구 순찰을 할 때 맞춰서 나가야 하는데.’
대성전 내에는, 당연하게도 시계가 없다. 시간을 정해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내 바람에 응답하듯, 반대쪽 문에서 적기사단 소속의 사람이 나타났다.
마수 토벌에도 함께 했었던 적기사단의 수련병, 호크였다.
호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자기 코를 만지작거렸다. 저 어설픈 행동은 뭐야. 딱히 신호를 주고받자는 얘긴 없었는데.
뭐, 어쨌든.
‘호크가 성전 내부 순찰이 시작되면, 레너드는 지하 입구 쪽으로 이동한댔어.’
나는 레너드에게 미리 얻은 순찰 정보를 떠올렸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때였다.
바깥쪽에 앉아 있었으므로, 빠져나오는 건 쉬웠다. 다들 졸고 있는 데다, 목격자가 있다 해도 졸려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이쪽이었지, 분명.”
지하로 이어지는 문은 성전 동쪽 끝에 있다고 했다.
나는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헬레나, 이쪽이야.”
다행히 길을 잃고 헤매기 전에 레너드가 날 발견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날 기다리고 있는 레너드에게 총총 다가갔다.
“오라버니.”
“30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
“응. 그 정도면 충분해.”
“그래. 조심하고.”
레너드가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후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애정 가득한 표정만으로도 나는 용기가 샘솟았다.
“다녀올게.”
레너드에게 짧게 인사한 후, 나는 지하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쪽은 빙글빙글 도는 좁은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지라, 나는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시계는 없지만, 30분 안에는 돌아올 수 있겠지. 내 시신만 확인하고 올 거니까.”
손바닥에서 땀이 날 것 같은 긴장감에, 나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 드디어 지하층에 도착했다.
지하 특유의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물씬 풍겼다. 나는 입구에 있는 촛대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당황했다.
“헉, 이게 뭐야.”
지하실 내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넓었다.
더구나 관으로 추정되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핏 봐도 열 개는 넘어 보였다.
낭패다.
“하긴, 내 시신 딱 하나만 안치되어 있을 리가…….”
이거, 30분 안에 찾아낼 수 있나?
마음이 초조하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갔다.
“후우, 좋아. 할 수 있어, 헬레나. 샅샅이 찾아보는 거야.”
으스스한 기운에 몸을 가볍게 떨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끌며 내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잠깐, 기다려.”
“……!”
말도 안 돼!
벌써 들켰어?!
나는 비명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뒤로 돌리며, 나는 왼손으로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물 흐르듯 허공을 갈라 상대의 목을 겨누기 위해 뻗어 간 내 검은, 그러나 상대의 머리카락 한 올 베지 못한 채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앗, 이런.”
내가 공격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상대는 너무나 여유롭게 내 팔을 잡아 공격을 막았다.
그 즉시 나는 차선책을 떠올렸다.
상대의 팔을 잡아 비튼 후에, 그대로 명치를 걷어찰 생각……, 엇, 잠깐만.
“……카이사르?!”
“쉬잇.”
뒤늦게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경악했다.
아니, 율리카와 함께 예식 중인 대성전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와아. 등골이 오싹했어, 방금. 진짜로 죽을 뻔했네.”
카이사르는 능청스럽게 내 손에서 검을 빼앗아 갔다.
“너,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걱정 마. 황태자는 지금 ‘갑자기 변경 지역에서 야만족과 마찰이 생겼다’는 아주 급한 보고를 받고 황성으로 돌아간 상태이니까.”
휘리릭. 카이사르가 허공에서 단검을 몇 바퀴 돌린 후, 손잡이를 내 방향으로 하여 건네주었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건넨 검을 받아 허벅지에 다시 장착했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벤 변경후와 말 맞춰 놨어. 일부러 브란테에게 말도 흘렸고. 지금쯤 해밀턴을 태운 황가의 마차가 열심히 황성으로 달려가고 있겠지.”
아……, 해밀턴.
이번 일에 대해 싫은 내색이었는데, 결국 휘말리고 말았군요.
그러고 보니 해밀턴, 나랑 만난 일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잘 말해 달라는 부탁에 정색했었지.
쌤통이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카이사르가 씩 웃으며 고갤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조금 전 성전에서 마주쳤을 때 그 냉정하고 살벌하던 카이사르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카이사르다.’
그 표정을 확인하니, 어쩐지 안심이 된다.
“더는 없어.”
“좋아. 그러면…….”
카이사르가 나를 향하여 양팔을 쭉 펼쳤다.
“안아 보자.”
어쩐지 실소가 나온다. 나는 촛대를 내려놓은 후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내 뺨에 그의 옷깃이 닿기가 무섭게, 카이사르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거의 파묻히듯 그의 품에 쏙 들어갔다.
‘많이 야윈 것 같네.’
마음고생이 많은 건가.
그러고 보니 요즘 황제의 업무까지 하고 있다고 했지.
“밥 좀 많이 먹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카이사르가 먼저 꺼냈다.
“살 빠진 것 같은데. 이러다가 소멸해 버리면 어떻게 해, 헬레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네가 먹는 당분,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거야?”
키득키득. 카이사르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들썩거리는 그의 몸에 뺨이 간지럽다.
“자, 해후의 시간은 이쯤 하고.”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카이사르가 나를 천천히 품에서 놓았다.
아쉬운 게 나뿐인 건 아니겠지.
나는 여전히 그의 소맷자락을 꽉 잡은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드라코교 집회에 몰래 잠입을 하셨다고?”
윽.
나는 한쪽 눈썹을 으쓱하며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지금 여기서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지. 안 그러면 또 위험한 일에 혼자 뛰어들 거 아냐. 지금처럼.”
카이사르가 내 양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그런 일은 제발 의논을 해 줘, 헬레나.”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카이사르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걸.”
억울한 마음에 내가 따지듯 말했다.
말한 직후, ‘말하지 말걸’하고 얕게 후회했다.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 너무나 확실히 보였으니까.
우울을 담은 그의 억지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안다. 나는 그에게 죄책감을 지우고 말았다.
“……레너드나 해밀턴에게라도 꼭 말해 줘. 그러면 내게도 닿을 테니까.”
한참 만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할게.”
말뿐인 약속이지만, 이것으로 그가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가 고갤 끄덕이는 날 보고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러면 단테 레나투스를 찾으러 가 볼까.”
카이사르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이 한 톤 높여 말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말투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