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호리오의 약점은 알아냈고.
이제 크루세흐의 문제도 해결해 보긴 해야 할 텐데.
“하지만 전하께서 본거지를 찾을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 하셨잖아요?”
벽난로에 불을 지피던 아고트가, 그 앞에서 불이 붙길 기다리던 날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근질근질해서.”
“푸훗.”
“뭐, 뭐야. 왜 웃어?”
“그렇지만 뭐랄까……, 아가씨답지 않은 말이구나, 싶잖아요.”
으음, 그렇군.
어쩐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세상만사 귀찮기만 하던 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 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다르다. 좀 더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력형 인간이며 사교형 인간으로 거듭나……, 려고 힘내고 있다.
그냥 헬레나가 아닌 뉴 헬레나라 이 말이다.
“변경 지역 돌면서 마수 토벌이라도 할까?”
“좋네요. 전하께서 아가씨 잡으려고 추격전이 펼쳐질지도요.”
“아고트……, 반항기구나. 나보다 카이사르의 편을 들 줄이야.”
“물론! 제 영원한 우상은 오로지 아가씨 한 분뿐이지만요!”
아고트가 내 말에 흥분해서는 들고 있던 풀무를 허공에 휘둘러 댔다.
저거 무게 꽤 나가지 않나.
“그래도 이번 일은 전하의 의견에 동의해요. 아가씨께서 자꾸 위험한 일에 휘말리시는 건 싫어요.”
으음. 대성전에서의 일을 말해 주지 않는 게 나았으려나. 나는 솔직했던 지난날을 짧게 후회했다.
“하아. 적어도 노에 녀석이 뭐 하는 놈인지에 대해서만이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덜 답답할 텐데.”
“누구요?”
“노에 말이야. 그 교주 녀석…….”
거기까지 말한 후,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아직 해밀턴에게도, 카이사르에게도, ‘노에’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실례합니다, 아가씨.”
그때 방문이 열리고 집사인 케고르가 나타났다. 벽난로를 확인하러 온 모양이다. 아고트가 화들짝 놀라며 멈췄던 풀무질을 다시 시작하는 걸 보면.
“아, 케고르. 물어볼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마법사 길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노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길드에 그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케고르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남쪽 지방 어딘가에 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만.”
“네? 수도에 없나요?”
500년 전엔 수도에 있었는데?!
“마법사들의 수가 급감하고 길드의 권위도 추락하자, 지방으로 밀려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길드가 존속하고 있는지부터 걱정되는 얘기네요.”
“아마 있긴 할 겁니다. 학술가들도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아봐 주시겠어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케고르가 날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크흠’ 하는 기침 소리로, 아직도 불을 채 피우지 못한 아고트에게 주의를 주고는 방을 나섰다.
덕분에 아고트는 이 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풀무질을 하게 됐다. 안쓰러워라.
‘남쪽 지방이라. 내가 수도를 나가게 되면 카이사르가 당장 알아채겠지.’
아고트가 말한 추격전이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으음.
“……아고트.”
“네, 아가씨.”
“네가 다녀와야겠다. 길드.”
“네?”
풀무질을 하느라 나와 집사의 말을 듣지 못했던지, 아고트가 토끼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내 충성스러운 메이드에게 명령했다.
“날 위해 길드에 가서 알아 와 주렴. ‘노에’라는 인물에 대해서.”
* * *
조금씩이지만 단서가 모이고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아도,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천천히, 꾸준히 진행하다 보면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황후와의 문제도, 크루세흐에 대한 것도.
나와 카이사르에 대한 것도.
그러나 언제나 격변의 사건은 이런 평화롭고 순조로운 때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 * *
쾅쾅쾅.
눈이 쏟아지던 겨울의 끝자락. 늦은 밤에 누군가 저택 대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한밤중임에도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뭐야, 무슨 일이야?”
본능적으로 불온한 공기를 감지했다. 나는 네글리제 차림으로 침실을 나와 1층 홀로 향했다.
눈에 흠뻑 젖은 황성의 사자가 홀 중앙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헬레나.”
“오라버니.”
레너드가 기사 단복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그 모습에 뭔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게…….”
레너드의 표정이 안 좋다.
“서둘러 주십시오, 소공작. 공작께서는 이미 황성에 당도해 계실 겁니다.”
황성의 사자가 레너드를 재촉했다. 레너드가 굳은 표정으로 사자에게 말했다.
“곧 가겠습니다. 먼저 마차에 타시죠.”
사자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저택을 나갔다.
레너드가 사자의 뒷모습을 보고 짧은 한숨을 내쉰 후,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 황망한 사태에 대해 설명했다.
아주 짧고, 간략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폐하께서 승하하셨어.”
아.
황망할 만하군.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다소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발레르 공작이 내미는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발레르에게 매번 도움을 받다 보니, 발레르가 요구하는 것들을 거절할 수도 없게 됐다.
카이사르가 황태자가 되면서, 페레스카를 위시하여 세력을 키워 간신히 발레르와 힘의 균형을 맞췄다만, 발레르의 위세를 엎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그 난장판을 고스란히 카이사르가 물려받게 됐다 이 말이지.”
선황의 장례가 끝나고, 급하게 준비된 대관식도 폭풍처럼 지나간 어느 날.
한숨을 폭폭 쉬고 있는 내게 아고트가 이유를 물어, 나는 이 길고 지난한 배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제면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뭐,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지금 카이사르는 가시나무 옥좌에 앉은 왕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원망하는 건 좋지 않다만, 선황의 무능함이 새삼 미워졌다.
‘뒤늦게 카이사르의 편을 들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긴 하지만.’
내 마수 토벌 공적을 눈에 띄게 치하했던 것도, 카이사르의 세를 키워 주기 위함이었겠지.
그러나 발레르를 누르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심지어 그 시절에도 브란테 백작에게 정사의 도움을 청했던 모양이었고.
“그나마 그동안 카이사르도 세력을 어느 정도 키워 놓았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면 발레르에게 놀아날 뻔했어.”
아마 선황이 죽자마자 황성을 아예 발레르의 사람들로 채우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몇 년 후쯤에 카이사르를 끌어내고, 황후의 아들인 프란 황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 했을지도.
……음, 아찔하군.
내가 재차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때, 언제 들어왔는지 베시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아가씨! 큰일 날 분이시네, 정말!”
“엇, 베, 베시?! 왜?!”
“언제까지 폐하를 이름으로 부르실 거예요?! 아무리 친한 친우라 하셔도, 이젠 그러시면 안 된다고요!”
“뭐 어때. 나라님 안 계실 땐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인데.”
“어머, 세상에! 안 돼요, 안 돼!”
으음.
뭐, 나도 생각은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호칭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 존댓말을 하는 나도 이상하지만, 내게 하대하는 카이사르라니……, 어우, 생각만 해도 어색하단 말이야.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베시?”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를 뵈러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응접실에 에버그린 양이 와 계세요.”
“로위나가?”
으,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보통 해밀턴이나 로위나가 날 찾아올 땐 영 귀찮은 임무를 가지고 오는 경우가 태반이란 말이지.
나는 불길한 예감에 울상을 지으며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아고트가 날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고갤 저었다.
절망적이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