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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난리도 아니었다면서요?”
기병장인 가르말 공작에게 서류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 로위나는 자신의 길을 막고 묻는 기사단 시종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눈썹을 으쓱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럴드 님께 들었어요. 전하께서 또 한차례 피바람을 일으키셨다던데요.”
“어제 상해 사건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만.”
“페레스카 부단장님이랑 한바탕하셨다고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던데.”
“부단장님, 용감하시네요. 그 천사 같은 얼굴로 감히 전하를 거스를 생각을 다 하시다니……!”
시종들이 저들끼리 자문자답하고 감탄하고 모든 걸 다 하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자신의 가던 길을 왜 막아 세웠는지 묻고 싶다.
‘감히 전하를 거스른다……, 라.’
로위나는 곰곰이 어제 일을 반추해 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전하께서 소공작의 뜻을 거스르려다가, 결국 소득 없이 깨갱 꼬리를 내린 사건이 아니었던가.
‘전하를 제일 많이 거스르는 인간은 나인 것 같은데.’
카이사르에게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 싫습니다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런 자신을 위협하거나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뭐, 툴툴대긴 하지만.
“소공작님과 전하는 친한 지기이시니, 피바람이 불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할 것 같아 로위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 천사 같은 부단장님과 전하가요? 친구 없는 전하께서 협박하여 곁에 두시는 게 아니라요?”
“헉, 나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 들었어. 사실 전하께서 부단장님께 마음이 있으시다던가.”
“앗, 맞아. 전에 전하께서 부단장님께 ‘내 연심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게 맞는가.’ 하고 따지시더라.”
음, 그건 레너드가 아니라 헬레나에게 전달되는지를 물으신 걸 텐데.
“어머, 웬일이니. 브란테 영애에게 영 시큰둥하시더니, 그런 이유가!”
“그럼 페레스카 공녀는 뭐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
드디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사고도, 한 번 엇나간 다수의 사고 앞에서는 쉽사리 뭉개진다.
“대역이지.”
“그래, 대역이라 생각해.”
“아……, 대역인 건가.”
이 잘못된 사고의 흐름,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인가.
“저희는 전하와 부단장님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결국은 무시무시한 결론을 내린 시종들이 눈빛을 빛내며 로위나에게 선언했다.
로위나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그런 시종들을 훑어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러고 다니시는 거 기병장님도 아십니까?”
* * *
사람들은 그를 냉혈한이라 부른다.
선량함도 자비심도 없을 거라 말한다. 어떤 이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평생 타인을 아끼는 게 뭔지도 모를 거라고.
율리카 브란테를 대하는 그를 보면, 로위나도 그 말에 동의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전하. 제가 전하를 위해 다과를 준비했는데, 괜찮으시면 함께 즐겨 주시겠어요?”
카이사르의 업무가 끝날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린 율리카가 드디어 발언권을 얻어 동행을 청해 왔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표정은 냉랭했다. 분노도 기쁨도 없었다. 차가운 동토……, 라기보다는 사막에 가까운 눈빛이다.
“유감이지만, 입맛이 없군.”
“그럼 차라도……. 귀한 차를 얻어 왔으니, 부디.”
“영애.”
율리카의 애원에 카이사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쓸 것 없지 않나. 어차피 사랑받기 위해서 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카이사르의 가시 돋친 말에 율리카의 미소가 어색하게 멈췄다. 고장 난 인형 같았다.
“내 주변을 황후에게 보고하고, 주요 인사를 황후 측 귀족들로 채우고, 내실의 시종들까지 갈아치우고…….”
카이사르가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그간의 행적을 읊었다.
“그만하면 황태자비로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그게, 저는…….”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보기 좋군. 뭐, 아직 황태자비가 아닌 걸 생각하면 도리어 넘칠 정도지만.”
피식.
카이사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은 전혀 웃지를 않아, ‘웃는다’는 말을 쓰기엔 위화감이 들 만큼 살벌한 미소였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갤 숙인 율리카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로위나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카이사르의 곁을 따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대로 두실 겁니까?”
“그럼 가서 안고 토닥여 주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좀 가엾긴 하군요. 영애도 그저 가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가엾다라…….”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복도 창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에 이끌리듯, 카이사르는 창가로 다가갔다.
로위나 역시 슬쩍 곁에 다가가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내원에서 적기사단의 수련병들과 둘러앉아 있는 헬레나가 보였다.
‘목소리만 듣고도 아는 건가.’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섞여 구분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알아챘담.
로위나는 곁눈질로 곁에 선 카이사르를 흘끗 쳐다보았다.
‘……냉혈한.’
문득, 그 단어가 그와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헬레나를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은 온갖 감정으로 가득했다. 회한, 그리움, 슬픔, 애틋함, 기쁨, 괴로움, 후회, 자책……. 아는 단어를 다 끌어모아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집합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이 역시 ‘웃는다’는 말을 쓰기엔 위화감이 든다.
울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분명 착각은 아니리라.
“가여운 건, 오히려 나겠지.”
카이사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로위나 역시, 그의 말을 납득했다.
폭군. 냉혈한. 자비 없는 늑대.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고 말 것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자.
……왜 다들 그를, 그렇게 보는 걸까.
정작 본인이 가장 원하는 건 눈앞에 두고도 가지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초라한 남자일 뿐인데.
“우리 헬레나, 예쁘지?”
카이사르가 로위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정말 제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팔불출 같았다.
“저렇게 예쁜데, 나랑 소원한 사이에 다른 놈이 껄떡대면 어떻게 하지.”
“그렇군요. 황태자비도 거절하셨겠다, 페레스카가의 영애에 눈독 들일 이들도 꽤 되겠네요.”
로위나가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카이사르와 율리카가 약혼한 이후, 페레스카가로 구혼 요청을 해 오는 가문도 꽤 되는 모양이었다.
“아, 어쩌나. 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카이사르가 무시무시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로위나는 흘끗 그를 살폈다. 농담인 양 흘려 말했지만 결코 농담만은 아닐 거라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고로, 어느 가문에서 구혼을 청했는지 따위는 함구하기로 했다.
이 나라의 뭇 남성 인구수를 일부러 줄일 필요는 없지.
“황태자라고 해 봐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군. 안 그런가, 로위나?”
“마음대로, 말이죠.”
오래 머물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는 없는지라, 카이사르는 곧 창가에서 물러났다.
아쉬움 가득한 그 표정이 곁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다시 긴 복도를 걸으며, 로위나가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아랫사람들에게 휴가 같은 건 팍팍 주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
“그냥 쭉 쉬는 건 어때.”
“제가 무례하게도 참 재미없는 농담을 했군요.”
“그렇군.”
웃음기 하나 없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후,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화는 다시 업무에 대한 것으로 돌아갔다.
“드라코교에 대한 조사는?”
“녹트 자작의 잠입 후로 활동이 뜸해져서 어렵긴 하지만, 추적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능한 빨리 본거지를 알아내도록.”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헬레나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이 보인다면, 몰살도 고려하고 있으니까.”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한 여자를 바라보았던 남자는, 어느새 냉혹함 가득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상대가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위압감으로 온몸을 감싼다. 흡사 자비 없이 적을 물어뜯는 맹수와도 같다.
‘역시, 모르겠다니까.’
얕은 한숨을 내쉬며, 로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