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92/156)

11. 악의는 조용하게

이른 아침, 검 훈련을 하러 가든 하우스로 나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 보니, 홀에 손님이 와 있었다.

흔한 복장에 갈색의 망토를 걸친 남성으로, 입은 의상이 단복은 아니었지만 얼굴은 눈에 익어, 나는 그가 적기사단의 사람임을 알아챘다.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내 쪽을 인지하고 날 쳐다보았다. 그쪽에서 먼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기에 나 역시 가벼운 묵례로 인사했다.

‘왜 온 거지? 레너드는 지금 황성에 있을 텐데.’

하긴, 적기사단의 용무였다면 단복을 입고 왔을 테지.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용무가 있는 건가.

의아함에 절로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 의문은 비교적 빨리 해소됐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 * *

“오전에 적기사단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식탁에 디저트가 올라왔을 때, 아버지가 먼저 그 일을 입에 올렸다.

역시 아버지를 만나러 왔던 거구나. 나는 와인 잔을 내 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더군.”

“조사요?”

“호리오의 상선에서 일한 적 있던 일꾼들 말이다.”

아, 그 용무였구나.

왜 그가 황성이 아닌 공작저로 온 것인지 이해가 간다.

황성에서 말이 오가면 호리오가 있는 백기사단의 귀에 들어갈 우려가 있을 테니까.

“다섯 명쯤 만나 보았는데, 대부분 오래전에 일을 그만둔 이들이라 큰 소득은 없었다더구나.”

“저런, 아쉽네요.”

“음. 다만 그 일꾼들의 소개로, 아직도 상선에 오르는 일꾼 하나를 소개받은 모양이야.”

“정말요? 잘됐네요.”

나는 진심으로 반가워 맞장구를 쳤다.

뭔가 그럴싸한 정보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호리오가 발레르에게 책잡힐 만한 약점이 뭔가 나왔을까?

불륜? 기사단의 인사 비리? 장사치이니, 어쩌면 횡령일지도.

“밀수를 한 모양이더군.”

“오오…….”

예상을 약간 벗어나긴 했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은 결과다.

덕분에 내 감탄사도 애매하게 튀어 나왔다. 격하게 놀라기도, 아예 담담하기도 애매한 정답이었다.

레너드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밀수라면, 밀이나 비단 같은 것을 몰래 들여왔던 겁니까?”

레너드의 질문에 아버지가 고갤 저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낫지.”

뭐야. 설마 밀수 품목도 그다지 건전하지 못한 것이었나.

‘설마 노예를 들여왔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500년 전의 밀수꾼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뭐, 지금 시대에 노예는 거의 사라진 모양이다만.

“케고르.”

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기며 집사를 불렀다.

그러자 식당 입구 쪽에 서 있던 케고르가 식탁으로 다가와, 식탁 한가운데에 손수건으로 싼 무언가를 펼쳐 놓았다.

펼쳐진 손수건에 들어있던 것은 말라서 검녹색으로 변한 풀이었다. 풀은 이미 바짝 말랐음에도 냄새가 역했다.

“이게 뭡니까? 찻잎?”

레너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른 대륙에서는 이런 독한 향이나 맛을 차로 즐기는 나라도 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이건 찻잎이 아니다.

나는 이 풀의 정체를 알고 있다.

“벨라돈나로군요.”

역한 냄새에 미간을 찡그리며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으음’ 하는 소리로 내 말을 긍정했다.

“알고 있구나, 헬레나.”

알다마다.

전생의 나는 향만 맡아도 독의 종류를 대강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있었으니까.

“벨라돈나? 그게 뭡니까?”

레너드가 묻기에, 내가 차분히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말린 잎을 우려서 마시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이완 작용이 일어나. 그래서 근육통에 사용하기도 하고.”

“의약용이야?”

“아니, 유독 식물.”

내가 딱 잘라 단언했다.

내가 이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부랑아 시절 홍등가의 여자들로부터였다.

이완 작용으로 동공이 확장되는 효과가 있어, 홍등가의 여자들이 이것을 달여 마시곤 했다.

물론 목숨 걸고 하는 짓이다. 그러다가 죽어 나가는 여자도 수두룩했으니까.

“이걸 꾸준히 복용하거나 과용하게 되면 환각, 경련, 혼수, 치사에 이를 정도의 독성이 있어.”

“헬레나의 말이 맞다. 모든 독은 약으로도 쓸 수 있지. 다만 이건 독으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아.”

아버지가 내 말에 긍정하여 설명했다.

근육통에 좋은 약이라면 이런 위험한 약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많다.

굳이 약재로 쓰기 위해 벨라돈나를 밀수하여 올 이유가 없단 의미다.

“독을 밀수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모양이더군. 알라우네나 아코니틴 같은…….”

아버지의 입에서 낯선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들을 일 없는 이름들이다. 모두 독성이 강한 유독 식물의 이름들이었다.

“꽤 최근까지도 상당량의 독성 재료를 밀수해 온 모양이다.”

“최근까지라는 건, 지금은요?”

“몇 달 전부터 그쳤다더군. 시기적으로 보면, 레너드에게 누명을 씌우기 얼마 전부터 말이다.”

대충 그림이 나오는군.

밀수해 오던 것을 발레르에게 들켰고, 그 죄를 덮는 조건으로 레너드에게 누명을 씌운다…….

‘밀수만 두고 보면 협박에 휘둘릴 정도의 죄는 아니지만, 품목이 하필 ‘독’이라…….’

단순한 밀수였다면 벌금을 물거나 얼마간 영업 정지나 받고 끝났을 일이다. 손해야 있겠지만, 역풍을 감수하며 페레스카 공작가와 척을 질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품목이 그런 유해 물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칫하면 국가 전복의 죄까지 덮어쓸 수 있다.

“하여 조만간 호리오를 찾아가 이 일로 추궁을 해 볼 생각이다만.”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버지가 의견을 내놓았다.

잘못을 알았으니 그 잘못을 추궁하여 죄를 묻는다. 당연하고도 순리적인 판단이다. 아버지의 성품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거……, 일단 묵혀 두죠?”

내가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제안했다.

오로지 정도만 걸을 줄 아는 이 집의 두 남자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날 쳐다보았다.

“지금 호리오가의 문제를 밝힌다고 저희에게 돌아올 이득이 없어요.”

“이득이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밀수는 엄연한 범죄야.”

“그리고 좋은 협박 소재죠.”

두 사람의 동공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아니, 우리 집안에 어쩌다가 이런 애가 나왔지.’ 하는 표정이었다.

“헬레나. 옳은 일을 함에 있어서 결코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정신이다.”

“밝히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때를 기다리자는 거죠. 괜찮은 패가 나왔다고 다 까발리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 헬레나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레너드, 너까지…….”

“벌써 밝히기엔 아직 못 미더운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레너드가 총기 어린 눈빛으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미 들여온 밀수품이 어디로 팔려 나갔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호리오가 밀수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사 간 이들이 꼬리를 감출 테니까요.”

내 말에는 단호하던 아버지도, 레너드의 설득엔 ‘으음’ 하고 잠시 신음을 삼켰다.

“……좋다. 이 문제는 전하와 먼저 의논해 보도록 하마.”

아버지가 한 걸음 물러나 답했다. 재고한다는 듯한 표현이었지만, 사실상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의 대답에 레너드가 날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됐지?’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에 나도 절로 미소가 나왔다.

역시 내가 오라버니 하나는 잘 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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